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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삿짐을 꾸리고 있습니다. 상자에 책을 넣으려 했으나 상자수가 턱없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끈으로 책을 묶습니다. 천천히 쉬엄쉬엄 묶습니다. 이미 이삿짐을 싸 보기도 했고 출판사에서 일하며 여러 모로 만날 하던 일이기도 해서 손에 익어 책을 끈으로 묶는 일은 어렵지 않죠. 하지만 끈으로 책을 묶으면 책들을 꽉 조여야 하니 책들이 다칠 테고 책들이 아파할 테니 참 미안하답니다.

사흘째 천천히 책을 끈으로 묶고 있는데 오늘 벌써 손이 따갑습니다. 손바닥에 두루 걸쳐 물집이나 굳은살이 배길 듯합니다. 한 목에 퍽 많은 책을 끈으로 묶을 때마다 늘 손바닥이 따갑죠. 이럴 때마다 헌책방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손이 어떨까 하고 생각합니다. 헌책방에 가서 주인분들 손을 한 번 물끄러미 살펴보세요. 울퉁불퉁 밉상이 되어버리지 않은 손이 없으니까요. 늘 먼지와 더께 쌓인 책들을 만지고 끈으로 묶고 나르고 닦다 보니 헌책방 주인분들 손은 시커멓기 일쑤고 굳은살로 딱딱해서 바늘로 찔러도 안 아프리란 생각마저 든답니다.

그제는 외대 언저리에 있는 <신고서점>에 갔습니다. 이삿짐을 싸고 있기에 책을 더 사거나 보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이제 곧 이문동이란 동네를 떠나갈 테니 떠나기 앞서 마지막 인사를 드릴 셈으로 찾아갔습니다. 지난 여름에 댁으로 한 번 놀러와서 집에 있는 책 좀 구경해 보라고 그러셨는데 여름도 가고 가을을 맞이하고 저도 집을 옮겨가니 끝내 구경을 못해 보고 가는군요.

주말에 떠난다니 아주머니와 아저씨 모두 섭섭해 합니다. 95년부터 이문동에 살면서 참 자주 찾아가기도 했으니 정든 곳을 떠나기는 어렵지만 스스로도 거듭나고 좀 더 많은 일을 하려면 떠날 수밖에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어느 중학생 아이가 와서 참고서를 바꿔 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아저씨는 "이 녀석아, 1학기 때 걸 지금 가져와서 바꿔달라면 어떡해" 하며 나무랍니다. 그러니까 1학기 때 헌책방에 와서 산 참고서를 이제 다 보았으니 2학기 것으로 바꾸어달라 했으니 어이없을 수밖에요.

훗. 헌책방에 오는 책손님들이 - 저도 같은 책손님이지만 - 책방 임자분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끔 우습거나 어이없는 일들도 겪고 봅니다. 이런 실랑이도 조금 어이없는 일이죠. 글쎄, 겨울옷을 겨울 동안 잘 입었다고 봄이 되니 더는 입을 쓸모가 없으니 여름옷으로 바꾸어달라 하면 옷가게 사람이 바꾸어 줄까요?

헌책방을 찾는 이들 가운데 이처럼 작은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어이없거나 작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헌책방을 찾아온다고도 할 수 있겠죠. `어쩌면 이걸 받아줄지도 몰라' `이러저러하게 얘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하면서 실제로는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꺼내 보는 건 아닐까요. (그러나 당연히 안 되는 일이니) 가끔씩 서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그럴 때면 으레 어이없는 말을 꺼냈던 책손님이 지레 뿔을 돋우며 식식거리며 나가기 일쑤죠.

중학생 아이는 "예" 하며 그냥 나갔습니다. 철이 없어서 물어 보았을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를 가르치는 학교 스승이나 집안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책'이란 물건이 어떠한 물건임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흔적을 봅니다. 그리고 남과 더불어 사는 삶을 생각하도록 가르치고 어른들이 스스로 모범이 되어 살았다면 그 아이가 자기가 본 낡은 책을 새 걸로 바꾸어달라 하는 일은 하지 않았겠죠. 이 나라와 이 사회는 이렇게 상식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1988년에 나온 청소년무크 <이 땅의 아이들과 함께, 미래사>를 하나 건졌습니다. 1980년대에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이들 삶을 알뜰살뜰 꾸리려 애쓴 사람들이 펴낸 책들이 참 많이 나왔죠. <이 땅의 아이들과 함께>도 그러한 책들 가운데 하나일 텐데 이 책도 `창간호' 한 번만 내고 더는 못 내지 않았을까 모르겠습니다.

퍽 많은 책들이 이때에 무크지로 나왔지만 창간호 고비를 끝으로 막내린 잡지가 많습니다. 창비, 풀빛, 지식산업사, 인간사 들에서 아이들을 생각하고 아이들이 손수 참여하는 잡지를 무크로 만들었으나 거의 모두 창간호 한 번으로 끝났습니다. 푸른나무에서 펴낸 <푸른나무> 무크가 다섯 번까지 낸 게 가장 오래 갔다고 할 수 있겠고 시인 윤중호씨가 펴낸 잡지 <세상의 꿈>이 거의 이태 동안 버틴 것도 오래 간 잡지라 할 수 있을 테고요.

어느 장서가 책장에서 나온 듯한 최상수씨 전통문화연구 책자가 다섯 권 즈음 보이네요. 그 가운데 <한국부채의 연구(1981)>와 <한국의 씨름과 그네의 연구(1974)> 두 권을 골랐습니다. 헌책방에 `지은이가 증정한 책'들이 뭉텅이로 나올 때는 의심스러운 때가 잦습니다. 곧 `이 책들을 받은 이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돌아가셨을 때' 남은 식구들이 헌책방에 내다파는(처분하는) 수가 잦거든요. 가보로 물릴 수도 있고 좀 비싼 값에 팔거나 도서관에 기증할 수도 있으나 웬만한 책이 아니면 좋은 값을 받기도 어렵고 기증하기도 쉽잖고 책은 책대로 많을 테니 그 먼지구덩이에서 벗어나고자 처분하는 수가 잦거든요. 이런 책들을 만나면 먼저 책을 `증정받은 사람'에게 묵념을 한 번 드립니다.

대원사에서 나온 "빛깔있는 책들" 가운데 두 권 <장석과 자물쇠(1993)>와 <북한산성(1994)>를 집었습니다. 보름 앞서 왔을 때는 없었는데 제가 운좋게 이 책을 가져가는 임자가 되었네요. 헌책방에서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은 인기가 아주 좋답니다. 문고판 틀로 나왔기에 책값이 책질과 사진과 알맹이로 헤아려 보아도 아주 싼 편이지만 권수가 워낙 많이 나왔기에 사람들이 이 녀석들을 많이 사서 보기엔 어렵거든요. 그러다 보니 헌책방에서 "빛깔있는 책들"을 만나면 거의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고 할 만큼 집어갑니다. 그만큼 잘 만든 책이니 새 책으로도 인기가 좋고 헌 책에서도 인기가 참 좋답니다. 책이라면 바로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보여 준다고 할까요? 열화당에서 펴냈던 <한국의 굿>이나 뿌리깊은 나무에서 펴낸 <민중자서전>처럼 "빛깔있는 책들"은 좋은 책으로 손꼽히고 헌책방에서는 들어오기가 무섭게 - 늦어도 사흘 안에 - 팔려나가는 책이랍니다.

어제 문화방송사에 가서 라디오 풀그림 녹음을 했습니다. 가을을 맞이해서 책 이야기를 준비하다가 헌책방 얘기 좀 한 번 해 보라고 해서 선뜻 나가서 이야기를 하고 왔는데 라디오 녹음을 맡은 피디분이 외대 출신이더군요. 그런데 그 분은 외대 앞에 헌책방이 있는 줄 몰랐다고 합니다. 사실 외대생들도 외대 앞에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학교를 마치기 일쑤입니다.

<신고서점>은 외대에서 드림랜드로 가는 언덕길 - 경희대 맞은편길 - 로 가면 보이는 구름다리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스무 해 넘게 헌책방을 했지만 칠십년대 후반, 팔십년대 학번들도 헌책방이 있은 줄 모를 뿐더러 구십년대 학번은 더 더욱 모르지요.

해가 갈수록 책을 보는 사람도 줄고 헌책방을 찾아갈 만큼 책을 찾아서 읽으려는 사람들 발길도 줄기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은 다른 대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대학교 언저리에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은 아주 복된 일입니다.

그만큼 주머니가 가볍다고 할 만한 대학생들이 좀 더 많은 책을 사 읽을 수 있다는 좋은 환경이니 대학교와 학보사나 총학쪽에서 이러한 문화사업에도 눈길을 돌려 학생들이 스스로 헌책방에도 찾아가며 책을 널리 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겠습니다. 외대생도 아닌 사람이 외국어대학교 앞에 까지 가서 책을 사서 보는데 외대생들은 정작 헌책방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학교를 마친다면 참으로 우습겠죠?

덧붙이는 글 | [외대 앞 신고서점] 02) 960-6423 / 016-236-6423 /
                    http://myhome.netsgo.com/bubdha
 
* 국철(1호선)로 외대앞역에서 내려서 외대정문으로 간 뒤 길 건너 오른편으로 곧바로 올라가면 책방에 이릅니다. 버스로는 외대정문까지는 134번이 있고 책방 앞까지 가는 버스로는 38,48,6-1번 들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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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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