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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주말 오후 퇴근 시간 1시간 전이면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린다.
"어이, 그래 나야. 잘있었는가? 나 여기 후문이야."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일찍 오셨네요. 그동안 별 일 없으셨지요? 그럼 후문 의자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엄마의 남자친구인 아저씨가 우리 회사로 오시면 나는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퇴근을 한다. 나는 비밀번호로 열 수 있는 현관문을 일부러 벨을 눌러 엄마가 열게 하는데 몸이 부자유스러운 엄마가 문을 열어주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한다.

이곳 용인으로 이사온 지 한달반만에야 예전과 개폐방법이 달라진 현관문을 여는 것에 겨우 익숙해진 엄마가 문 여는 방법을 다시 잊으실까 염려되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치매에 걸린 엄마의 학습능력은 세 살 정도의 수준이라고 하면 될까?

아저씨가 오시는 날이면 아저씨에게 벨을 누르게 하는데 엄마는 모니터로 보이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면 다른 때와는 달리 동작이 빨라져 문을 빨리 여신다. 열린 문 사이로 75살의 할머니가 된 엄마는 쑥스러운 듯 살폿한 미소를 보이며 얼굴을 내밀면 아저씨는 "아이쿠, 당신 이뻐졌네, 잘 있었어?"하며 어머니의 손을 마주잡는다. 견우직녀가 따로 없다.

용인으로 이사온 지난 3월 이후 아저씨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이렇게 열흘만에 우리 집에 오시어 닷새째 되는 날 내가 출근하는 길에 함께 시내로 나와 댁으로 돌아가시기를 반복한다. 예전에 서울 살 때는 매일 아저씨가 우리 집으로 오셨다가 춤도 추러 가시고 이곳 저곳 함께 놀러도 다니시는가 하면 때론 고스톱도 치시다가 저녁때 돌아가시곤 했는데 지금은 너무 멀어 그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7년 전, 엄마가 아저씨를 만난 것은 춤 교습소라는 곳이었다. 말이 교습소이지 실제로는 입장료 천원(이천원인 곳도 있다)에 국수까지 주는 그곳은 여름엔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고 겨울에 따뜻하여 시간은 많고 돈은 없어 갈 곳 없는 노인들이 하루종일 춤도 추고 친구도 만들 수 있는 노인들의 사교장 같은 곳이었다. 노인용 캬바레의 일종이라고나 할까?

지금은 치매와 파킨슨씨병으로 거동도 불편하고 정신도 놓으셨지만 그곳을 다닐 때만 해도 엄마는 매일 나들이를 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매우 활기찬 삶을 사셨다. 엄마는 일찍 혼자 되어 어렵게 우리 형제들을 키우면서 화장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사셨다. 그런 엄마가 일찍 일어나 목욕을 하고 화장을 하시는가 하면, 옷을 사다드려도 아까워 장롱 속에 간직만 하시던 분이 입을 만한 옷이 없다고 투덜거리시면서 화려한 옷들(플레어스커트에 레이스달린 옷)을 사들이기 시작하시는 것이었다.

물론 동네 양품점에서 사는 싼 옷들이기는 했지만 엄마는 레이스 달린 빨간 브라우스에 검정색 플레어 롱스커트를 입고 교습소로 가서 사람들을 만났다. 엄마는 무대에서 지루박이니 트로트 등의 춤을 음악에 맞춰 출 때 롱스커트가 펄럭이며 몸을 휘감는 느낌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그때 그곳에서 엄마는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소위 엄마의 춤선생이었다. 춤을 잘 추셨던 아저씨는 엄마에게 춤을 가르쳤고 엄마는 아저씨와 파트너가 되어 매일 춤교습소에서 데이트를 하며 어린이대공원, 고양꽃박람회 등을 함께 구경다니셨다. 이때는 나도 회사일로 정말 바쁘게 지냈지만 엄마도 하도 바빠 서로에게 신경쓸 시간이 없었다.

처음 우리 집에 아저씨가 놀러오셨을 때 난 다소 실망했다. 엄마의 남자친구가 조금은 멋진 사람이기를 은근히 바랬던 나로서는 작고 왜소하기만 했던 아저씨의 외모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아저씨의 조근조근한 말씨하며 마냥 순하게 생긴 외모, 일찍 혼자 되신 엄마에게 세심한 배려와 관심을 가져주는 것 때문에 아저씨를 무척이나 사랑하셨던 것 같다.

언니들은 엄마에게 이같은 변화가 생기자 무척 싫어하고 반대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소위 춤바람(?)이 난 것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언니들이 낮에 집으로 놀러와도 엄마는 언니들을 집에 남겨두고 아저씨를 만나러 나가는가 하면 가족들이 있는 시간에 아저씨가 놀러오면 가족들보다 아저씨를 더 반겨 언니들의 빈축을 사기까지 했다.

언니들은 아저씨와의 만남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생활이 되어 버린 엄마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급기야 아저씨가 집으로 거의 매일 놀러오시자 언니들은 어머니에 대한 원성으로 친정을 찾는 발길이 뜸해지기까지 하였으나 아저씨에 대한 엄마의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난 이런 반응을 보이는 언니들에게 "운동 따로 안해도 춤 추면서 건강해지고 기분도 좋아지고 건강에도 얼마나 좋은데 왜 그리 난리냐, 더욱이 아저씨 같이 좋은 친구가 있어 얼마나 좋으냐, 엄마는 귀가 어두워 혼자서는 어디 갈 수도 없는데 함께 춤도 추고 놀아주며 이곳 저곳 나들이도 함께 다니면서 자식들이 해 드려야할 즐거움을 대신 해 주시는데 얼마나 고마우냐"고 항변을 해도 언니들은 엄마가 무슨 부정한 짓을 한 것인냥 떨떠름하고 못마땅한 표정들이었다.

가족 나들이를 갈 때면 꼭 언쟁이 붙었는데 난 아저씨를 모시고 가야한다고 하고 언니들은 '안된다. 아저씨가 가시면 안가겠다'로 팽팽히 맞서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엄마를 즐겁게 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내가 이기곤 하였다.

그렇게 몇 년을 엄마와 아저씨는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알콩달콩 만남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2000년 3월 어머니는 쓰러지셨고 이후 정신을 놓으셨다. 병원에서 어머니의 눈은 초점을 잃고 횡설수설하고, 병실을 마구 왔다 갔다하시며 혼잣말로 흉을 보고 욕설을 하고 다니시기까지 했는데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오신 다음부터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으신 듯 하여 혼란의 상태는 사뭇 덜하였다.

이불을 갤 때도 가로, 세로가 반듯하게 개시고, 장롱의 옷가지의 정리 정돈도 항상 반듯하게 하던 분이 아직 축축한 빨래가 다 말랐다고 갠다면서 뚤뚤 뭉쳐놓고, 커피를 탄다고 찬물에 커피와 소금을 마구 휘저어 몇 잔씩을 사방에 흩어놓기도 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옆집 아저씨가 죽어서 그 곡소리 때문에 시끄럽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TV 안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본다며 무서워하기도 하고 드라마의 내용과 현실세계를 혼돈하여 끊임없이 말을 만들어내기도 하여 엄마의 탁월한 말솜씨에 나는 배를 잡고 웃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여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다.

엄마가 그렇게 혼자만의 세계를 넘나드시는 동안 아저씨는 병원에 한번 오셨을 뿐, 퇴원 이후 두어 달 동안 연락이 없었다. 아저씨가 '정신 나간 노인네'가 된 어머니를 잊었으리라는 생각에 "춤추는 곳에서 만난 이들이 뭐 그렇지"라며 애써 그냥 잊으려고 했다.

그러나 엄마가 가끔 정신이 드셔서 아저씨가 오시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해 할 때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저릴 엄마의 가슴앓이가 내 마음마저 아프게 하곤 했다. 그래서 아저씨께 전화를 드려볼까 고민도 했지만 혹시 변심한 아저씨의 속내를 들여다 볼 것이 두려워 그리 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몇 달 후 아저씨에게 전화가 왔다. "어이, 나야. 내가 그 동안 죽다 살아났어. 아파서 꼼짝도 못하고 집에만 있었어. 엄니는 어떠신가?" 정말 고마웠다. 귀가 어두운 엄마가 누군지 몰라 전화에 대고 횡설수설하실까봐 소리를 질렀다. "엄마, 아저씨 전화야, 아저씨. 빨리 받아." 내 애인한테라도 전화가 온 양 기쁜 마음에 엄마에게 전화를 드리자 엄마의 그 환한 웃음이란….

아저씨는 길에서 쓰러지기를 몇 번 하시어 죽을 고비를 넘겨 연락도 못했다는 얘기를 하셨는데 하긴 당시 79세인 아저씨가 돌아가시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지 않나 싶었다.

그 이후 아저씨는 매일 집으로 오시어 거동이 불편해 몇 미터도 제대로 걷지 못해 외출을 할 수 없는 엄마와 함께 식사도 하고 노래방기계로 노래도 부르시고 엄마 약도 챙겨주셨다. 그러다가 아저씨는 우리 집에서도 쓰러져 함께 있던 언니를 기겁을 하게 하였는가 하면 병원에도 입원하기도 했다. 엄마가 병원으로 아저씨 병문안을 가기도 하시면서 이곳 용인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아저씨와 엄마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용인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장 걱정되었던 것이 엄마와 아저씨의 이별이었다. 80되신 노인이 현재 사시는 신내동에서 용인까지 오실 수도 없고 치매에 걸린 지 2년 반이나 되는 어머니가 딱히 벗도 없는 새로운 곳으로 이사 가서 더욱 적적해하실 것을 생각하니 참으로 걱정이 크던 차에 지금과 같이 내가 모시고 갔다 왔다 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언니들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정신을 놓으셨는데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어머니를 챙기시는 아저씨 마음을 아는 듯 적극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이사간 집의 엄마방을 정말 예쁘게 꾸며드리고 싶었다. 침대며 문갑이며 침대커버며, 커튼 등을 신혼방처럼 예쁘게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가 이 좋은 세상에 지금까지 사셨으면 얼마나 좋았겠냐"하여 순간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저씨가 엄마에게 맘 변하지 않고 잘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아저씨의 건강이 더욱 염려되고 아저씨에게도 무엇이든 하나라도 더 해드려야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사위가 딸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는 친정부모의 마음이 이럴까 싶다.

엄마도 여자라는 것을 우린 너무 쉽게 잊는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엄마는 모든 것을 다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엄마로서 아내로서 그리고 한 여성으로서 희생이 아닌 행복으로서 그 삶을 살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아마 그런 행복으로의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들에게는 '한'이나 '울화병'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울화병'과 '한'이 결국 사람을 정신적으로 병들게 만드는데 우리가 나이들어 이것이 심해져 나타나는 것이 바로 치매가 아닌가 싶다.

치매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병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엄마의 지금의 모습이 너무 예쁘다. 나에게 어린아이로 돌아오신 우리 엄마. 나의 고약함이 조금 덜 해져서인지, 아니면 이곳 저곳에서 알음알음으로 구해온 약 덕분인지 엄마는 치매가 온 지 2년반이 되었지만 몸져 눕거나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거나 욕을 한다거나 하는 일이 아직은 없다. 난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하다. 잠시라도 엄마가 귀찮아지는 마음이 생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운 일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부모가 치매에 걸렸다면 모두 쉬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초기 대응을 잘 못하여 병을 더욱 악화시키는 일도 생기지요. 엄마의 치매 일기를 쓰면서 나와 똑같은 상황을 겪는 다른 이들에게 서로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노인의 문제를 우리 모두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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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누구나 기자가 될 수 있다는 오마이뉴스의 정신에 공감하여 시민 기자로 가입하였으며 이 사회에서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을 글로 고발함으로써 이 사회가 평등한 사회가 되는 날을 앞당기는 역할을 작게나마 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문제, 노인문제등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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