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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푸징 거리의 인력거 조각에서 사진을 찍는 중국사람
왕푸징 거리의 인력거 조각에서 사진을 찍는 중국사람 ⓒ 김남희
북경에 온 지 벌써 일 주일. 시간이 넉넉할 때면 늘 하던 버릇대로 또 꼼짝 않고 숙소 주변만을 탐색하며 한 주를 보냈다. 아무래도 발 빠르고 부지런한 여행은 내 천성이 아닌 것 같다. 이제 슬슬 본업에 충실해야겠다싶어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나가본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바지 밑에 타이즈를 껴입고, 위에는 가져온 모든 긴 팔 옷을 다 입었는데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든다.

우선 숙소 앞에서 시내로 나가는 420번 버스를 탄다. 북경의 버스는 기본요금 1원부터 시작해서 거리가 멀어질수록 5전씩 올라간다. 대부분의 버스에는 안내양이나 안내군이 있다. 혹시라도 건망증 때문에 표를 못 사는 일이 없도록 "표 사세요"를 끊임없이 외쳐주고, 정거장 안내도 하고, 문 닫고 여는 신호를 운전사에게 보낸다.

내가 탄 버스의 어떤 안내양은 "표 사요, 표! 표 없으면 못 내려요"라고 쉬지 않고 살벌한 표정으로 외치는 투철한 직업 정신을 발휘하기도 했다. 나 같은 외국인도 안내양을 통해 내릴 곳과 갈아탈 버스노선까지 친절히 안내를 받을 수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해 북경을 다니는 데 불편함이 별로 없다.

버스는 북경의 명동이라는 왕푸징 입구에서 정차한다. 왕푸징 거리는 가족과 함께 구경 나온 중국사람들로 붐빈다. 젊은이들이나 노인들이나 예외 없이 거리의 조각품 앞이나 백화점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바쁘고, 아이들 손에는 거의 오성기나 거리에서 파는 작은 장난감 등이 들려 있다.

백화점 안에도 물건을 사러 온 사람보다는 구경 나온 사람이 훨씬 많다. 중국 백화점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그 층을 돌아보지 않고는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없게끔 되어있다. 즉 층마다 내려서 매장 안을 한바퀴 돌아야만 다음 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탈 수 있게끔 만들어놓았다. 역시 비단장수 왕서방의 나라!

왕푸징 거리의 조각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중국청년
왕푸징 거리의 조각상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중국청년 ⓒ 김남희
왕푸징을 둘러보고 천안문광장으로 걸어간다. 대로변에는 휴지 한 조각 떨어져 있지 않은데도 거리에는 청소를 하고 있는 미화원이 자주 보인다. 중국에 온 후 가장 많이 마주친 직업이 환경미화원인 것 같다. 보타산이나 황산을 올랐을 때도 그렇고, 대도시의 역이나 시내 같은 번잡한 장소는 물론, 심지어 고속도로를 쓸고 있는 미화원도 봤으니.

4년 전 티벳에 가기 위해 중국에 왔을 때보다는 정말 도시가 깨끗해졌다. 2008년 북경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이후 북경에서는 휴지 안 버리기, 가래침 안 뱉기, 화장실 깨끗하게 사용하기 등 대대적인 운동을 벌인다더니 정말 북경에 오니 가래침 뱉는 사람을 아직 한 번도 못 봤다.

깨끗한 거리와 성숙한 시민의식에 감탄을 거듭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천안문 광장. 혁명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전시회를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 20원을 주고 입장표를 산다. 중국에는 모두 28개의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있는데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수라고 한다. 각각 28개의 관을 만들어 그 모형까지 만들어놓은 전시회를 둘러보려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잘 아는 자금성과 이화원, 만리장성, 진시황 병마용을 비롯해 태산과 황산, 사천성의 구체구와 황룡, 라사의 포탈라궁과 공자의 생가, 운남성의 여강고성, 아미산, 소주의 중국정원과 우이산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다. '중국을 여행하는 동안 이 스물 여덟 개의 문화유산만은 꼭 다 보리라' 엄숙한 다짐이 절로 든다.

이곳 외에도 중국 정부가 유네스코에 제출한 션양을 비롯한 4군데 유적지가 최종후보지로 받아들여져 올 7월의 유네스코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한자도 잘 못 읽는 처지라 중국인들에게 물어가며 28개 문화유산의 이름과 위치를 일일이 노트에 적고 나오니 입구에 안내책자를 팔고 있다. 5원을 주고 안내책자를 구입. 전시회를 보고 나오니 벌써 하루해가 저물고 있다.

천안문 광장에는 국기 하강식을 보기 위해 중국사람들이 그야말로 벌떼처럼 새까맣게 몰려 있다. 사람의 물결에 벌써 질려버린 나는 하강식은 포기하고 돌아선다. 체력이 달려서 더는 못 다니겠다. 집으로 가야지.

감기가 점점 심해져서 호흡곤란의 지경까지 이르러 결국 약방에 갔다. 원래 집에서는 웬만큼 아파도 절대 병원에 가거나 약을 지어먹지 않는 나다. 병원에 가기를 권유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난 내 몸의 자연 치유력을 믿어"라고 그럴 듯하게 주장하지만 사실은 몸에 밴 게으름 탓이다.

북경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왕푸징 대로의 모습
북경의 명동이라고 할 수 있는 왕푸징 대로의 모습 ⓒ 김남희
왕푸징의 초대형쇼핑몰 동방신천지 건물의 양 장식. 붉은 색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양에게도 붉은 색 옷을 입혀놓은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왕푸징의 초대형쇼핑몰 동방신천지 건물의 양 장식. 붉은 색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은 양에게도 붉은 색 옷을 입혀놓은 모습이 많이 눈에 띈다. ⓒ 김남희
그런 내가 여행을 다닐 때면 돌변한다. 늘 혼자 다니는 처지에 몸이 아프면 마음까지 따라 앓아 눕는 바람에 약해지는 감당하기가 더 버거워진다. 그래서 조금만 아파도 겁이 덜컥 나고, 좀 버티다가 안 될 것 같으면 혼자서 병원이나 약국을 찾아간다.

몇 년 전 티벳을 여행할 때 지독한 감기에 걸린 일이 있다. 중국말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혼자 용감하게 한약방에 들어가 그야말로 '바디 랭귀지'만으로 증상을 훌륭히 설명하고, 돋보기를 쓴 늙은 할아버님이 조제해주는 감기약을 먹었던 적도 있다.

또 인도에서는 머리 속에 뾰족한 유리조각이 굴러다니는 것만 같은 끔찍한 두통이 며칠 동안 계속돼 병원을 찾은 일이 있다. 없던 병도 달고 나올 것만 같던 그 동네병원의 불결하고 열악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결국, 오늘도 버스정거장 옆의 '왕징당 약국'을 찾는다. 약국은 제법 크고 약사도 여러 명이다. 순하고 인내심 있어 보이는 얼굴의 약사를 찾아 "약 사러 왔는데요"라고 하자 반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여기서부터 이제 나의 'Survival Chinese'를 쓸 순서다.

"감기가 걸렸어요." 기억나는 단어들을 총동원해본다. "목은 안 아프고, 열도 없어요."

그 다음 가장 중요한 '콧물이 줄줄 흐르고 숨쉬기가 곤란하다'는 표현을 해야 하는데 여기서 막힌다. 잠시 당황하다가 결국 코를 가리키고 콧물을 훌쩍이는 흉내를 내고, 헉헉거리며 호흡곤란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구현하자 약사가 알아들었는지 빙그레 웃는다.

하지만 결국 내주는 약은 제조약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콘택' 시리즈가 아닌가. 하긴 '영원한 불치병'이라는 감기에 무슨 별다른 약이 있겠는가. 결국 약값 13원을 치르고 나온다. 다음부터는 꼭 사전을 지니고 다녀야지 결심하며.

천안문 광장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로 모택동 사진과 구호들이 보인다.
천안문 광장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뒤로 모택동 사진과 구호들이 보인다. ⓒ 김남희
오늘은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금성을 둘러보는 날이다. 천안문 앞에는 모택동의 대형 얼굴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좌우로는 사회주의 국가다운 구호들이 붉은 글씨로 적혀 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 이 실험을 지켜보는 세계의 눈이 천안문으로 집중되어 왔다.

중국 사람들은 모택동의 행적을 40%의 실적과 60%의 공적으로 평가한다고 한다. 내 눈에는 모택동 사진과 구호가 어색하기만 한데 중국 사람들은 그 앞에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다.

자금성의 웅장함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전문 앞에서부터 걸으라기에 전문에서 천안문에 이르는 800미터의 광장을 걸어 천안문을 지나니 단문과 오문이 계속 나온다. 이들 중앙대문은 황제의 공식행차, 즉 천단에 제사를 드리러 가거나 개선하는 군대를 마중 나가는 경우에만 열렸다고 한다. 평상시에 궁전을 출입하는 신하들은 양옆의 서화문과 동화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궁정을 출입하던 고관대작들도 이용하지 못했던 문들을 지나 태화문을 넘으니 태화전이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하늘과 황금색 궁의 지붕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중국에서 황금색은 황제의 색깔이라고 한다. 궁의 지붕 곡선들은 높이 치솟기보다는 수평으로 길게 펴져 있어 보는 이를 위협하지 않는다. 요란하게 용마루가 치솟아 있거나 화려한 장식들을 달고 있지 않아 오히려 장중함이 느껴진다.

태화전 앞에는 장수를 상징하는 청동 학과 청동 거북 한 쌍이 놓여 있다. 태화전은 황제가 즉위식이나 생일이나 신년하례를 행할 때 신하들의 알현을 받는 장소이다. 조선의 사신들도 태화전 마당에 들어와 황제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갖추었다고 한다. 태화전 옥좌 앞에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도무지 고개를 들이밀 수가 없다.

자금성 안으로 들어서면 이렇게 명시대나 청시대의 의상과 무대를 갖추어놓고 사진을 찍는 곳이 몇 곳 있다. 물론 사진 찍는 비용은 따로 내야 한다.
자금성 안으로 들어서면 이렇게 명시대나 청시대의 의상과 무대를 갖추어놓고 사진을 찍는 곳이 몇 곳 있다. 물론 사진 찍는 비용은 따로 내야 한다. ⓒ 김남희
태화전 옆뜰에서 보이는 중화전과 보화전
태화전 옆뜰에서 보이는 중화전과 보화전 ⓒ 김남희
여기저기서 한국말도 들려온다. 임어당이 자금성을 보고 처음 받았던 느낌이라는 '고요함'은 간 데 없다. 옥좌를 볼 수 없어 결국 천장으로 눈을 돌려본다. 태화전의 천장은 중국의 전통적인 천장 장식으로 녹색과 금색의 정방형 문양 안에 용을 반복해서 그려놓았다.

태화전을 지나니 중화전이다. 중화전은 일종의 휴식처로 황제가 태화전으로 행차할 때 여기서 잠시 쉬어가곤 했다고 한다. 중화전은 바로 보화전으로 이어진다. 주로 전시, 즉 과거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은 학자를 접견하는 곳이다. 평소 황제가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은 보화전 뒤의 건청궁으로 황제, 황후, 비빈 그리고 여러 황자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건청궁의 어좌 위에는 '정대광명'이라는 큰 글씨를 쓴 편액이 결려 있다. 청나라 황실의 제위를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자, 옹정제는 황위계승자의 이름을 적어 이 편액 뒤에 넣어두고 자신의 사후에 열어 보게 하는 전통을 세웠다고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대신 잃어야 했을 저 자유, 이 큰 궁전을 마음대로 둘러볼 수도 없는 고독한 처지를 황제들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혹시라도 운이 나빠 내가 조선 왕실의 여자로 태어났다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묵묵히 순종하며 살기에는 성질이 드세 아마도 거친 운명을 감수했어야 하리. 정말이지 내가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내 삶을 내 마음대로 할 자유의지 하나인데. 천하를 호령한다 해도 자신의 몸과 마음 하나 뜻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이런 말을 하니 한 친구는 "네가 아직 권력의 달콤한 맛을 못 봐서 그래"라고 비웃던데.

건청궁은 또 교태전과 곤녕궁을 지나 어화원으로 이어진다.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다. 자금성을 보고 온 많은 한국사람들이 "경복궁은 자금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그 크기에 관해 부끄러운 듯이 말하는 것을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각자 자신의 역할과 크기에 맞게 궁을 지은 것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천하를 호령했던 대국은 대국답게, 해마다 조공을 바치는 약소국인 조선은 조선답게.

경산공원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경산공원에서 바라보는 자금성. ⓒ 김남희
궁궐의 크기 따위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 내가 정말 부러운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북경을 돌아다니다 보니 자금성과 천안문 주변뿐 아니라 시내 모든 건물의 높이가 철저하게 규제되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 건물도 주변의 조화를 깨뜨리며 홀로 치솟은 건물은 없다. 화교가 지었다는 왕푸징 거리의 동방신천지 쇼핑몰을 보자. 초고층건물로 백화점을 짓고자 했으나 결국 허가가 나지 않아 주변의 10여 개 건물을 하나의 쇼핑몰로 이어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예처럼 북경 시내의 건물은 높이가 철저히 규제된다.

북경 외곽으로 나가야 고층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북경 시내를 다니다보면 비록 순환도로 건설로 많은 성벽과 대문들이 파괴되었거나 그 흔적만 남아 있다 해도 고도로서의 아름다움은 쉽게 찾아진다. 덕수궁과 경복궁 주변으로 고층빌딩들이 즐비하게 솟고, 급기야는 궁터에 남의 나라 공관 직원용 숙소를 허용하려하는 우리나라와 비교되지 않을 수 없다.

자금성을 나오면 길을 건너 바로 경산공원이 이어진다. 자금성의 신무문 북쪽에 있는 이 산은 명 초기 자금성의 해자를 파내고 생긴 흙으로 만든 인공산이다. 낮은 언덕을 따라 5개의 아름다운 정자가 배치되어 있다. 공원 곳곳에는 산책 나온 베이징 시민들이 느긋하게 걷고 있다.

태화전 전장의 장식.
태화전 전장의 장식. ⓒ 김남희
경산에는 이 정자들보다 더 유명한 한 그루 나무가 있다. 명대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1643년 목을 매어 자살한 쥐엄나무이다. 리쯔청(우리는 역사시간에 이자성의 난이라고 배웠다)의 농민군에게 자금성이 포위되었을 때의 일이다. 황제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아침 조회를 알리는 종을 쳤건만, 아무도 조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황청안이라는 충성스러운 환관을 대동하고 메이산 공원에 들어간 숭정제는 성안을 쓸쓸히 응시하다가 긴 소매자락 끝에 유언을 남겼다. "짐은 나약하고 덕망이 부족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샀도다. 폭도들이 짐의 수도를 점령했건만 신하들은 모두 짐을 기만하였다. 짐이 죽어서도 조상들을 뵐 낯이 없어 스스로 관면을 벗고 머리카락을 풀어 헤쳐 얼굴을 가리노라. 폭도들은 내 몸을 갈가리 찢어도 좋으나, 백성은 한 사람도 해치지 말라"고 하고 목을 매고 자결하니 환관도 따라 죽었다고 한다. 이 나무는 문화혁명 기간에 홍위병에 의해 베어져 나가고 지금은 새로 심은 나무 아래 작은 현판만이 걸려 있다.

높이 45.7미터라는 경산공원에 올라 북경을 내려다보니 북해공원과 자금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해질녘에 보는 자금성과 북경 시내의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다던데 아직 해가 지기까지는 남은 시간이 만만찮다. 지금 자금성은 그저 흐릿한 윤곽만 보일 뿐이다.

건청궁 지붕 장식(왼쪽) / 경산공원에서 바라보는 북해공원과 백탑.
건청궁 지붕 장식(왼쪽) / 경산공원에서 바라보는 북해공원과 백탑. ⓒ 김남희
경산공원을 나와 서문에서 5번 버스를 타고 전문 앞에 내려 다시 120번 버스로 갈아타고 천단공원으로 간다.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다는 건물로 임어당이 중국의 건축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묘사한 곳이다. 천단의 기년전은 높은 3층 기단의 27계단 위에 세워진 원통형 건물로 지붕은 삼층처마가 있는 원추형이다. 그 형식이 완벽한 비율로 이루어져 있고 색채 또한 환상적이어서 중국의 모든 종교 건축 중 가장 뛰어난 대표작이라고 한다.

내게는 천단의 아름다움이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마도 천단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 긴 줄에 떠밀려 올라갔다가 흘깃 눈길만 주고 떠밀려 내려와야 하는 번잡한 환경이 건물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지를 주지 못하는 것 같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일은 중국 고대에 가장 위엄 있는 의식으로 오로지 황제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제천의식이 그토록 위엄 있고 신성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황제가 무릎을 꿇을 때라고는 오직 이때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황제는 평상시에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앉아 절을 받지만 제천의식 때만은 북쪽을 향해 정례를 올린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하는 대표적 예가 바로 황제가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는 동지사와 하지사에 맞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년전을 내려오면 원형 담장을 만나게 되는데, 이 둥근 담벽을 회음벽이라 부른다. 말소리를 멀리 반사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담벽에 대고 서로 말을 하고 들리는지를 확인하는 중국 사람들의 외침으로 시끌벅적하다. 나도 해보고 싶은데... 이럴 때는 동행이 아쉽다.

천단의 회음벽. 소리를 반사시킨다는 이 벽 앞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서로 들리는지를 묻고 답하는 소리로 시끄럽다.(왼쪽) / 천단 기년전의 모습.
천단의 회음벽. 소리를 반사시킨다는 이 벽 앞에는 많은 중국인들이 서로 들리는지를 묻고 답하는 소리로 시끄럽다.(왼쪽) / 천단 기년전의 모습. ⓒ 김남희

덧붙이는 글 | 북경여행기는 1편과 2편으로 나눠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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