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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 앞 온고당> 02) 335-4414 / 322-9313

몇 달 앞서 실천문학사에서 책과 함께 팔던 체 게바라 티를 팔천 원 주고 샀지요. 사랑이 몫까지 두 벌을 샀는데 제 옷에만 문제가 있는지 몰라도 제 옷은 한 번 빤 뒤에 보풀이 일고 실밥이 터져서 옷 아래쪽에 풀어진 실이 대롱대롱 매달립니다. 한 달이 조금 지났을까? 그 때엔 목덜미 앞쪽엔 구멍까지 났습니다. 출판사 사무실까지 가서 산 정품인데도 이렇게 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까닭은 무언지.

홍대 정문에서 신촌쪽으로 가는 길목에 헌책방 <온고당>이 넓직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헌책방 문화가 얕은 우리 나라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 헌책방이죠. 윗층에는 일반 책들과 잡지, 아래층에는 미술-예술-건축과 잡지를 다루는 <온고당-글벗>이지요. 지난 날엔 `글벗헌책가게'였는데 지금은 으레 위아래를 모두 `온고당'이라고만 합니다. 주인 아저씨가 `글벗'이란 이름보다 `온고당'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하고 마음에 들어해서 `온고당'을 크게 내걸고 있죠.

아래층 아저씨는 고단한 일이 있는지 졸음이 쏟아져 고생을 합니다. 위층은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들여다보거나 들어오기도 하며 드나드는 사람이 많아 참 바쁩니다-그러나 그렇게 바쁜 만큼 드나드는 사람이 모두 책을 사는 건 아닙니다.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도 많지요-. 아래층에서 <신영훈-한옥의 조영(造營)(1987)>이라는 드문 책과 학고재에서 펴낸 현대목판화가 작품모음 <갈아엎는 땅(1991)>과 1954년판 문세영 국어사전을 사느라 주머니가 후줄근했습니다. 그래서 위층에서는 <뿌리깊은 나무> 1977년 삼월호만 하나 샀지요.

우리 나라에 책다운 책이 있는가

앞에서 체 게바라 티를 잠깐 얘기했지만 팔천 원이면 그야말로 괜찮은 티 하나를 살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러나 그 돈을 주면서도 질이 형편없는 옷을 입어야 했지요. 그 옷을 만든 사람들 자기도 입는다고 생각했으면 질 낮은 옷감으로 만들어 비싼 값에 팔았을까요.

헌책방으로 흘러들어온 책이든 새책방에 있는 책이든 우리 나라 많은 책들 가운데는 책이라고 하기 어려운 종이뭉치들이 많이 있습니다. 옷 같지 않은 옷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형편없고 모자라게 옷을 만들어서 이름만 붙여서 파는 사람이 있듯 책도 형편없고 모자란 책이 많지요. 여기에 여러 정치 속셈이나 상술을 곁들여서 파는 책들도 있고요. 한자를 함께 쓰자는 몇몇 시대에 뒤떨어진 정치인들 주장이 나오기 무섭게 신문광고를 도배한 책 광고는 다름 아닌 아이들에게 한자교재를 팔아먹는 출판사였습니다. 영어가 돈벌이가 잘 되니 하나 같이 다 똑같은 줄거리로 영어교재를 만들고 신문사도 영어능력시험을 만들고 문제집을 팔아먹고 있지요.

쓸 만한 책이 그다지 많지 않은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헌책방에서 쓸 만한 책을 많이 갖추고 깨끗하게 손질해서 갖췄다 하면 그만큼 손품 발품을 많이 팔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헌책방에 책이 없다기보다 제대로 된 책을 만들지 못하는 우리 책 문화 현실이니까요.

헌책은 터무니없이 싸야만 하는가

책도 책이지만 헌책방에서는 또 다른 일로 헌책방 임자와 책손님 사이에 실랑이가 있기도 합니다. 바로 `책값'. 새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사는 책은 같습니다. 헌책방에 있어도 내다 판 사람이 한 번도 보지 않은 새 책이기도 하고 여러 번 보았으나 아주 깨끗하게 본 책도 있지요. 새책방에서 사는 책 가운데 헌책방에 있는 `헌 책'보다도 낡고 손때가 많이 묻은 책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헌책방에서 매겨파는 책값이란 책을 즐겨 보는 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싼 값'이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 분위기가 뭐든지 싸게만 사려 하는 데로 휩쓸리는 바람과 맞물려 헌책방에 있는 `헌 책'이라면 무조건 종이뭉치값과 다를 바 없이 싸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요. 글쎄.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러나 좋은 책을 종이뭉치와 같은 값으로 사서 종이뭉치가 아닌 소중하고 귀한 값어치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책을 제대로 읽는 일도 중요하지만 책을 살 때 얼마나 마음가짐이 깔끔하고 아름다운지도 문제지요.

<온고당>에서는 이듬 해부터는 교과서를 아예 안 다룬다고 자주 얘기합니다. 교과서를 사러 온 아주머니 극성 탓이죠. 교과서를 잘못해서 잃어버린 이들은 교과서를 다시 못 삽니다. 새책방에서 가끔 사기도 하지만 때가 지나면 새책방은 모두 갈무리(정리)하기 마련이고 교과서는 한정 부수만 찍기에 금세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인천 헌책방거리인 금창동-금곡동과 창영동을 이렇게 가리킵니다-에서는 교과서를 복사해서도 팝니다. 재고가 `0'이니 원본 하나를 주문받아서 계속 복사해서 파는 거죠. 그래서 교과서값이 퍽 비싸요. 서울 청계천에서는 1000원에 판다고 하며 <온고당>에 와서 1500원 받거나 2000원 받는다 하면 왜 이리 비싸냐고 하는 이들이 많답니다. 그러나 헌책방에서도 교과서를 갖추려고 들인 발품이나, 없는 물건을 비싼 값에 떼와서 갖춰서 인건비나 겨우 붙여서 파는 값을 비싸다고 하면 문제가 있죠.

오천 원이나 만 원 주고도 사기 어려운 형편인데도 실랑이를 벌이며 무조건 싸야 한다고 말하는 책손님이나 1000원을 갖고 책손님이라고도 할 수 없는 교과서 사는 아주머니하고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헌책방 임자들 처지가 참으로 안스럽습니다. 1000원 때문에 그렇게 비굴해야 하며 그렇게 욕을 들어야 한다면 아주머니들이 교과서가 없어서 난리를 치든 말든 신경 안 쓰고 마음 홀가분하게 교과서는 안 다룬다고 `선언'을 할 수밖에요.

헌책방에 있는 책들 가운데 새책방에서도 파는 책이 없을 수 없지만 푼수로 따지면 절판되거나 철지나서 더는 안 파는 책들이 거의 모두입니다. 그렇다면 새책방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고 귀한 책이 헌책 가운데 많이 있다는 뜻인데 그렇게 귀한 책을 산다면 그만한 댓가를 치러야 정상이라고 봅니다.

모르지요. 세상이 하 수상해서 뭐든지 싸게 사야 하고 물가는 올라도 헌책방 책값은 열 해, 스무 해 앞선 때와 똑같아야 한다는 둥, 이십 해 앞선 때 책에 매긴 책값으로 헌책방에서 책을 팔아야 한다고 억지 쓰는 사람이 있는 건지.

종이뭉치를 책으로 만드는 헌책방

헌책방에서 사는 책은 요새 책이라면 그야말로 한두 권 즈음 빼고는 새 책 한 권 살 값에 헌 책 세 권을 삽니다. 절판되었으나 찾는 사람이 많은 책이라면 아주 어쩌다가 한 번씩 제값보다 더 나가는 모습도 보지요. 90년대에 나온 책 가운데 이런 대접을 받는 책은 <신영복-엽서, 너른마당>와 <김기찬-골목 안 풍경, 열화당>을 비롯한 두어 가지뿐이죠. 그리고 헌책방에서 사는 책들이 나날이 새책방에 있는 책과 다를 바 거의 없이 상태가 깨끗함을 생각한다면 헌책방에서 요새 책을 건졌다 하는 일은 아주 운이 좋은 일이며 복에 겨운 일입니다. 만오천 원 주고 살 책을 헌책방에서 오천 원 주고 샀다고 생각해 봅시다. 무려 만 원이나 이득을 본 셈이지요. 그런데 헌책방에 오는 많은 사람들은 만오천 원이나 나가는 책을 오천 원에 사는 일을 껄끄럽게 생각합니다. 헌 책인데 왜 이렇게 비싸게 받느냐는 거지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으레 더 많이 배운 대학생들이나 글쓰며 먹고 살아가는 먹물들입니다. 셈이 밝으니까요. 그런데 그네들은 자기 앞가림하는 셈에만 밝고 다 함께 살아가는 함께살기에는 셈이 어둡답니다. 책을 사오는 사람 생각도 못하고, 책을 사와서 깨끗하게 먼지와 때를 닦아내는 사람 생각도 못할 뿐더러, 팔릴 때까지 책장에 꽂아두고 먼지가 앉지 않게 먼지떨이로 털어가며 비싼 가게 임대료를 내고, 가게 임자도 자기 먹고살 벌이와 아이들 키울 학비를 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죠.

<온고당> 위층 형은 "겨울엔 책에 묻은 먼지를 닦느라 시커매진 때를 벗기는 목욕탕비도 안 나온다"고 말합니다. 추운 겨울에 젖은 걸레로 한 번 닦고 마른 걸레로 다시 헌 책을 닦아 깨끗하게 하는 보람을 생각한다면 헌책값이 왜 이리 비싸냐는 말을 못 하겠지요.

책을 읽을 생각인가 책만 살 생각인가

헌책방이든 새책방이든 책을 사러 가는 까닭은 자신에게 모자란 구석을 채우고 배우려고 책을 사는 거겠죠. 그렇다면 책을 사서 읽으면서도 배우겠으나 책을 사는 사이에도 배워야 합니다. 책방에 가는 몸가짐과 마음가짐, 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품새, 자기가 찾는 책이 아니라 해서 헐하게 다루거나 옆에 쌓인 책을 신으로 밟고 올라서서 꼭대기에 있는 책을 꺼내거나 책방 임자가 책 위에 앉으라 하지 않는데도 그냥 책을 엉덩이로 깔고 앉는 일들. 머리통으로 제 아무리 책 속 좋은 내용을 배우고 읽고 깨우쳐도 삶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다면 책을 만 권 읽어도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책은 제 값을 다 치르고 사야 합니다. 그리고 산 책은 알뜰히 읽어야겠고 읽은 이야기를 실천해야 합니다. 야구에서 `공-수-주' 세 박자를 맞추라 한다면 책읽기는 `제값 치르기-알뜰히 읽기-읽고 실천하기' 세 박자를 잘 갖춰야겠죠.

헌책방도 시나브로 젊은 사람들이 책방 살림을 꾸리면서 많이 달라져가고 책들도 책방 임자분들이 정성껏 먼지와 때를 닦아내고 책방도 좀 더 깨끗하고 밝고 널찍하게 갖추려 애씁니다. 책방 임자들은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책방을 찾는 책손님들은 예나 지금이나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냐' 하며 책값 깍기 맛만 들고 책을 소중히 다루는 몸가짐을 들이지 않고, 읽은 책 이야기를 실천하지 않는 지금 현실을 떨쳐내고 좀 더 아름다운 책손님으로 거듭날 줄 알아야겠습니다. 책방은 달라지는데 책을 읽는 사람은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 참 우스운 모습이겠죠.

덧붙이는 글 | - 최종규 기자가 내는 헌책방 소식지 <헌책사랑>을 받고싶은 분은 인터넷편지로 연락해 주세요. http://pen.nownuri.net 에 가셔도 헌책방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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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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