메뉴 건너뛰기

close

▲ 한남동 작업실에 모여 꿍꿍이를 짜다.
ⓒ 박해얼

“요새 취업도 힘들다는데 무슨 일 있어?”
“자네, 실연이라도 당했나?”
그리고…

"너 미쳤지?!”

꿍꿍이를 드러내자 주위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진득하게 앉아 토익책이나 한 번 더 들여다보지 무슨 쓸데없는 생각이냐?'.'실연이야 여자친구가 있어야 가능할 텐데 넌 그것도 아니고, 무슨 큰 일이라도 있는 거니?’

26개월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떠들어대던 녀석이 돌연 휴학을 한다고 했으니 이상했을 법도 하다. 물론 어서 졸업할 날만을 기다리던 차에, 휴학을 하리라고는 역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단은 지난 9월 초 받은 전화 한 통이었다.

"기봉아, 너 유럽 안 갈래?"
"형,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 일 때문에 간혹 해외에 나가던 승희 형이었다. 그랬기에 처음에는 그저 ‘외국에 갔다 올게’ 하고 또 약을 올리는가보다 했다. 그런데 유심히 듣고 보니 그 게 아니었다. 함께 가자는 이야기였다.

99년의 미련, 4년 반 만에 찾아온 기회

지금으로부터 4년하고도 6개월 전, 얼마 되지도 않는 돈을 벌어 홀로 유럽에 갔던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카를 대교의 환상적인 야경과 시원한 맥주, 다뉴브 강가에 앉아 케첩 바른 식빵을 씹어대며 흘리던 눈물, 그리고 우수에 찬 로마와 역설적 희망의 시벨리우스.

그러나 처음 하는 해외 여행의 기쁨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언제 또 유럽에 오나’에서 비롯된 욕심 때문이었을까? 모든 나라 모든 도시를 둘러보고 싶은 욕심이 항상 떠나지 않았고, 실제 그렇게 여행을 했다.

한 나라, 아니 한 도시에 한 달을 머물러도 온전한 그네들의 모습을 알기는 힘든 노릇이다. 그런데 하루 이틀마다, 심지어 하루에 두 도시를 커버하는 ‘속도전’을 거듭하는 (여행 아닌) 이동을 하다니. 쌓이는 것은 피로요, 더해지는 것은 조급함이었다. ‘나 홀로 유럽 여행’이라기보다는 ‘왜 왔니? 극기 훈련’ 그 자체.

사정이 그러했으니 아쉬움이 없을 리가 있나? 언젠가 차분하게 돌아보며 느낄 수 있는 여행다운 여행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들과 함께 섞이는 여행을 말이다. 그런 소망을 간직한 채 조신하게 살고 있는 때, 여행 제안을 받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대여섯 시간이나 흘렀을까? 그 날 밤 전화를 걸어 한 마디.

"형! 저 내일 휴학합니다."

루브르보다는 뒷골목으로!

99년 여행의 목적지는 대부분 루브르나 콜로세움 등 여행 책자에서 친절하게 설명된 역사 유적들이 대부분이었다. 허름한 바를 찾아 들어가 맥주 한 잔 하기보다는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나았고, 에스프레소의 진한 향에 취할 시간이 있으면 빨리 다른 도시로 ‘이동’해야 한다는 신조 아닌 신조를 갖고 있었다.

▲ 색다른 유럽을 찾아.
ⓒ 권기봉
그런데 지난 4년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박물관 진열장을 통해 배우는 앎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느끼는 세상이 더 소중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기 스스로의 욕구에 따라 배우고 느끼는 것에 대한 열망이, 남들이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고 의무 지워주는 것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교과서를 따라가는 여행’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적 외침에 따라 찾아가는 여행을 하고 싶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10대 때 겪는다는 '질풍 노도의 시기'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게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동기가 있다. 단조로운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쁨. 그리고 스스로에게 빠져들 수 있는 시간적·공간적 여유. 자기를 찾아 어디론가 떠날 수밖에 없는 숙명과도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던 요즈음, 유럽 여행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래서 더욱 찾아가고 싶은 곳이 화장기 없는 도시의 뒷골목과 수수한 유럽의 시골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들의 진솔한 모습 앞에서 함께 순수해지는 것이 사람 아니던가. 관광객과 관광객을 기다리는 사람보다는 실제 그 곳에 살고 있는,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여행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패키지 관광이 아닌 바에야 99년의 경험이나 주위를 둘러봐도 대부분의 유럽 여행 방식은 ‘유레일 패스’(철도 정기이용권)를 이용한 기차 여행이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철도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유럽이라 할 지라도 전국 방방곡곡까지 노선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철도 여행을 하다 보면 짐에 치이고 4명이 움직이는 데 들어가는 숙박비는 둘째 치더라도,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또 머무르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지만, 기실 '자유'가 박탈된 여행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캠핑카. 일단 기차 여행보다 저렴하게 이동과 숙식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닿는 곳에 차를 세우고 현지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유리한 방식이다. 그래서일까? 캠핑 여행이 유럽 사람들의 대표적인 여행 방식이라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도 싶다.

"선생님은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분히 갑작스럽게 추진된 여행이 순순히 풀리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장 심각한 걸림돌은 역시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들 하는 ‘돈 문제’. 특히 승희형이나 해얼형 같은 경우에는 아이가 각각 둘씩 딸린 한 가정의 가장이다. 두 달간의 외유는 곧 그 가정의 수입이 반 토막 혹은 아예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연신 쏟아져 나오는 부동산 대책과는 무관한 서울 집값. 사랑스런 가족과 오순도순 살 집 한 채 마련하고자 꼬박꼬박 주택청약부금과 장기주택저축을 붓고 있는 이 두 사람. 총 2천만 원에 가까운 여행 경비를 마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예비 청년실업자'인 나 역시 목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 시청역에서 유럽의 '전체'를 조망하다
ⓒ 권기봉
10월 초부터 거의 밤샘을 하다시피 기획안을 만들기 시작했고, 이름 있는 회사에 기획안을 넣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거의 없었다. 기획안이 '좋다', '나쁘다'라도 답을 해주어야 하는데,아예 회신조차 없는 회사들이 열에 아홉이었다. 간혹 오는 답들도 부정적인 의견이 대부분. 심지어는 어디 막무가내로 돈 내놓으라고 구걸한 것도 아니요, 수능 시험을 본 것도 아닌데, "선생님은 떨어졌습니다"라는 답변까지.

그래도 여행의 성격을 십분 이해하는 기업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예상 출국일보다 근 한 달을 늦춰가며 스폰서를 구한 결과, 유럽에 갈 수 있는 비행기와 타고 다닐 캠핑카,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D-3

"기봉아, 너 이 책 한 번 꼭 봐라."

여행 준비에 골몰하던 즈음, L형이 책 한 권을 권한 적이 있다. 다카하시 아유무가 쓴 <러브 앤 프리>. 종전의 여행 책과는 너무나 다른, 26세 청년의 자유분방한 방랑기였다. '자기를 찾아 떠나는 젊음의 세계방랑기'라는 부제에 걸맞게, 아유무는 위대한 건축물이나 멋들어진 예술작품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이 사회가 싫거나 무언가 고민의 해답을 얻지 못해 떠난 부적응자의 기록은 아니다. 아유무는 1년 8개월 동안의 신혼여행에서 보고 느낀 바를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여행기간과 신혼여행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이렇게 풀어낼 수 있는 그의 감수성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정작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그러한 특이함이 아닌 그의 꿇릴 데 없는 자신감과 인간에 대한 사랑, 사회적 통념에 순응하지 않는 개성이었다.

<러브 앤 프리>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지금, 이제 비행기에 몸을싣는 일만 남았다. 과연 2003년에서 2004년으로 이어지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을 보고 느끼며, 또 울고 올까?

누구의 말대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실업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탈 지 모를 대학 4년 학생. 아직 알 수 없는 여정이기에 기대감의 크기에 비례해 겁도 많이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유무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안에서는 떠나라고 외치는 데도 그렇지 못할 때 사람은 병이 든다는 것을, 무언가를 잃지 않기 위해 부여잡고 있을 때 보다 시원스레 떨쳐 버릴 때 오히려 또 다른 무언가를 얻을 기회가 온다는 것을, 아유무는 말하고 있다.

캠핑카, 누가 타나?

이번 멤버 중 가장 나이가 어린, 그러나 얼굴은 가장 삭은 '핀란디아' 권기봉. 천문과 지구물리, 해양학 등을 공부하지만, 지난 3년 동안 배운 것은 북두칠성이 '거 기' 있다는 것뿐이다. 학점이 좋지 않은 데 대한 변명일까?

그는 대학보다는 자연과 사람 사이에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믿는다. 특히 폐사지나 우리나라 곳곳에 산재한 역사유산을 돌아보며 하나씩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싶다는 그. 이제 유럽행 비행기를 탈 그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버리고 올지. 아직은 누구도 알 수가 없다.


'태양의 정신'을 의미하는 한글 이름을 갖고 있는 박해얼. 이름의 영향일까? 딱딱한 주제보다 친근한 소재로서의 한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믿는 그. 인터넷 ID로 '국산디자인'을 쓰고 있을 만큼, 그는 한글과 그 디자인에 인생을 걸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고가 국수적인가? 반대다. 그의 자유분방한 사고는 우리 사회에서의 '30대 중반'이 주는 의미를 무색케 한다. 유럽에 가서도 한글의 더 멋진 디자인을 위한 구상에 골몰하겠다는 그는, 오늘도 애마를 타고 서울 하늘 아래를 달리고 있을 것이다.

'다모토리' 최승희. 그 역시 <오마이뉴스>의 뉴스게릴라다. 본업은 방송작가라지만 오히려 사진가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그. 그가 찍는 사진은 화사한 꽃이나 웅장한 풍경이 아니다. 다모토리가 향하는 곳은 우리네 뒷골목.

뛰어 노는 아이들과 마실 나온 할머니, 집주인의 성격을 빼닮은 담장과 대문을 볼 때 진정한 삶의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 그는 유럽에 가서도 콜로세움은 찍지 않고 로마 뒷골목을 헤매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한 손에는 맥주병을 들고. / 권기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