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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벽두부터 사람들은 인간 이성의 마비를 목도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지난 20일(목) 또다시 바그다드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피해를 입는 것은 죄없는 민간인이다.
21세기 벽두부터 사람들은 인간 이성의 마비를 목도하게 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지난 20일(목) 또다시 바그다드로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피해를 입는 것은 죄없는 민간인이다. ⓒ 로이터 뉴시스
인간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무얼까? 너무도 한가한 나머지 하릴없이 그저 철지난 이야기를 읊조리는데 불과한 것인가? 혹은 현실에는 무관심한 이들이 방에 틀어박혀 그저 고답적이기만 한 문제에 파고드는 것일까? 아마도 인간이 역사의 갈피를 파고드는 이유는 가깝게는 현실의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마리를 얻고 멀게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줄이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 지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장장 8년 4개월간 연인원 32만 명을 사지로 내몰았던 베트남 파병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까? 베트남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한 숭고한 전쟁? 아니면 베트남 사람들을 악마의 구렁텅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전쟁?

앞뒤 사정을 살펴보건대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 베트남 공산화 저지라는‘대의’도 대의지만, 미국의 파병 요청에 대해 거부하기 힘들었고 또한 그 과정에서 얻을 경제적 이득을 더욱 크게 생각한 결과가 아닐까?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이번엔 바그다드로 간다?

베트남전은 끝났다. 월남 갔던 김 상사도 돌아온 지 오래다. 그러나 몇 해 전 베트남 파병과 그에 대한 사과 필요성을 제기한 모 언론사에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이 난입해 집기를 부수는 등 베트남 파병에 대한 평가다운 평가를 내려본 일이 없기에 이런 어이없는 오해가 빚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사회에서 북파 공작원은 물론‘베트남 파병’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제1이동외과병원을 필두로 진군가를 울리며 베트남 땅을 밟았던 국군은 5천여 명이 전사하고 1만여 명이 부상당한 끝에 베트남으로부터 철군했지만, 이후 이에 대한 적절한 평가를 내려본 경험이 없으니 거기서 무슨 교훈을 얻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베트남 중부 쭈을래 마을에 서있는 증오비. 과연 한국은 바그다드에도 증오비를 세울 작정인가!
베트남 중부 쭈을래 마을에 서있는 증오비. 과연 한국은 바그다드에도 증오비를 세울 작정인가! ⓒ 이시우
그런데 베트남전의 악몽이 채 치유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시금 국군의 이라크 파병 문제로 조야가 시끄럽다. 물론 이전에도 동티모르나 서사하라 등지에 국군을 파병한 적은 있지만 대부분 인도적 지원이나 전후 감시를 위한 의무병과나 옵서버(Observer) 등이어서 지금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번에도 정부는 파병 이유로 ‘국익’을 내세우고 있는데 과연 그 국익이라는 것이 무얼 말하는 것인 지부터가 분명치 않기에 더욱 납득하기 힘들다.

이라크 민중 해방이라는 거룩한 사명?

특히 이번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은 명분부터가 옹색하기 그지없다. 처음에는 미국이 9.11 테러의 배후로 지목한 알 카에다를 이라크가 지원하고 있다고 주장하다가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자 대량살상무기 보유설을 퍼뜨렸지만, 이 역시 UN 무기사찰단은 그 어떤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후 미국은 사찰 기한을 연장하자는 국제 여론을 무시한 채 이라크 민중 해방론을 들고 나왔고 후세인과 아들들이 제3국으로 망명하면 침공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 직전에는 말을 바꾸어 후세인과 그의 아들들이 해외로 망명을 하던 하지 않던 간에 이라크 민중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라크로 진입할 수밖에 없고, 이후 UN은 배제한 채 군정을 실시하겠다는 태세다.

대체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유린하고 폴 포트가 캄보디아를 피로 물들일 때는 어디서 무얼 하다가 왜 이제 와서 다른 나라의 민중을 해방시킨다며 미사일 폭우를 퍼붓는 것인가. 석유라는 검은 황금과 중동의 전략적 요충을 확보함으로써 국제정치적 패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그야말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데도 능청스럽게 이라크 민중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민주공화국을 표방한다는 대한민국이 이런 전쟁에 참여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과’에 준한다고 평가받는 발언과 함께 국군이 주둔했던 베트남 중부의 꽝아이와 꽝남, 빈딘, 푸옌, 카인호아 등 5개 성(省)에 모두 40개의 초등학교 건물을 지어주기로 해, 역사의 아픈 상흔을 도려내고자 하는 걸음을 내딛은 경험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렇게 나중에 반성할 것이라면 애당초 반성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순리라는 것은 초등학생도 알지 않을까?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방현석은 여러 차례에 걸쳐 여행한 베트남을 2백 몇 십 쪽의 책으로 엮어냈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방현석은 여러 차례에 걸쳐 여행한 베트남을 2백 몇 십 쪽의 책으로 엮어냈다. ⓒ 오마이뉴스
물론 파병론자들은 “이번에 파병하려는 병력은 공병과 의무병”이라면서 중동의 평화 정착과 원유의 안정적인 수입, 북핵문제를 포함한 한미공조를 위한 것이라고들 주장한다. 그러나 금번의 이라크 침공은 정당한 자기 방어도 아닐 뿐더러 유엔 헌장 제7장에 근거해 안보리가 승인하는 공격도 아니다. 이처럼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침략 전쟁을 부인한다”는 우리 헌법 제5조 1항에도 위배된다는 사실은 논외로 치더라도 공병이 닦고 놓는 도로와 다리는 결국 침략군을 이롭게 할뿐이며, 심지어는 미국이 한국에 전쟁포로와 정치범 관리 등을 위한 추가 병력 파병을 요청했다는 보도마저 나오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국군이 그저 ‘평화 유지’에만 국한되기는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파병론자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한국이 얻을 경제적 이득도 불확실하기만 하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이용하려는 태도 자체가 경악할 만한 일이지만, 미군과 영국군 수십만이 싸우고 있는 실정에 고작 6백여 명을 파병해 얻을 실리가 얼마나 크기에 13억 이슬람을 배척하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근본적으로는 추후 미국이 북한의 대량살상무기와 핵을 제거하고 북한인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과연 무슨 말로 설득할 것인가!

‘남쥬띤’은 정녕 용서받은 것일까?

역사는 그저 한가한 이들의 지적 욕구나 채워주자고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게다. 한참 늦었지만 베트남전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대표를 맡고 있는 방현석은 수차례 베트남을 여행한 뒤 지난해 10월 <하노이에 별이 뜨다>라는 시적인 제목으로 책을 한 권 냈다. 여느 동남아 여행기처럼 그럴듯한 해변이나 산해진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니 애초에 그것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책을 들추는 수고를 하지 말지어다.

방현석은 베트남 전역에 널려 있는 베트남전 관련 유적들을 돌아보고 한없는 절망과 젊은이들로부터 돋아나는 희망을 적어나가고 있다. 특히 기나긴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을 직접 인터뷰함으로써 생생한 감동을 전달하고 있는 이 책은, 지난 세월 베트남전 파병과 그에 따른 결과에서 나아가 이번의 이라크 파병 논란을 바라보는 데에도 이해의 씨줄과 날줄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방현석 / 하노이에 별이 뜨다 / 해냄 / 2002 / 10,000원
방현석 / 하노이에 별이 뜨다 / 해냄 / 2002 / 10,000원 ⓒ 해냄
방현석에 따르면 베트남 중부 ‘쭈을래’라는 마을에는 증오비가 한 기 서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특히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세력이 강했던 곳으로, 시멘트로 만들어진 증오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반뚱 전투에서 대패하고 한계를 절감한 미국은 용병인 남쥬띤(한국- 기자 주) 군인들을 들여왔다. 흉포한 남쥬띤 군인들은 수천 명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비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66년 12월 5일 남쥬띤 군대가 서른여섯 명의 주민을 이 자리에 있던 구덩이에 몰아넣고 몰살시켰다. 이 구덩이는 1965년 8월 미군 전투기가 투하한 폭탄에 의해서 생겼다.”

지난 20일(목) 새벽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이 개시되자마자 이튿날 대한민국 임시국무회의는 공병과 의무 부대 파견을 결의했다. 물론 25일(화) 국민들의 반전(反戰) 구호 속에 이라크에 대한 국군 파병동의안 처리가 연기되기는 했지만,

‘남쥬띤’ 국회는 오는 28일(금) 이를 처리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야말로 일사천리 파죽지세다. 정녕 우리는 베트남전 파병에서 그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 것일까. 증오비는 하나면 족하다. 과연 ‘남쥬띤’은 바그다드에 또 하나의 증오비를 세울 작정인지. 우울한 봄이다.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


하노이에 별이 뜨다 - 소설가 방현석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여행

방현석 지음, 해냄(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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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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