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99년 상하이 파완런 구장의 축구팬. 당시 한국과 예선전을 앞두고 몸에 한국타도를 외치는 이들
99년 상하이 파완런 구장의 축구팬. 당시 한국과 예선전을 앞두고 몸에 한국타도를 외치는 이들 ⓒ 조창완
중국 관영방송인 중앙텔레비전(CCTV)은 채널이 12개다.

종합, 경제, 문화, 국제, 스포츠, 영화, 드라마 채널 등에서 수없이 많은 방송을 쏟아낸다. 그 채널들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것은 스포츠(5) 채널이다. 그리고 스포츠 채널 가운데서 가장 인기있는 프로그램은 ‘축구의 밤’(足球之夜), ‘천하축구’(天下足球) 등 축구 전문프로그램과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리그를 중계하는 방송이다.

중국 중심으로 축구에 관한 내용을 전하는‘축구의 밤’과 주말에 벌어진 세계 축구계의 동정을 전하는‘천하축구’를 보고 있노라면 축구에 관한 그들의 집착에 놀라곤 한다. 보통 2시간 정도 방송하는 이 프로그램은 다음날 오전에 재방송해 전체 편성에서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한다. 또 유럽 프로리그 중계에 쏟는 중국인들의 관심도 보통은 아니다.

자국 선수들이 뛰고 있는 경기는 물론이고, 주요경기는 대부분 생중계한다. 외국리그만이 아니다. 중국 국내리그가 열리는 날은 프로구단이 있는 성의 위성방송은 모두 프로리그 중계에 열을 올린다. 스포츠 뉴스도 중국 선수들의 경기 소식에 앞서 유럽 프로리그의 전날 결과부터 방송하는 게 편성의 원칙처럼 되었다.

중앙텔레비전 뿐만 아니라 각 위성이나 각 도시마다 보유하는 스포츠 채널은 대부분 축구를 위해 할애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류 팬에 2류 선수, 3류 감독’이라는 속어에 1류의 축구 언론이라고 해도 무리가 안될 만큼 중국 언론이 축구에 쏟는 힘은 남다르다.

방송뿐만 아니다. 중국 신문 시장에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매체는 광저우에서 발행하는 ‘축구’(足球)라는 주 3회 발행신문이다. 현재 발행부수가 300만부(불법 복사까지 합치면 500만부가 넘을 것으로 추정)를 넘고 있으며, 이 신문을 제외하고도 수십종의 축구전문신문이나 잡지가 쏟아진다. 도대체 무엇이 중국인들을 이렇게 축구에 열광하게 만들었을까.

패배와 좌절로 점착됐던 중국 축구사

99년 상하이 파완런 구장앞에서 중국 매체와 인터뷰하는 치우미
99년 상하이 파완런 구장앞에서 중국 매체와 인터뷰하는 치우미 ⓒ 조창완
4반세기 동안 한국과의 경기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해 공한증(恐韓症)을 갖고 있으면서도 중국인들이 축구를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우선 중국인들이 축구에 집착하는 데는 역사가 있다. 마치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축구’하면 뭔가 가슴에 팍 맺히는 게 생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집착은 승리의 환호보다는 패배의 탄식에서 나왔다는데 약간은 비극성이 있다.

현재 공인된 중국의 축구광(球迷)는 8천만명 정도. 이 가운데는 축구를 위해 이혼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경기장을 쫓아다니는 직업 축구팬들도 적지 않다. 멍판화(孟繁華)가 ‘중국, 축제인가 혼돈인가’에서 중국 축구팬 백서에서 소개한 축구 때문에 이혼한 세 남자와 결혼 안한 한 남자의 사례는 그저 특이한 사례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 언제부터 중국인들은 축구를 좋아하고, 이렇게 열광적이었을까. 축구 종가라는 논리에 대항해 중국인들은 자국이 축구 종주국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당(唐)나라 시대부터 축구와 룰이 비슷한 운동이 황실을 중심으로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모두 인정하기는 그렇다. 서양식 룰이 적용하는 최근의 축구는 근대이후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함께 보급되기 시작했다.

중국 20세기 초반은 무얼 정비할 틈이 없는 만신창이였던 만큼 축구도 제대로 자리할 수 없었다. 따라서 1949년 공산화와 함께 중국의 축구역사도 시작됐다. 51년 톈진에서 처음으로 ‘전국축구경기대회’가 열렸고, 그해 군인으로 구성된 대표팀은 처음으로 체코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해 불가리아에게 1:9로 지고, 체코슬로바키아에게 1:17로 졌다. 56년에는 지금은 분리된 유고슬라비아와의 친선전을 가졌다.

참패한 경기 후에 마오쩌뚱은 유고대표선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12년 후면 올림픽을 제패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58년 대만의 세계축구연맹 가입과 중국의 퇴출로 중국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다.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들과만 경기를 가진다.

1967년 문화대혁명은 축구를 비켜가지 않았다. 이 결과 67년부터 71년까지는 중국에 축구가 완전히 사라지는 현상을 벌어졌다. 다행히 71년에는 12년 후 올림픽을 재패하겠다는 마오쩌둥의 교시가 떠오르면서 북한, 알바니아와 친선경기를 재개했다. 하지만 78년은 중국에게 쉽게 깨지지 않을 악몽이 시작되는 해이기도했다.(당시에 그들은 몰랐다) 다름 아니라 아시안게임 최종예선에서 한국에게 0:1로 진 것이다. ‘공한증’(恐韓症)의 시작이었다.

이후 중국은 월드컵과 올림픽만 열리면 축구 예선전을 통과하기 위해 온갖 신경을 곤두세웠다. 81년은 기대감에 부푼 한해였다.

월드컵 예선에서 중국은 북한에 4:2, 쿠웨이트에 3:0, 사우디아라비아를 4:2, 2:0으로 이기는 등 선전을 거듭했다. 특히 사우디에게 2:0으로 뒤지던 경기를 20분 남기고 4골 넣어 뒤집은 11월 12일 경기는 중국인들을 흥분에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82년 1월 10일 있었던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서 1:2로 석패함으로써 모처럼 온 기회를 놓쳤다.

덩샤오핑의 지원과 소박한 결과

이런 패배의 역사였지만‘덩샤오핑’은 축구의 부흥을 위해 많은 투자를 했다. 프랑스 유학시절 축구 경기를 보기 위해 식비를 아껴가며 축구 표를 샀다가 공도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아서 실망했다는 소회를 말할 만큼 덩샤오핑은 축구를 좋아했고, 축구를 보급시키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했다.

덩샤오핑은 축구가 중국인들의 마음을 합치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특히 따리엔(大連)을 축구 육성의 중심도시로 만들고 싶어했고, 이 때문에 따리엔팀은 2002년 정규리그에 우승해 9년의 축구역사에 7번 우승을 이루는 위업을 달성했다.

2002년 정규리그 우승팀 따리엔의 환호
2002년 정규리그 우승팀 따리엔의 환호 ⓒ 신랑왕
이런 지원 때문인지 87년은 중국 축구에게 최초로 서광이 비친 해였다. 중국은 10월 26일 도쿄에서 열린 서울 올림픽 예선전에서 일본을 2:0으로 이겨 최초로 국제 무대에 얼굴을 비추게 된다. ‘5.19사태’이후 감독으로 선임된 까오펑웬의 지도하에 얻어낸 큰 성과였다.

88년 서울은 중국인들에게 환희의 장소였다. 하지만 까오감독의 지도력도 실력차 앞에서는 무득점의 치욕을 맛보아야 했다. 반면에 국내에서는 리그가 갑A, 갑B로 나눠져 축구 부흥을 준비하고 있었다. 89년에는 카타르와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서 1:0으로 앞서다가 3분을 남기고 두골을 먹어 역전당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92년에는 다시 공포의 3분(89년 카타르전)에 이어 ‘공포의 9분’이라는 악몽이 생겨났다. 올림픽 예선에서 한국과 맞붙은 중국은 9분을 남기고, 3골을 연속으로 먹었기 때문이다.

93년에는 이제 국가대표로 뛰기 시작하는 리진위 등 어린 선수들을 브라질로 유학 보내는 등 미래를 내다보는 투자를 시작한 한 해였다. 94년 4월 17일 중국에도 프로리그가 시작됐다. 본격적인 축구광 시대의 개막이었다. 97년 이전 경기에서 잘나가던 중국 축구대표팀은 다시 한번 좌절을 경험한다.

이번에는 '공한증'이 아니라 '공이란증'었다. 중국은 9월 13일 중국 따리엔 진조우경기장에서 벌어진 이란과의 홈경기에서 2:4로 패배하고, 다시 10월 31일 카타르에게 마저 패해 프랑스 월드컵의 티켓은 물론이고, 플레이오프 티켓도 놓쳤다. 세기말을 앞두고 있는 99년 중국은 시드니올림픽 티겟을 간절히 목말라했다. 하지만 10월 3일 잠실, 10월 29일 상하이에서 벌어진 한국과의 경기에서 ‘공한증’의 악몽이 재현됨에 따라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필자는 당시 상하이 경기를 현지에서 봤다. 중국인들의 축구열기를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던 계기였다. 이 경기장은 말 그대로 파완런(八萬人)을 수용하는 위용을 자랑하는 경기장이었는데, 이 경기의 모든 표는 보름전에 완전히 동이 났다.

경기 당일 50위안(우리돈 6천원) 가량의 표는 1000위안(12만원)까지 폭등했다. 1000위안은 대졸자의 월급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경기장 주변은 경기가 있었던 오후 7시가 한참이나 남은 정오부터 축구 열기를 느끼려는 관중들로 번잡하다. "중국에는 일류의 축구팬과 2류의 축구선수와 3류의 감독이 있다"는 말을 부분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88년 서울 올림픽이 한국이 없어서 예선을 통과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면, 2002년 한일월드컵 역시 한국과 일본이 없어서 월드컵과 첫 인연을 가질 수 있는 계기였다. 예선전에서 중국은 이란, 이라크, 사우디 등 중동의 강팀을 피할 수 있었고, 결국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6월 세계를 들뜨게 한 월드컵 당시 중국은 한국에 못지 않은 열기로 월드컵을 지켜봤다.

공동 개최국인 일본이 더러 우리나라에서 열린 경기를 중계하지 않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지만 중국은 월드컵 전 경기를 중계했다. 단순히 중계하는 것뿐만 아니라 각 경기장에 취재진을 보내, 경기 한시간 전부터 경기장 주변 분위기와 경기 분석을 내보내는 등 개최국 못지 않은 열과 성을 보였다.

축구가 만들어낸 다양한 이상 심리와 결과물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 지난 월드컵은 자신들이 첫 번째로 월드컵에서 뛴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한편 한국과 일본에 대한 질투심을 가져야 하기도 했다. 4강 신화를 이뤄낸 우리와 달리 중국은 3패, 무득점의 수모를 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방송을 주관하던 CCTV 스포츠채널(5)의 진행자들은 우리나라 축구 흠집내기를 계속했고, 중국에 있는 우리 교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기도 했다.

당시에 중국 공안의 우리 영사관 난입 등 정치적 사안뿐만 아니라 축구인구도 형편없는 우리나라가 자신들의 영원한 전범인 유럽축구의 종주국인 잉글랜드, 이탈리아, 스페인 등과 비기거나 이기자 질투심이 표출된 부분이 강하다. 중국인들의 유럽리그에 대한 집착은 우리의 상상 이상이다. 우리에 비해 인터넷 홈페이지 문화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지만 수백개의 축구포탈사이트와 역시 수백개의 각종 팬클럽 사이트가 활동하고 있다. 거기에 축구복표가 만들어져 한 주에 최고 2억7166만6664위안(430억원) 어치가 팔리는 등 엄청난 열기를 과시하고 있다.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관심인 도박과 최근 최대의 관심인 축구가 응집된 복표는 CCTV 5가 복권사업의 전반을 중계하면서 이상과열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올림픽 개최에 환호하는 푸저우 축구학교 학생들
올림픽 개최에 환호하는 푸저우 축구학교 학생들 ⓒ 신화사
이런 관심은 축구를 사회의 중요한 한 축으로 만들어놓았다. 중국 축구학교의 대표격으로 1000여명이 재학중인 친황타오(秦皇島) 중국축구학교(中國足球學校) 등에서는 축구를 중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문학교로 일반 학교에 비해 수업료도 높은데도 불구하고 많은 학생이 몰린다. 중국 축구학교는 선양, 칭다오, 짠지앙, 구이양 등 8개곳에 분교를 설치 운영하고 있는 축구교육의 중심이며. 이밖에도 프로구단이 이끄는 축구학교 등 1000여개가 넘는 축구학교들이 있다.

또 중국 축구영재에 대한 투자는 단순히 축구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우수한 선수는 전액을 지원하며 축구선진국에 유학보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93년에 브라질로 유학보내 현재 축구팀의 주축을 이룩하고 있는 리진위, 장위닝, 순지하이, 리웨이펑 등은 모두 브라질 유학파다.

또 이들이 돌아와 프로축구의 주 구성원이 되고, 더러는 영국, 독일 등 외국리그에 진출해 축구열기를 더욱 부채질한다. 영국에서 뛰고 있는 쑨지하이, 리티에, 리웨이펑 등의 진출도 실력보다는 축구 중계권으로 인한 이득의 요소도 있다. 이렇듯이 중국의 축구열기는 단순히 하나의 취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언론, 교육, 정치, 복표 등 모든 요소가 중첩되면서 상당히 두텁게 의식 층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축구에 관해서 다시 한번 한국의 높은 벽을 실감하게 한 계기였다. 또 이장수 감독이 우승 경험이 없었던 칭다오팀을 중국 양대 쟁탈전중에 하나인 축구협회장배의 우승으로 이끌면서 한국 축구를 보는 중국인들의 눈은 어느 정도 경외감에 차 있다. 그는 중국 축구의 영원한 약자일 것 같던 충칭을 2000년 축구협회배의 우승으로 이끌어 충칭 뿐만 아니라 중국 서부 축구계의 영웅이 됐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