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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자의 뒷모습

나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전방에서 복무했다. 그 무렵은 1.21 사태 직후라 군사 훈련을 몹시 고달프게 받았고, 부대 근무도 늘 긴장 속에서 보냈다.

이때 생포된 김신조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은 모래주머니를 차고 훈련받았고, 완전 군장을 하고서도 매 시간 10킬로미터 이상을 행군했다고 해서 우리 쪽의 훈련도 매우 강화되었다.

그래서 우리 초임 장교들은 광주 보병 학교에서 기초 교육을 받던 16주 동안 정강이에 늘 모래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그 후 실무 부대에 배치되고서도 매주 한 차례씩 완전 군장으로 20킬로미터 행군을 했다.

내가 근무했던 부대는 주 임무가 경계 근무로 주야간 간첩이나 무장 공비 예상 침투로를 지켰다. 특히 주간보다 야간 경계 근무에 더 신경을 곤두세웠는데, 그들이 주로 야간에 활동하고 이동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대는 주간에는 경계 근무자와 행정 요원을 제외하고는 간단한 교육 훈련과 낮잠으로 보냈고 저녁 식사 후 야간에는 대부분 부대 병력들이 야간 위장을 하고 간첩 및 무장 공비들의 주요 예상 침투로인 잠복 초소로 투입돼 밤을 꼬박 새우면서 매복 경계 근무를 했다.

▲ 청미래덩굴꽃
ⓒ 임소혁
어느 날, 나는 휴전선이 가까운 전방 어느 마을 들머리 고갯마루 초소에서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데 멀리서 불빛이 반짝거렸다. 그 불빛은 점차 고갯마루 초소를 향해 다가왔다.

그것은 마을 사람의 등불이었다. 그 무렵 전방 지대에서는 야간 통행 때는 반드시 등불이나 플래시를 들고 다니게 홍보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계 근무자로서 아무리 마을 사람이라도 경계를 게을리 할 수는 없다. 간첩이나 무장 공비가 불을 켜고 다닐 리야 없을 테지만, 만에 하나 역으로 허를 찔릴 수도, 또 상급 순찰자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초소에 가까이 다가온 분은 뜻밖에도 일흔은 넘겼을 듯한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 이 밤중에 어딜 가세요?”
“군인 양반들 수고가 많아. 그냥 여기까지 왔어. 문산에 간 자식 놈이 여태 오질 않아서.”
“네, 그러세요. 할아버지 밤길에 조심하세요.”
“고맙소. 이 길은 원체 발에 익은 길이라서.”

마침 나도 무료하던 터라 초소 밖으로 나와서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주로 마을의 내력과 한국전쟁 때의 얘기들이었다. 한 삼십여 분 지났을 무렵 반대편 고갯길에서 플래시 불빛이 번쩍하고 인기척이 들렸다.

“아비냐?”
꽤 떨어진 거리였건만 할아버지는 육감으로 당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렸다.
“네, 아버님. 주무시지 뭐 하러 나오셨어요.”
아들의 목소리가 눅눅한 밤공기를 타고 들려왔다.

곧장 아들이 잔걸음으로 성큼 다가왔다. 내 예상과는 달리 아들은 쉰은 넘은 듯했다.

“잠도 오질 않고 바람도 쐴 겸 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냐?”
“놀다가 보니까 차가 끊어져 그냥 쉬엄쉬엄 걸어 왔어요.”

그들 부자는 곧장 초소를 떠났다. 등불을 든 아버지가 앞서고 아들이 뒤따랐다.

“군인 양반들 수고하시오.”
“네, 살펴 가십시오.”

나는 다시 초소로 들어가서 총구를 통해 그 등불이 사라질 때까지 부자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벌써 삼십여 년 전의 일이건만 아직도 그 선연한 아버지의 등불이 내 뇌리에 아름답게 남아 있다.

▲ 양지꽃
ⓒ 임소혁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등불

내 어린 시절, 또래 친구 가운데에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 그들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돌아가셨지만, 어떤 친구는 자기 아버지가 그때까지도 일본이나 만주에 계신다고 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됐지만, 그런 아버지들은 거지반 자의나 타의로 공산정권에 부역했다가 보복이 두려워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월북했거나, 어디서 전사했을지도 알 수 없는 행방불명이 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얘기는 내놓고 할 수 없던 시절이라, 아버지를 찾는 아이에게 어른들은 네 아버지는 일본에 계신다, 또는 만주에 계신다고 둘러댔다.

그 무렵 사회 분위기로서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가담한 사람이라면 인간 백정이나 머리에 뿔이 달린 흡혈귀로 여겨졌으니 어린아이에게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외가의 어떤 분은 한국전쟁 무렵 처음은 의용군으로 참전했다가 후퇴 길에 집에 돌아왔다가 나중에는 국군으로 입대해서 제대한 분도 있었으니, 동족상잔의 전쟁이 만들어 낸 웃지 못할 사연은 너무나도 많다.

또, 자식들이 양편으로 나뉘어 싸우다가 전사하거나 장애자가 된 일도 있으니, 부모는 어느 자식 편을 들어야 할지, 그저 하늘만 쳐다보며 시절을 원망할 뿐이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시대 분위기에 따라, 총칼 앞에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렸다.

우리집 이웃에 목수인 김 영감이 있었다. 그분의 맏아들이 한국전쟁 때 부역을 하다가 유엔군이 대 반격을 하자 행방불명이 됐다.

어떤 마을 사람들은 북으로 넘어갔을 거라고도 했고, 다른 이는 후퇴하던 가운데에 B-29 제트기의 융단 폭격에 죽었을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시신을 거두지 못한 김 영감은 아들의 죽음을 쉽게 인정치 않았다.

휴전이 된 후에도 날이면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낮보다는 밤에 더 기다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 집 대청 기둥에는 밤이면 늘 등불이 켜져 있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수십 년, 그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김 영감은 포기하지 않았다. 제발 아들이 살아서 당신 생전에 다시 만나는 걸 삶의 최대 목표로 삼았다.

소문에 따르면 김 영감은 당신 아들이 제발 살아서 간첩으로라도 내려오길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 아들을 꼭 붙들어 관계 당국에 자수시켜서 죗값을 치른 후 함께 살고자 했다. 간첩으로 내려온다면 환한 대낮에 올 리가 없을 테니, 그 아들이 한밤중에 집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등불을 밝혀 두었던 것이다.

그렇게 아들을 기다리기 50여 년, 그동안 오매불망 아들을 기다리던 할머니, 남편을 기다리던 며느리는 그리움이 병이 되어 먼저 이승을 떠났다. 그 후 김 영감은 손자 손부와 함께 살며 오직 아들을 만날 그날을 학수고대하며 살았다.

5년 전 내가 고향에 갔을 때도 김 영감은 옛 집터에 새 집을 짓고 아흔의 고령임에도 건강하게 지내고 계셨다. 손자의 말을 들어보니 그 즈음도 식사를 잘하시고 이따금 당신의 건강을 위해 금오산에 올라 약초와 산채를 뜯어다가 드신다고 했다. 당신만은 아들을 꼭 만나야 눈을 감을 수 있다는 집념으로 강인한 삶을 사셨나 보다.

지난 해 서울에 온 김 노인 손자를 만났더니 몇 달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진작 할아버지가 남긴 유언은 집은 새로 짓거나 고쳐 살더라도 이사는 가지 말 것, 또 문패는 항상 크게 달아 둘 것, 그리고 전기료가 들더라도 밤에는 꼭 외등을 켜 두라고 했다 한다.

이상의 실화(實話)에서 아버지의 등불은 어두운 밤길을 걸어오는 자식의 앞길을 비춰주는 사랑의 등불로, 생사를 모르는 자식을 무작정 기다리는 희망의 등불로 험한 세상을 밝혀주고 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등불이 꺼지지 않는 한 인류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박도 기자가 최근에 펴낸 ≪아버지의 목소리≫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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