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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어름터 계곡 얼음장
ⓒ 임소혁
“천국은 어머니 발 밑에 있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자식에게는 어머니가 천국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는 뜻이다.

이 위대한 모성애로 인류 역사는 이어져 간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 동안 교단에서 수많은 어머니를 만났다. 하나같이 자녀 사랑이 넘쳤다.

때로는 그 사랑이 지나쳐 ‘치맛바람’이란 냉소의 말로 지탄받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어머니의 자식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은 곧 지옥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교단 초년 시절, 중학교 신입생을 처음 담임으로 맡았을 때다. 입학식 날, 직원회를 마치고 운동장에 나가자 많은 신입생들이 반 표지 팻말 앞에 정렬하고 있었다.

1-12반 팻말 앞에 다가서자 신입생 녀석들이 고개를 뽑아 새 담임인 나를 호기심 어린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았다. 나는 녀석들이 어린 토끼같이 귀여워서 앞줄부터 한 녀석씩 복장을 매만져 주고 볼을 쓰다듬으면서 맨 뒤 줄까지 훑어 갔다.

“야! 우리 선생님 아주 싱싱하다.”
“굉장히 무섭겠다.”
그들은 저마다 나에 대한 촌평들을 소곤거렸다. 즐거운 일이었다. 마냥 귀엽기만 했다. 흐뭇하고 행복한 날이었다.

그런데 맨 끝엣 놈, 녀석은 피부가 새하얗고 코가 유난히 오똑했다. 얼른 보아도 개구쟁이 끼가 많아 보이는 혼혈아였다. 나는 녀석을 덥석 껴안았다.

“이름은?”
“주만성(가명)이에요.”
“누구와 함께 왔니?”
“혼자 왔어요.”

내가 어깨를 다독거리자 녀석은 싱긋 웃었다. 입학식이 끝난 후 그들이 제출한 환경조사서를 정리하면서 주군 것을 유심히 살폈다.

본적은 경기도 파주군 연풍면 연풍리(용주골)이었고, 현주소는 용산구 보광동 속칭 ‘텍사스 골목’으로 그의 성(姓)은 어머니를 따랐다.

며칠 후 그의 면담 차례였다.

“누구와 사니?”
“엄마, 여동생 셋이 살아요.”
“아버지는?”
“미국에 계신대요.”
“어머니는 뭘 하시니?”
“몰라요.”

주군의 대답이 갑자기 볼멘소리였다. 나는 더 이상 묻기가 민망스러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자 녀석은 금세 전날처럼 싱긋 웃었다.

아이들은 그를 이름 대신 ‘헬로우’라고 불렀다. 반 녀석들은 그를 미운 오리 새끼 마냥 그냥 두질 않았다. 걸핏하면 ‘헬로우’ ‘망키’ 라며 놀렸다. 그때마다 그는 신경질을 내며 덤볐지만 늘 그의 울음으로 끝났다.

어느 날, 한 녀석이 헐레벌떡 교무실로 달려왔다.
“선생님, 만성이가 광덕이를 칼로 찔렀어요.”
깜짝 놀라 교실로 뛰어 갔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었다. 다친 녀석을 양호실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한 후 그를 교무실로 데려 왔다.

“왜 찔렀니?”
“자꾸만 놀리잖아요. 걘 맨날 날 못살게 놀려요. 내 도시락 반찬도 다 뺏어가고….”
“그렇다고 칼로 찌르면 어쩌니?”
“…….”
그는 울음을 터뜨렸다. 서럽게 울면서 눈물을 두 손등으로 번갈아 문질렀다.

▲ 복주머니 난초꽃
ⓒ 임소혁
마침 다음 시간이 내 반 수업 시간이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예삿날과는 달리 찬물을 끼얹는 듯 조용했다.

“눈감아!”
반 녀석들은 꼼짝도 않고 겁먹은 채 숨을 죽였다.
“앞으로 반에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만성이를 놀려서는 안 된다. 별명을 불러서도 안 돼!”
“네엣!”
대답이 우렁찼다.

“앞으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선생님은 이유를 묻지 않고 너희들을 혼낼 테다. 알았냐!”
“네엣!”
일제히 복창한 대답이 더욱 우렁차다. 반장 정우가 눈을 감은 채 손을 번쩍 들었다.

“일어나서 말해 봐.”
“선생님,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일은 용서해 주십시오.”

반 아이들을 훑어보니 모두 그 말에 동의하는 듯했다.

“너희들 모두 약속할 수 있니?”
“네엣!”
“그럼 굳게 약속한 걸로 알고 오늘은 이만 용서한다.”

그 날 그 사건 이후로는 반 녀석들이 만성이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졌다. 그래도 내 눈을 피해 사소한 일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한 일들의 발단은 그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반 아이들의 눈에 거슬리는 엉뚱한 행동을 잘했고, 그 당시로서는 햄이나 소시지 같은 별난 도시락 반찬을 싸왔고, 조금만 장난을 해도 피해 의식이 많아서 대걸레나 포크를 들고 덤빈다든지 울음부터 터뜨렸다.

어느 하루,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가는데 아이들이 웅성웅성 복도를 메웠다.
“야, 만성이 엄마다.”
“계집아이는 만성이 동생이다.”

녀석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나 된 듯 법석을 떨었다. 나는 아이들을 야단을 쳐서 흩어 보내고 어머니를 내 자리로 안내했다. 어머니는 다섯 살 가량의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소녀를 데리고 왔다. 어머니의 외모와 차림은 얼른 보아도 미군부대 뒷골목의 여인임을 짐작케 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금세 울먹거렸다.

“학교에서 자기 편은 선생님밖에 없대요.”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동안 말없이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교무실의 선생님들 눈길이 모두 내 자리로 쏠렸다.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혼자 키우기 힘 드실텐데 왜 일찍 … 해외 입양을 시키지 않았습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하려고 몇 번이나 수속까지 밟다가 그만…. 내가 낳은 자식 차마 내 손으로 뗄 수 없어 이때까지 미련스럽게 주리 끼고 있어요.”

그리고는 다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 흐느꼈다. 나는 순간 그 어머니의 일그러진 모습이 오히려 성녀(聖女)로 보였다.

주위의 따가운 눈총과 자신의 생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으면서도, 당신의 손으로 차마 뗄 수 없는 그 뜨거운 본능, 거룩한 모성애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학교에는 안 오려고 결심했어요. 초등학교 때 학교에 몇 번 찾아갔더니 다른 애들이 놀린다고 한사코 말렸어요. 걔가 집에 와서 선생님 말씀 자주 하기에……. 선생님 죄송해요. 우리 만성이 때문에 속 많이 상하셨지요?”

어머니가 잠시 머물다 떠나자 교무실은 그 어머니가 화제였다. 주군 이웃에 사는 분은 여태 그 어머니가 이태원 텍사스 골목에서 '현역' 생활을 한다고 했다.

주군은 그 후로도 자질구레한 말썽은 피웠지만 3년을 무사히 넘겼다. 때때로 어머니가 편찮다고, 홀트 아동복지회에 양육비를 받으러 간다고 결석이 잦았다.

주군의 졸업과 함께 나도 그 학교를 떠났고 그 후 소식을 여태 듣지 못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내가 낳은 자식 차마 내 손으로 뗄 수 없어 이때까지 미련스럽게 주리 끼고 있어요.”라고 눈물 짖던 어머니의 모습이 진하게 남아 있다.

어머니의 마음은 하늘의 마음이다.

덧붙이는 글 | '지리산의 야생화' 사진 게재를 허락해준 사진작가 임소혁씨는 지리산이 좋아서 지리산에서 살면서 오로지 지리산을 시로 필름으로 담아내고 있다. 임 작가가 펴낸 책으로는 <일출집><한국의 지리산-CD롬> (한빛 미디어) <쉽게 찾는 우리산>(현암사) <지리산- 영혼이 머무는 곳에서>(다른우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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