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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해안에 있는 옛 돈대(돈대는 외침을 막기 위해 쌓은 진지)
강화 해안에 있는 옛 돈대(돈대는 외침을 막기 위해 쌓은 진지) ⓒ 박도
우리 가요 <애모> 가사 중에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라는 노랫말이 있다. 나는 시인 ‘김남주’라는 이름만 떠올리면 그 노랫말처럼 갑자기 작아지고 내 지난 삶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1945년, 김남주 시인은 1946년생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와 나는 생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이른바 ‘TK’ 중의 TK 진원지인 경북 구미에서 중농이요,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난 데 견주어, 그는 전라남도 해남 바닷가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지도 출신 학교도 조금의 공통점도 없다. 그는 현대사의 거친 파도를 온몸에 부딪치며 살아왔지만, 나는 그와 반대로 격랑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교도소는커녕 시위 때도 경찰이 최루탄만 쏘면 잘도 도망쳐서 파출소 한번 끌려가지 않는 겁쟁이 소시민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고, 설사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더라도 그가 나에게 축복받은 땅(?)에서 태어난 의식도 없는 놈,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해가는 놈이라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혹 만났다면 그는 속 넓은 사람이라서 아주 반갑게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교시절 전남 보성과 광주 출신의 친구들과 친했던 것처럼.

뒤늦게야 철이 든 내가 김남주의 참 맛을 알고 그를 우러러 보게 될 때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2000년 5월 광주 비엔날레 공원에 그의 시비가 제막되던 날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가서 거룩한 영혼 앞에 고개 숙였다.

몇 해 전부터 김남주 시인의 오랜 동지요, 부인인 박광숙 선생님이 강화도에 산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벼르다가 이번 중간고사 기간에 찾아뵙기로 전화로 탐방 의사를 전했다. 박 선생님은 취재 탐방은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간곡한 청을 끝내 거절할 수 없었던지 마침 당신 학교도 중간고사 기간이기에 같은 교사로서 만남은 좋다면서 강화에서 ‘구름에 달 가듯이’ 가을볕이나 쐬는 조건으로, 고맙게도 내 제의를 수락해 줬다.

약속날인 2003년 10월 13일 월요일 날, 나는 약속한 바와는 달리 김남주에 관한 몇 권의 책과 답사 여행길잡이 책, 녹음기, 수동 카메라, 디지털 카메라 등 예사 답사 때처럼 준비물과 자료를 취재 가방에 잔뜩 꾸려 출근했다.

외세와 맞섰던 초지진의 홍이포, 사정거리 700미터로 조선 영조 때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외세와 맞섰던 초지진의 홍이포, 사정거리 700미터로 조선 영조 때 주조하여 사용하였다. ⓒ 박도
학교에서 한 시간의 시험 감독과 채점을 끝내고 강화로 가고자 오전 11시 30분에 나섰다. 신촌 버스터미널로 가는 길에 홍익서점에 들러 최근에 나온 김남주 시집을 부탁했더니 판매원 아가씨가 창비에서 나온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을 서가에서 뽑아주었다.

버스에 오른 후 시집을 펼쳤다. 주로 유고 시들로 내가 보지 못했던 시가 많았다. 시집 끝에 ‘엮고 나서’라는 제목으로 박광숙 선생님의 글이 있었다.

그가 나를 버리고 떠나갔던 것처럼 나도 그를 버리기 위해, 떠나기 위해 정리하고 또 정리한다. 물건을 버리고 집을 떠나고 추억을 태워버린다. 그리고 죽음도 생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집착을 떠나는 훈련을 한다.

한 시대가 그의 곁을 떠나갔을 때 고뇌하며 뒹굴던 영혼으로부터 육신을 분리해내기 위해 죽음을 안겨주었듯이 나도, 토일(김남주 시인 아들)이도 이제 그의 떠남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의 부재를 인정해야 한다.

김남주(金南柱) 약력

1946년 전남 해남 출생. 전남대 영문학과 수학.
1972년 반유신 투쟁으로 투옥.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제1심에서 징역 10년 항소심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선고받고 8개월만에 석방. 이후 학교 제적.
1974년 고향 해남에서 농사지으며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잿더미> 등 7편의 시로 문단에 등단.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 대법원에서 징역 15년으로 확정, 광주교도소 수감.
1984년 첫시집 <진혼가> 출간
1986년 전주교도소 이감. 국제 PEN 대회에서 ‘김남주 시인 석방결의문’ 채택.
1987년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 출간.
1988년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출간.12월 21일,형 집행 정지로 출소.
1989년 광주 문빈정사에서 오랜 동지인 박광숙 씨와 결혼.시선집<사랑의 무기>간행.제4시집<솔직히 말하자> 간행
1991년 제5시집 <사상의 거처> 간행 제9회 신동엽 창작기금 받음.
1992년 제6시집 <이 좋은 세상에> 간행. 옥중 시선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2권 간행. 제6회 단재상 문학부문 수상.
1993년 ‘윤상원 문화상’ 수상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별세. / 정리- 박도 기자
김남주 <시인>

세상이 몽둥이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행복하다

세상이 법으로 다스려질 때
시인은 그래도 행복하다

세상이 법 없이도 다스려질 때
시인은 필요 없다

법이 없으면 시도 필요 없다

5·18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던 1980년 광주교도소에서 우유곽에서 은박지를 발견하던 순간의 희열, 못 도막을 갈고 갈아 펜으로 삼아 은박지에 꼭꼭 눌러 광주의 흘린 피를 새겨놓은 시편들. 감시의 눈초리가 사방팔방에서 번득이던 감옥 안에서 곱아드는 손을 녹이며 시를 새겨나가던 그의 모습. 그는 그 시절이 시인으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의 시 한 줄 한 줄은 명줄 한 올 한 올과 맞바꾼 것들이었다. 시편들을 새겨나가는 쓰라린 희열이 그의 몸을 들뜨게 할 적마다 육신 한복판에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고 있던 암세포들, 그래도 그는 그때가 가장 행복했노라고, 피가 졸아드는 두려움으로 시를 새기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노라고 했다.

시인이 아닌 평범한 남편과 토일이 아버지로 남아주기를 바랐던 나의 바람도 내팽개쳐버리고 그는 떠나가 버렸다.

법 없이도 다스려지는 세상이 돼서가 아니라 시를 쓸 수가 없어서, 시인이 필요 없는 세상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시가 쓸모없는 세상이 돼버려서 그는 떠났다.


나는 시집을 닫고 눈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강화행 시외버스는 그 새 강화대교를 건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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