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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루쉰공위앤 안에 있는 루쉰동상. 바로 뒤가 루쉰의 묘다.
상하이 루쉰공위앤 안에 있는 루쉰동상. 바로 뒤가 루쉰의 묘다. ⓒ 조창완
중국 공산당이 당장에서 ‘공산당 선언’을 빼고, 자본가의 입당을 허용한 2002년 겨울의 초입 루쉰의 고향 샤오싱(紹興)에서는 루쉰의 상표논쟁이 있었다. 이곳에서 새롭게 설립된 샤오싱주 회사가 ‘루쉰’의 이름을 딴 술을 내놓는 것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었다. 중국 근대 최고의 지성을 술 이름으로 만들어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장사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가리는 만큼 일단은 루쉰의 입상(立像)까지 들어간 술이 시장에 나왔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상상하기 어려웠던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일이지만 이미 뽕나무밭은 바다 속에 잠긴 것을 따로 논할 필요가 있을까.

국문학도였던 기자에게 루쉰은 그다지 인상적인 작가는 아니었다.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등의 그의 저술이 쉽사리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중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관심을 가지면서 루쉰 만큼 부각되는 인물이 없었다. 그래서 루쉰의 고향 샤오싱에 가는 길도 그 만큼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거기에 루쉰의 고향 샤오싱는 그 작은 도시에서 근대에만 엄청난 인물을 배출한 곳이니 그 흥분은 더할 수밖에 없다.

샤오싱이나 조우주왕 등 강남의 촌락은 물과 땅의 경계없이 만들어져 독특한 느낌을 준다
샤오싱이나 조우주왕 등 강남의 촌락은 물과 땅의 경계없이 만들어져 독특한 느낌을 준다 ⓒ 조창완
항저우에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샤오싱으로 가는 길은 남방 특유의 호수 도시의 풍경을 느낄 수 있다. 길가에는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호수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들과 호수가 교차되면서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뒤에 마이산홍(梅山紅)이라는 이쁜 이름의 커다란 호수를 끼고 샤오싱역에 내려 도시로 들어갈 때, 어렵지 않게 물의 내음을 만끽할 수 있다. 하지만 물의 내음에 못지않은 것이 학문의 내음이다.

사실 20세기 중국 최고의 사상가이자 문인인 루쉰을 비롯해, 마오쩌둥도 그가 없으면 공산혁명을 못 이루었을 거라는 칭송을 받는 저우언라이, 베이징대학의 총장을 지내며 현대 지성 양성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차이위앤페이, 여성 혁명가 추진(秋瑾)의 옛집과 옛 놀이터가 걸어서 얼마 크지도 않는 이 소도시에 붙어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루쉰의 흔적이 살아있는 샤오싱, 베이징 그리고 상하이

싼웨이슈위앤 앞 풍경. 작은 배들은 이제 여행자를 위한  상품의 기능도 한다
싼웨이슈위앤 앞 풍경. 작은 배들은 이제 여행자를 위한 상품의 기능도 한다 ⓒ 조창완
루쉰의 옛집과 그가 공부하던 샨웨이슈우(三味書屋)는 셴헝(咸亨) 주점, 창칭스(長慶寺), 투쿠스(土谷祠) 등 그의 소설에도 자주 등장하는 곳들과 붙어 있어 남다른 감흥을 준다. 그는 난징의 지앙난수이스쉐탕(江南水師學堂)으로 공부하러 가던 18살 때까지 이곳에서 공부했고, 1910년 서른의 나이로 이곳 중학교의 교감으로 부임한 후 다시 2년을 살다가 난징을 거쳐서 베이징으로 갔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과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몸의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학전문학교를 포기하고 들어와 잠시 생활한 그의 고향이니 만큼 그의 사상과 낭만의 모태가 된 곳은 샤오싱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풍부한 고전과 지명도 대부분은 샤오싱에서 부여받았다.

루쉰은 31살인 1911년 10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다음해 쑨원이 이끄는 남경 정부의 교육부 직원으로 들어가 난징을 거쳐서 1912년에는 베이징에 안착한다.
싼웨이슈위앤. 루쉰은 이곳에서 중국 전통 사상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싼웨이슈위앤. 루쉰은 이곳에서 중국 전통 사상을 두루 섭렵할 수 있었다 ⓒ 루쉰박물관
베이징 샤오싱 회관에서 진로를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는 중국의 모습을 보면서 회심한다. 하지만 38살인 1918년 5월 진보잡지인 ‘신청년’에 ‘광인일기’를 연재함으로써 중국인이 가진 정신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간다. 한편으로는 베이징 대학, 베이징 사범대학에 출강하면서 교육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1921년 12월에는 ‘아Q정전’의 연재를 시작해 다음해 2월 마침으로써 20세기 중국 문학 사상 최대의 문제작을 탄생시킨다.

베이징은 그가 중국인으로서 근대사상을 받아들이는데, 다양한 요소를 얻은 곳이다. 베이징대학이나 사범대학 등에서 그는 그가 량치차오(梁棨超) 등의 사상을 수혈 받고, 궈모루(郭沫若) 등과 교류하면서 고민하고 그 상흔을 소설이나 시, 잡문으로 담아낸 곳이다. 그런 그의 흔적인 푸청먼(阜成門) 시얼티아오에 있는 옛집이나 같이 있는 루쉰박물관, 또 그가 고향의 향수를 달래던 샤오싱후이관(紹興會館) 등에 남아있다.

베이징 시절 루쉰의 집. 이곳과 샤오싱회관을 오가며, 주된 창작시절을 보냈다
베이징 시절 루쉰의 집. 이곳과 샤오싱회관을 오가며, 주된 창작시절을 보냈다 ⓒ 베이징루쉰박물관
베이징의 정치적 혼란과 혼돈 속에서 갈등하던 루쉰은 1926년(46세) 샤먼(廈門)대학에 교수로 취임하면서 베이징을 떠난다. 하지만 다음해 샤먼을 떠나, 잠깐 광저우 중산대학을 거친 후 1927년 10월에는 상하이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그는 창작보다는 사회주의문학운동을 펼치고, 러시아 문학작품이나 서구문학이론을 편역 출판하는데 노력한다. 루쉰은 지병으로 사망한 1936년 10월 19일까지 상하이에 머문다. 때문에 상하이인들은 루쉰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있다. 때문에 홍코우공원을 루쉰 공원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홍코우공원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에 상하이사변의 전승기념 행사를 하는 일본군 장성들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가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일본인들과 적잖은 인연이 있는 곳이다. 루쉰은 젊은 날에 일본에서 공부한 적도, 그와 교류하던 지인들도 많아서 자연스럽게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작품이 일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때문에 루쉰공원에 건립된 루쉰박물관의 건설과정에도 일본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1927년 10월 광저우에서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나이산수디엔(內山書店)과 공원을 다녔고, 후에 그가 폐병으로 죽었을 때 처음에 그의 묘를 완궈(萬國) 공동묘지에 썼다가 루쉰공원으로 옮겼다.

마오쩌둥에 의해 위대한 사상가로 대우받아

서재의 루쉰. 그가 창작활동을 하던 시기는 신해혁명, 5-4운동 등 격변의 시기였다
서재의 루쉰. 그가 창작활동을 하던 시기는 신해혁명, 5-4운동 등 격변의 시기였다 ⓒ 루쉰박물관
그럼 현대 중국에서 루쉰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떨까. 현대 중국에서 루쉰의 위상은 마오쩌둥이 ‘신민주주의론’에서 “노신은 중국 문화 혁명의 주장(主將)이다. 그는 위대한 문학가일 뿐 아니라 또한 위대한 사상가이자 위대한 혁명가이기도 하다. 문화전선에 있어서 노신은 전민족의 대다수를 대표하여 적을 향해 맹렬히 진격해간 정확하며 가장 용감하고 가장 굳세고 가장 충실하고 가장 열렬한 공전의 민족영웅이었다. 노신의 방향은 곧 중국 민족 신문화의 방향이다”(전형준 ‘현대 중국문학의 이해’에서 재인용) 라고 말한데서 거의 결정이 됐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옌안(延安)시절에 루쉰의 책을 밤새도록 읽어서 ‘마오쩌둥의 성서’라고까지 표현할 정도다.

마오쩌둥의 절대적인 찬사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그의 텍스트가 가장 숭앙받는 존재가 됐다. 때문에 그는 문화대혁명에도 크게 손길이 뻗히지 않았던 드문 사상가로 대우받았다. 실제로 그는 “소설가요, <문화편지론 文化偏至論>이나 <악마시역설 摩羅詩力說> 등을 발표한 문화 문학이론가요, 고전시 현대시 산문시 등을 쓴 시인이요, 어사사(語絲社)나 미명사(未明社) 망원사(莽原社) 등의 문학동인을 조직했던 문학운동가요, <미명총간> <오합총서> 등을 편찬 출간한 출판가요, 하문대학과 중산대학 등에서 강의한 교수요, 1930년 중국좌익작가연맹을 비롯 중국자유운동대동맹 중국민권보장동맹 등을 조직했던 민족운동 정치 운동가”(허세욱, ‘중국현대문학사’에서) 였다.

그는 때로 좌절했지만 중국인의 마음을 고치는 ‘정신의 의사’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을 타고 났었다. 그는 산웨이슈위앤 등 전통적인 교육방식에서부터 막 눈이 뜨기 시작한 서구문화를 어려서부터 받아들일 수 있었다. 또 열세살인 1893년 관직에 있던 조부가 과거시험 부정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고 1894년 겨울에는 부친이 중병에 걸려 2년 가량 투병하다가 사망함으로써 샤오싱에서 내노라했던 그의 집안은 완전히 몰락해 그는 외가를 다니면서 가난한 농민들과 가난한 도시 지식인들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거기에 일본 유학을 통해 서구의 과학은 물론이고 철학 등을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물론 그런 시점도 중요했지만 영웅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난세라는 요인도 그에게는 적절했다. 그가 성장한 시점은 청조가 서구 열강에 무너지고, 서구민주주의, 공산주의 등 수많은 사상이 앞 다투어 동양에 들어오는 한편 일본도 서서히 제국주의로서의 마각을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가 표출해야한 문학적 사상적 자산은 너무나 풍부했다.

때문에 루쉰은 “스스로를 중국 사회 변혁기의 ‘중간물’이라 여기고는 깜깜한 갑문을 어깨로 떠받치듯 인습의 무게를 감내하면서, 스스로 ‘중국의 마지막 지식인’이 되길 희망했다.”(빙신(冰心) ‘중국문학사’ 중에서)

하지만 사상가임을 중심으로 부각된 자신 때문에 문인으로서 그는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었다. 때문에 80년대 후반부터는 중국에서 문인으로 루쉰을 더 자세히 보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기도 하다. “먼저 루쉰이 있는 그 자리로 돌아가자”라는 기치 아래 소설의 창작에 큰 영향을 주는 그의 내적 모순과 다양한 갈등을 분석하기 위한 작업도 중시하기 시작했다.

소설에서 전근대성 타파 희망 담아

루쉰의 가족사진. 1931년 상하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루쉰의 가족사진. 1931년 상하이에서 찍은 사진이다 ⓒ 루쉰박물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소통 수단인 소설은 그런 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첫 작품 ‘광인일기’에서 그는 미친 이를 통해 중국역사 4천년의 표어인 ‘인의도덕’(仁義道德)이라는 글자가 결국인 ‘식인’(食人)이었다며, 인민을 압박하는 식민의 역사를 통열하게 비판한다. 그는 “사천년 동안 늘 사람을 잡아먹어온 곳, 나도 오랫동안 그 속에 섞여 살아왔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달았다”고 말한다. 또 ‘쿵이지’(孔乙己)에서는 몰락한 전통 지식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또 ‘약’에서는 처형된 혁명가의 피를 적신 만두를 사다가 폐병에 걸린 아들에 주는 우매한 민중의 모습을 담는다.

1921년 12월 천바오(晨報)에 연재하기 시작한 그의 대표작 ‘아Q정전’에서 루쉰은 현실과 다르게 생각해서 자신을 위로하는 정신승리법을 가진 아Q의 삶을 통해 중국인들의 사상을 통렬히 비판하는 한편 “정신 승리법이라 명명된 농민 계급의 병든 의식 상태로부터 그 사회적 존재에 의해 본래적으로 주어진 혁명적 에네르기로의 전화 가능성을 포착”(전형준 ‘노신 소설과 5·4운동’ 중에서)한다. 그리고 이 소설은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러시아 등 서구에까지 많은 영향을 준다. 또 그의 소설에는 전설에 나오는 여와, 후예(后?), 우왕(禹王) 등과 노자, 공자, 묵자 등이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Q정전’ 이후 루쉰의 창작세계는 상당 부분 위축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56세인 1936년 상하이에서 지병인 폐병으로 숨을 거둔다.

루쉰의 초상.
루쉰의 초상. ⓒ 루쉰박물관
샤오싱의 여름은 호수에서 뿜어내는 습기와 강남 특유의 무더위로 행자들을 지치게 하기 쉬웠다. 그런 피로를 풀기 위해 짐을 호텔에 던지고, 몰락한 지식인 쿵이지나, 작가 자신의 자전적 성격이 강한 소설 ‘술집에서’의 주인공처럼 술집에 들러 샤오싱 주를 주문했다. 바이주와 달리 샤오싱 주는 그다지 술이 세지 않다. 우리의 막걸리 같은 술이다. 루쉰의 삶도 샤오싱주 갔다. 마오쩌둥의 해석에 의해 그의 삶도 바이주처럼 독해진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지금쯤은 그를 따끈하게 데워서 회향콩이나 간(肝)을 안주로 삼아 마시는 샤오싱 주의 농도로만으로 해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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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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