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동아(大東亞)인으로서 이 성전(聖戰)에 참가함은 대운(大運) 중의 대운임이 다시 의심 없다. (중략) 순정의 청년들아, 공론을 집어치우고 대운에 들어서서 신선하게 역사적 임무를 담착하여 보세나."(〈보람 있게 죽자〉를 통해 참전(參戰)을 독려하는 최남선)
한가롭기만 하던 서울 강북구 우이동 5-1번지에 요즘 들어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다름 아닌 친일 문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살았던 '소원(素園)'이, 결국 지난 10일(금) 서울시문화재 지정 대상에서 제외됨으로써 곧 철거될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원래 이 집은 최남선 일가의 소유였으나, 최남선의 아들인 최한웅 전 서울대 의대 교수가 지난 해 12월 28일 별세하면서 그의 자녀들이 두온종합건설(주)에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55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아왔다는 유모씨(우이동·60세)는 "이 자리에 70평형대 고급빌라가 들어설 예정이라, 올 설만 지나면 집을 비워줘야 한다"며 "여론이 시끄러워질까봐 서두르는 기색이 보인다"고 말했다. 바야흐로 철거 전야다.
친일 문인의 집, 보존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서울시 문화재위원회는 이 집을 서울시문화재 지정 대상에서 제외한 이유로 (1) 최남선이 41년부터 52년까지 이 집에 살면서 강연과 신문 논설을 통해 조선 청년들에게 참전(參戰)을 적극적으로 독려했던 장소이고, (2) 올해로 이 집이 지어진 지 65년(1939년 5월 29일 건설)째로 이미 원형이 훼손돼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광복회(光復會)와 최남선의 후손들도 굳이 보존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내용을 요지로 하는 진정서를 냈던 것으로 보도된 바 있다. 이에 서울시는 우이동 집은 철거하되, 최남선이 첫 자유시를 썼던 을지로2가 생가터나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삼각동 집터에 표지석을 세우는 계획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서울시의 이같은 결정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먼저 문화재 전문위원인 목원대 김정동 교수(건축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남선의 생가이자 인쇄소인 '신문관(新文館)'을 헐어버릴 때에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했다"며 "부끄러운 역사 현장은 오히려 보존해 후대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지 없애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또 기자가 우이동을 찾았을 때 집을 둘러보고 있던 회사원 이모(잠원동·31)씨는 "만약 최남선의 친일행적이 서울시문화재 지정에서 탈락된 이유라면 시인 이상의 집이나 동아일보 옛 사옥 등도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라며 서울시의 결정에 대한 실망감을 나타냈다.
한편 강북구는 최남선이 비록 친일의 전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최초의 신체시를 발표하는 등 근대 국문학을 개척했고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하는 등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보고, 지난 1995년부터 서울시에 문화재로 지정해 달라고 수차례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집은 헐려 사라지고, 친일 자료는 삭풍에 날리네!
그런데 사회의 관심이 '소원을 보존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집중돼있을 때 정작 다른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최남선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은 사람들의 관심 영역 밖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우이동을 찾은 지난 19일(일) 오후, 소원 마당에는 최남선 생존 당시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 신문이 봉인도 뜯겨지지 않은 채 마당에 널브러져 있었고, '수신인 최남선'이 적힌 우편물과 각종 서적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랑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는 여러 책자들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채 쓸쓸히 말년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앞서의 유씨는 "아직까지 이런 것 가져가는 사람은 없었다"며, 왜 이 자료들이 여기에 이렇게 흩뜨려져 있는지 묻는 기자를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정도였다.
이렇게 홀대받고 있는 것들 중에는 학도병으로 참전한 것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만주국(滿洲國)에서 최남선에게 보낸 편지뿐만 아니라, 강원도에 사는 윤수병(尹受炳)이라는 청년이 자신과 같은 청년들을 민족혼으로 일깨워달라고 보낸 편지, 최남선이 운영하던 동명사(東明社)의 업무 관련 편지 등 우편물들이 주를 이루었고, 수신인 자리에 또렷이 'Choy Nam Sun'이라고 쓰인 1920년 8월 28일자 'La Cause Commune'와 같은 해 8월 21일자 'La Croix Du Nord' 등 프랑스 신문들이 포장이 뜯기지도 않은 채 널브러져 있었다. 한편 흥미롭게도 '황실급황족어략계도(皇室及皇族御略系圖; 일본 황실의 가계도)'라는 사진첩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 사진첩에는 국민신문(國民新聞)에서 소화 5년, 즉 1930년에 발행한 것이라 적혀 있었다.
집은 헐려 사라지고, 편지는 삭풍에 날리네!
어찌되었든 유씨의 말대로 이 집은 설만 지나면 곧 헐릴 태세다. 채 열흘도 남지 않았다. 이미 집 주변에는 건설사에서 친 장막으로 밖에선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일반인들의 출입 자체를 완전 통제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유지이니 뭐라 변변히 항의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래, 안타깝지만 집은 헐린다 치자. 그러나 그 자료들은 보존을 해야 하지 않을까? 습기와 바람에 썩고 닳고닳은 종이 조각들이 사방에 흩어지면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하찮은 편지나 서류들이라 할지라도 아직 간단한 조사조차 거치지 않은 자료를 두고 '하찮다, 값지다' 하고 평가를 내릴 수는 없는 일, 일단 지금 분석할 실력이 부족하고 중요성이나 가치를 알 수 없다면 일단은 모아두고 수습해놓고 볼 일이다. 나중에 최남선의 행적을 뒷받침해 줄 자료를 찾지 못해 그에 대한 연구에서 미비한 점이 발견된다면, 그것처럼 황당한 일도 없으리라.
자, 전국의 국사학도와 국문학도들은 어서 빨리 서울 강북구 우이동 5-1번지를 찾아갈 일이다. 이제 열흘도 채 남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