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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가진 장철 광복회장.
14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가진 장철 광복회장. ⓒ 오마이뉴스 손병관
지난 3.1절을 앞두고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1차 명단'은 사주들의 이름이 들어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등 우리 사회에 '친일파 청산'에 대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친일파 1차 명단' 선정 작업에 참여했던 광복회는 8.15에 이르러서는 청산 작업에서 손을 떼 독립유공자들의 단체가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은 광복회를 대신해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작가회의 등과 함께 14일 '친일문학인 42인'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은 "나도 광복회원이지만, 광복회마저 친일세력 청산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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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나마 친일파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광복회의 입장 변화에는 지난 5월13일 제16대 회장에 선출된 장철 광복회장(80)의 소신이 크게 작용했다.

장 회장은 광복절 57주년을 앞두고 14일 <오마이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이승만 정부가 반민특위를 와해시킨 후 친일세력이 정권을 잡아 청산 시기를 놓쳤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상황에서 후손들과 마찰이 있을 수 있으니 화합을 위해 친일파 청산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장 회장은 "독립운동을 함께 한 동료 중 배신자는 어떻게 했겠느냐?"는 질문에 "그건 공과를 따질 게 아니라 죽여야 한다"고 다소 감정적인 처방을 내린 반면, 김성수 등 친일파 논란에 휘말린 인사들에 대해서는 "본심으로 친일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공과가 있는데, 어느 것이 많은지 우리는 알 수 없다"며 판단을 유보해 '친일파' 문제에 관한 한 다소 엇갈린 시각을 드러냈다.

장 회장은 일제시대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가 해방 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좌익 인사들에 대해서도 "좌익 인사였기 때문에 독립 운동한 사실을 말살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면서도 "우리나라 국시(國是)가 반공이니까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다음은 장 회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 6월1일 광복회장에 취임해 두 달 반이 지난 소감은?

"광복회는 본래 애국지사와 그 후손들이 모인 정신적인 단체입니다. 창설된 지 40년 가까이 됩니다. 생존 유공자는 350여명 정도이고, 유족들까지 합치면 5500여명 정도 되죠.

광복회의 당면과제는 선혈들이 남긴 유훈을 잘 보존하고 발굴해서 후손에게 알리는 민족정기 선양사업입니다. 원래 회원 자격을 독립지사를 포함, 3대까지 할 수 있도록 했는데, 73년인가 이를 2대로 줄여놨습니다.

이걸 놔두면 앞으로 몇십 년 지나서 광복회가 없어진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회원 자격을 3대까지로 다시 환원하자는 법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취임 당시 회원들에게 공약했습니다. 회원 전부가 바라고 있어요.

또 하나는 회원들의 후생복지 문제입니다. 회원들에게 겨우 생계 유지할 정도의 연금은 나오고 있습니다. (연금이) 생계비는 되도록 도와달라고 정부와 절충할 생각입니다. 등급에 따라 받는 연금의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연금을 현실화하고, 격차를 줄여달라는 얘기죠."

"광복회는 '박정희 논쟁'에 가담하고 싶지 않다"  ⓒ2002 오마이뉴스 손병관
"광복회는 '박정희 논쟁'에 가담하고 싶지 않다" ⓒ2002 오마이뉴스 손병관
- 73년이면 유신시절인데, 회원 자격이 제한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라는 게 있는 게 아니고, 위정자(박정희 전 대통령)가 그렇게 시켰으니까..."

- 광복회로서는 박 대통령에 대해 아무래도 불편한 감정이 있겠네요? 박정희 기념사업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당시로서는 그 양반이 한마디하는 게 법이었으니까... 우리로서는 그런 걸 표현할 필요가 없는데, 다른 곳에서는 (박 대통령이) 친일파에 가깝지 않나, 군사쿠데타에 의해 집권했다고 부정적인 얘기도 있습니다. 우린 뭐, 거기에 가담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 장 회장은 8.15 광복을 앞두고 국내 출병을 기다렸던 광복군 출신인데, 박 대통령은 당시 만주군 장교, 즉 적군으로 상이한 삶의 궤적을 그리지 않았습니까?
"큰 걸로 보면 위정자가 그런 것까지 감정을 가지겠어요? 감정을 가진다면 우리가 가지는 거지... (광복회는) 대범하게 넘어가는 겁니다. 다 한민족 아닌가? 과거야 어떻게 됐든지 현재가 중요한 거죠."

10대시절 광복군 입대한 이북출신 유공자
장철 회장은 누구인가?

지난 6월1일 임기3년의 회장에 취임한 장철 광복회장은 1922년 평안북도 의주 출신이다.

1936년 중국 베이징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임정 요원을 만나 시안으로 가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광복군의 전신)에서 활동했다.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한 장 회장은 미군 OSS로부터 특수훈련을 받고 광복군 산하 국내정진군에 편입돼 출병을 기다리다가 45년 광복을 맞은 후 그해 11월 귀국했다.

귀국 후에는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에 입교해 소위로 임관한 뒤 7사단 감찰부장, 육군 제39사단 참모장, 101 미 노무단 단장,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특수과장 등을 역임한 후 68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해방 전 활동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고, 광복회 사무총장(84∼87년), 경기지부장(99∼2002년)을 맡는 등 광복회와 끈끈한 인연을 맺어오다가 회장이 됐다. / 손병관 기자
- 광복군에 입대할 당시 상황을 설명해주십시오. 10대시절 항일의식이나 민족의식이 싹트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렸을 때 신의주 동중학교 사건에 연루돼서 1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온 고향선배가 있었는데, 그분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14살에 북경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백정현이라는 친구를 통해서 임정에서 파견한 김천성 특파원을 만났습니다. '일본과 싸우기 위해 조선 청년들은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그분의 설득을 받고 18살에 광복군에 들어가게 됐죠. 내가 광복군에서는 가장 어린 축이었을 겁니다.

해방후 북한으로 들어간 사람들도 몇 명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예전에 숙청됐거나 지금은 다 죽었을 것으로 봅니다. 북으로 간 몇 사람은 무정 장군의 휘하로 들어갔다가 함께 숙청당했죠."

- 광복군이 외세보다 앞서 국내에 들어갔다면 이후 분단으로 치달은 역사가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달라졌겠죠. 지금 생각하면 많이 아쉬운 순간이죠. 8월20일경 일부는 수송기로, 일부는 잠수함으로 국내로 들어가려는 찰나였어요. 김구 주석이 송별회를 해준다고 충칭(重慶, 중경)에서 시안(西安, 서안)으로 올라왔고, 파티 중간에 미군 장교가 와서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고 알려줬어요."

- 그때 김구 선생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모두들 만세 부르고 환호하는데, 백범은 시무룩해 있었어요. 장교 한 명이 '선생님, 왜 기뻐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으니 백범 선생이 '이 사람아, 피를 안 흘리고 얻은 독립은 발언권이 없네. 앞으로 우리나라가 어떻게 될지...'라고 걱정하셨어요. 그 말씀이 결국 맞아 들어갔죠."

- 경교장(귀국한 백범의 집무실)이 지금 강북삼성병원의 의사 휴게실로 방치되고 있다는데...
"(벽에 걸린 백범기념관 조감도를 가리키며) 10월에 준공되는데, 저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친일파 본인들은 다 죽고 후손들이 남았는데, 마찰 생기고 분열될 필요있나? 이북과도 화합하려고 하는데..." ⓒ2002 오마이뉴스 손병관
"친일파 본인들은 다 죽고 후손들이 남았는데, 마찰 생기고 분열될 필요있나? 이북과도 화합하려고 하는데..." ⓒ2002 오마이뉴스 손병관
- 해방후 반세기가 지난 상황에서 광복회장이 생각하는 국민화합은 무엇입니까?
"국민화합이야 다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번 월드컵을 보더라도 우리 국민들은 화합하고 있죠. 다만 친일파 숙청이 문제인데, 이것을 반드시 짚고 나갈 필요는 있지만, 벌써 반세기가 넘지 않았습니까?

친일파 본인들은 다 죽고 후손들이 남았는데, 그분들과 마찰이 생기고 분열될 소지가 있잖아요? 그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다 지났으니 화합하고 용서하는 게 좋잖아요? 누구 말처럼 총부리를 대고 싸우는 이북과도 화합하려고 하잖아요?"

- 친일파들의 방해로 반민특위가 와해돼서 청산이 안됐으니 지금이라도 해야한다는 의견들이 적지 않습니다. 친일파 청산이 지연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승만 박사때 반민특위를 해산시키면서 친일파 정권을 만들었고, 그 정권이 계속해서 내려왔지 않아요? 해야 되는 건 틀림없는데, 시기가 너무 늦었다는 것입니다. (친일파) 2세, 3세가 무슨 죄입니까?"

- 유태인들은 2차대전 끝난 지 한참이 지났지만, 지금도 자기 민족을 억압한 나치 전범들을 응징하기 위해 세계 곳곳을 뒤지고 있습니다.
"유태민족과 우리 민족은 다르지 않습니까? 유태인들은 아주 독하지만, 배달민족이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가 악착같은 민족으로 보이지만, 사실 문화인입니다."

- 윤경빈 전임회장의 경우 지난 2월 일부 국회의원들과 함께 친일파 명단 작성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는데, 외부에서 이번 8.15에도 그런 작업을 광복회가 계속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8.15에는 그런 것 내놓지 않겠습니다. 3.1절에 일부 국회의원들이 16명을 임의로 명단에 추가했는데, 우리는 그런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회원 고령화로 활동이 부진하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외부 사람들의 광복회에 대한 평가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전임 회장 중 81년 작고한 이갑성씨는 일본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이갑성씨 때문에 광복회에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진 분들도 많습니다.
"전임회장 이갑성씨가 독립운동하다가 나중에 친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그의 진면목인지는 모른다." ⓒ2002 오마이뉴스 손병관
"전임회장 이갑성씨가 독립운동하다가 나중에 친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그의 진면목인지는 모른다." ⓒ2002 오마이뉴스 손병관
"광복회는 정신적인 상징 아닙니까? 그러나 이갑성씨가 그런 건 사실이죠. 이갑성씨가 3.1 운동 33인 대표중 한 명으로 독립운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중에 친일한 것도 사실이죠. 친일파 명단에도 들어있고... 하지만 이갑성씨가 회장일 때는 그런 것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고, 당시에는 회장도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지명했었어요. 지금도 선출은 우리가 하지만, 국가보훈처장이 인준을 해줘야 인정이 되는 구조입니다. 이것도 다 고쳐야 하는데, 유신헌법때 만든 거죠."

-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어느 것이 이갑성씨의 진면목일까요?
"공도 있고, 과도 있는데, 어느 것이 많은지 우리는 분간할 수 없죠. 국회의원들이 발표한 친일파 명단 속에 있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죠. 김성수씨도 고려대학교를 만들었고, 나라의 보배다운 인재이지만, 또 친일을 했기에 명단에도 들어갔죠. 이 사람이 친일파냐, 나라의 공로자냐 이런 것은 여러분들 생각에 달린 거죠."

- 이건 가정인데요. 장 회장님과 같이 독립 운동한 동료가 있는데, 이 사람이 광복이 오기 전에 동료를 밀고하는 등 배신 행위를 했어요. 이럴 경우에도 공과론(功過論)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다소 흥분된 어조로) 그건 공과를 따질 게 아니라 죽여야지. 배신자는..."

- 김성수, 김활란 씨도 처음에는 독립운동에 호의적이었다가 일제 말기에 징용, 징병을 독려한 활동이 문제가 되고 있거든요.
"그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징용을 나가라고 한 것은 일본이 배후에서 압력을 넣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해요. 그 사람들 본심이 남의 자식들을 험한 곳으로 보내려고 했을까요?"

- 다른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일제시대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나요?
"(잠시 망설이며) 이건 광복회장이 아닌, 개인의 생각입니다. 그분들이 과거에 독립운동한 공적은 인정해야 합니다. 좌익 인사였기 때문에 독립 운동한 사실을 말살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나라 국시(國是)가 반공이니까 그 사람들은 대한민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반공'이라는 국시를 가지고 있는데, 좌익 활동을 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 반공이 우리나라 국시라고 하셨는데, 통일이 국시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치적 문제 얘기하는 게 별로 좋지 않은데... 그래서 그걸 국회에서 우선 고쳐야 합니다."

- 지금 아시안게임에서 북한국기의 게양과 응원을 받아들여야 하느냐로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반공이 국시인 나라'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나라가 이북에서 태극기 달지 못하면 여기에서도 못하는 게 당연하죠."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부유하게 자라서 나라가 압박 받던 시대를 잘 모른다. 그렇다고 너희들도 고생해봐라 할 수도 없고... 잘 살 수 있는 게 좋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부유하게 자라서 나라가 압박 받던 시대를 잘 모른다. 그렇다고 너희들도 고생해봐라 할 수도 없고... 잘 살 수 있는 게 좋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일제 치하의 민족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얘기를 할 기회는 있습니까?
"요즘 젊은 세대들은 부유한 경제 속에서 자라고 있어서 나라가 압박 받던 시대의 정황을 잘 몰라요. 거기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너희들도 고생해봐라 할 수도 없는 거고... 잘 살 수 있는 게 좋죠. 그러나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가정신은 가르쳐 줘야 해요. 일본은 적은 아니지만, 경계는 해야죠. 일본은 민족성도 그렇고, 언제든지 우리를 침략할 수 있는 민족이라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경계 안 하면 나라가 위험하죠."

- 광복회장으로서의 특별한 바람이 있다면.
"광복회를 이끌어갈 좋은 사람들에게 광복회를 넘겨주는 겁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광복회가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인 이유
친일파 서훈 치탈 논쟁 가열되면 보훈처와 갈등 소지

▲ 이갑성 전 광복회장 (1886-1981)
독립운동가와 그 유족들의 단체인 광복회가 정작 자신들을 억압한 친일파 청산에 앞장서지 못한다는 비판은 오래 전부터 제기돼왔다.

그러나 광복회가 친일파 문제에 소극적인 이유는 구성원들의 개인적 성향보다는 정부에 전적으로 운영자금을 의존해야 하는 구조적인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내외의 지배적인 평가다.

광복회는 1962년 독립유공자 특별보호법이 제정되고 63년 독립유공자 774명에 대한 건국훈장이 수여되면서 독립유공자들과 유족들이 이익단체 설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65년 사단법인으로 출범하게 됐다.

광복회는 이후 국가보훈처(이하 보훈처)로부터 매년 수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아왔고, 독립유공자들과 유족들도 등급에 따라 최하 월 54만원에서 최고 250만원까지 연금을 지급받고 있다.

사실상 보훈처 '산하단체'로 전락한 상황에서 광복회는 기념사업을 하더라도 '순수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주제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감한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할 수가 없었다.

학계에서 친일파로 역사적 평가를 받은 인사들 중 상당수가 역대 정부로부터 훈포장을 받았다는 것도 광복회와 보훈처 사이에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93년 7월 김영삼 정부 초 보훈처가 김성수, 이갑성, 이은상, 윤치영, 서춘, 이종욱, 윤익선, 전협 등 친일 행위자 8인을 서훈 취소 심의대상에 올려놓자 강삼재, 강우혁, 박주천 등 당시 민자당 의원들과 유족들이 "당시 친일행위는 어쩔 수 없었다"고 반발, 정부 방침이 후퇴한 적이 있다.

한 차례 홍역을 치른 보훈처로서는 광복회가 친일파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 서훈 치탈 논쟁을 수면 위로 재부상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는 상황이다.

익명의 독립유공자는 이에 대해 "독립운동가와 유족들이 정부의 연금에만 의존하는 구조로는 올곧은 민족정기를 수호하는 광복회를 기대할 수 없다"며 "재향군인회의 경우 '국가유공자 예우법'에 의해 광복회처럼 정부 지원을 받지만, 자체적인 수익 사업을 벌여 탄탄한 재정 구조를 갖추게 됐다. 재향군인회가 왜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지 광복회 간부들도 되짚어 봐야할 것"이라고 뼈있는 말을 던졌다. / 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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