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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 민박집의 침실 모습
한국성 민박집의 침실 모습 ⓒ 김남희
아주머니의 이름은 백00. 올해 나이 쉰넷. 고향은 중국 흑룡강성의 목단강. 해방 무렵 함경북도에서 건너온 가난한 집안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 시대 흔히 그러했던 것처럼 아주머니 역시 가난 때문에 학업이 늦어졌고, 그나마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터진 문화혁명으로 인해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리고 스물 한 살이 되던 해, 흑룡강으로 휴가를 나온 군인을 소개로 만나 연변으로 시집을 갔다.

"내 시집갈 때 뭣도 모르고 갔지. 그때 우리 집이 하도 곤란해서 한 입이라도 덜어야 할 형편이었거든."

시집이라고 와보니 시집 역시 가난한 살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식구까지 많아 거두어야 할 입은 시부모님과 시조부모님, 다섯의 시동생들과 삼촌까지 열 둘이나 되었다. 밥상을 차리면 시조부님은 안방에서, 시부모님은 정지간에서, 아낙들은 부뚜막 옆에서 밥을 먹던 시절. 어른들 밥상 수발하랴, 어린 것들 밥 먹이랴, 밥 숟가락 한 번 편하게 뜰 수 없는 고된 시집살이였다. 맏며느리로써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아 키우는 동안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을 했지만, 가난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어머니마저 중풍에 걸려 앓아 눕는 일이 생기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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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이라는 게 들기는 헐해도 한번 들면 떼기는 오죽 바빠?(힘들어?) 내 시어머니 똥, 오줌을 3년 내리 받아냈지."

결국 늘어만 가는 빚을 감당 못해 아주머니는 북한으로, 베트남으로, 소련으로 돈을 벌러 나가야 했다. 중국에서 양말이며 옷가지, 선풍기 따위를 떼어다가 팔아 번 돈을 연변으로 부치며 가족과 떨어져 지낸 지 몇 년. 아주머니는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일들을 연이어 겪는다. 장가도 안 간 이십 대의 큰아들이 사고로 죽고, 시어머니마저 돌아가신 데 이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것이다.

"내가 썩어지게 고생하면서 살림을 꾸렸는데 이 인간이 바람을 피우다니…. 배신감을 참을 수가 없었지. 자식까지 먼저 보낸 모진 년이 뭘 더 못하랴 싶어 내 이혼했어. 내 인생을 돌아보니 단 한 순간도 나를 위해 산 적이 없는 거야. 이제 내가 못 먹고 없이 살아도 마음이나 한번 편하게 살자 싶어서 헤어졌지."

남편과 헤어진 후에도 아주머니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북경으로 건너온 지 이제 2년. 북경으로 파견 나온 한국인 가정에서의 보모 일을 거쳐 지난 12월, 매달 5000원(한화 75만원)의 월세를 내며 시작한 민박집은 아직 적자이다. 세 개의 방에 손님이 다 차지 않아도 아주머니는 항상 마루의 소파에서 주무신다.

"하나도 안 불편해. 내 이집 들어오고 나서 내리 여기서 잤는 걸. 손님이라도 있는 날에는 너무 기분이 좋지. 손님들하고 얘기도 하고, 밥상 차리고 하다보면 하루가 금세 지나가거든. 내가 원래 노는 걸 좋아해. 근데 여기 와서는 놀러 갈 데도 없고, 남편한테 배신당한 년이 뭐 좋다고 놀러 다니나 싶기도 하고, 또 전화도 받아야 하니까 꼼짝 못하지."

욕실 전경
욕실 전경 ⓒ 김남희
손님이 없는 날 아주머니는 하루 종일 TV 앞에 앉아 있다. "내 어떤 날은 아침에 주저앉아서 저녁에 일어나는 날도 있어. 점심도 안 먹고 내도록 텔레비전만 들다보고 있는 거야. 나를 배신한 남편과 헤어지면 마음이나 편할까 했는데, 너무 외롭고 고독해. 텔레비전 보면서 가만히 내 지난날을 훑어볼 때가 있어. 엊그제 시집 온 것 같은데 그새 오십을 넘기고 남편한테 배신당하고, 아들 먼저 보내고…. 팔자도 뭔 이런 팔자가 있나 싶어.

요즘 중국 텔레비전에서는 남녀가 사랑하고 이런 거 보여주는데,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거 일절 없었어. 그거 가만 보다보면 내 좋다하는 남자들을 다 뿌리치고 연변까지 시집와서 내 인생에 남은 게 뭔가 싶어. 그래도 내 그냥 멍청하니 텔레비전 보는 건 아니야. 못 배웠기 때문에 소리를 들으면서 글자라도 하나씩 익히려고 애써 들여다보지.(중국 TV에서는 대부분의 프로에 한자자막이 나온다) 내가 말은 곧잘 해도 글자는 마이 못 배워서 턱 들이대면 가물가물 하는 게 많거든. 사람이 성공하려면 글을 알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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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남편한테 내가 '그 여자하고 살아라'하고 물러앉으니까 그 여자도 도망갔어. 지금 우리 딸애가 고생하고 있지. 딸네 집에 있거든. 그 인간은 돈도 벌줄 몰라. 암것도 안하고 있으면서 딸이 어째 어째 돈 좀 벌어서 주면 그걸로 살지."

"주변에서는 다 회복하라고 하지. 나이 들어 자식도 서방 가면 혼자 어째 살겠냐고. 내, '일 없어요' 그래. 참 사람이라는 게 남의 일은 이해가 되고 쉽게 말이 나도, 막상 내한테 이런 일이 생기니까 이해도 안 되고 용서가 안 돼. 우리 아들도 처음엔 얼마나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구. 미우니 고우니 해도 지 아비잖아. 내 그래서 어느 날 술 몇 잔 마시고 아들을 불러 앉혔지. 내가 어찌 살아왔는지 앉혀놓고 다 들려줬어. 엄마가 이렇게 평생을 살았는데 이제라도 맘 편하게 살아야겠다. 그러니 자꾸 회복하라는 소리 마라. 니 자꾸 그러면 아들 없는 걸로 치고 혼자 살겠다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그러더라구. 어머니, 더 이상 회복하라는 말씀 안 드리겠으니 마음 편하게 잡숫고 저랑 살아요. 우리 아들이 마음이 고와. 하루에도 회사에서 서너 번은 전화해서 어머니 지금 뭐하고 있어요? 손님 있어요? 물어. 지금은 이렇게 해도, 모르지. 서방 가면 어떻게 변할지. 어떤 새끼가 들어오느냐에 달렸지 뭐. 그래도 나는 지들이 좋다하면 내가 반죽 맞춰 주면서 살 거야. 말이라도 저렇게 하니까 고맙지 뭐. 우리 아들이 올해 서른인데 지금은 여자 없어. 전에 조선족 여자랑 약혼했었는데, 그 여자가 돈 벌러 한국 나가더니 딴 남자랑 결혼했대."

민박집 거실 전경
민박집 거실 전경 ⓒ 김남희
"전에 어떤 손님이 와서 내한테 '혼자세요' 묻더라구. 남편은 죽었다고 그랬어. 그랬더니 얼른 새서방 얻으라는 거야. '일 없어요' 하니까 즈그 어머이 얘기를 하는 거야. 지 어머이가 서른 여덟에 그 아들을 혼자서 낳고 평생을 혼자 키웠대. 그러다 예순이 훌쩍 넘어서 새서방을 만났다는 거야. 아들한테 그러더래. 내가 둘이 사는 게 이렇게 알뜰하고 좋은지 알았으면 진작에 새서방 얻었을텐데…. 왜 일찍 안 얻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래 고독해도 내 혼자 맘 편하게 있다 가고 싶어."

저녁 밥상머리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상을 물리지도 못한 채 길게 이어졌다.

"설도 오고 해서 일전에 시아버지한테 전화 쳤지. 이제 앉아 있을 날이 얼마나 되겠어? 내가 남편하고는 돌아섰어도 30년을 모신 시아버진데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른 척 할 수 있어? 아버님, 그저 옛 며느리라 생각하시고 가끔 전화나 치면 기쁘게 받아주세요 했더니 그런 소리를 말이라고 하냐, 여긴 모두 잘 있으니 그저 네 몸이나 편하게 단속해라 그러시더라고. 노인네한테 못 볼 꼴 보여드렸지."

"내 아 때 그래 못 먹고 곤란해서 고생을 하더니 아 때 고생한 사람은 나이 들어서도 고생이더라구. 내 동무들 보면 아 때 그래저래 살던 아들은 나중에 시집가서도 다들 잘 살어. 근데 날 보라우. 그래 내 우리 딸한테는 일부러 집에 일도 하나도 안 시키면서 키웠어. 어찌하든 곱게 키워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안 되더라구. 지금 식당일 하며 사는데 희한하게도 못 살아. 그저 갸 잘 사는 것만 보면 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어. 자식 잘 되는 거 보고 죽어야 할텐데…. 나이가 올해 서른 넷이랬지? 그럼 개띠겠구만. 우리 큰 아들이 여기 있으면 올해 서른 넷이니까. 자네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야지. 그래도 자식은 하나 놔 놓고 죽어야지. 늘그막에 자식도 없으면 인생이 서러워서 어쩌나."

"설이라고 오는데 고향에 가봤자 아무도 없어. 그저 여기서 보내야지. 내가 보모할 때 알던 동생들이 그렇잖아도 전화 왔더라구. 언니, 설에 갈 데도 없이 우째 보낼래요? 우리가 놀러갈까요? 하길래 그래 너네도 외롭고 나도 외로우니 우리 외로운 사람들끼리 놀자 그랬지."

"고생만 한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려나 싶다가도 그래도 희망적으로 생각해. 사람이 희망이 있어야 살지. 안 그래? 내 인생도 필 날이 올까?"

"그럼요. 이 민박집이 잘 돼서 돈 많이 벌어서 편히 쉬실 날이 금방 올 거예요."

내 섣부른 위로가 전혀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북경에서 맞는 설.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명절을 보내는 이가 어찌 우리들뿐이겠는가. 나는 민박집 아주머니께 세배를 드리고 함께 떡국을 끓여먹고, 밤 12시가 되면 중국사람들처럼 만두도 해 먹고, 밤새 시끄럽게 터질 폭죽소리를 반주 삼아 새해를 맞게 될 것이다.

부디 고향 떠나 맞는 우리들의 설이 많이 춥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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