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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동학)에서는 이미 봉황각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을 밝히고 있다.
▲ 봉황각 입구 천도교(동학)에서는 이미 봉황각이 3·1운동의 발상지임을 밝히고 있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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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 박인호 선생의 장례는 비교적 조용히 치러졌다. 연고도 없는 경기도 포천시 소월읍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뒤늦은 1990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09년 천안 독립기념관에 건립된 애국지사 어록비에는 고인의 '멸왜기도'에 관한 한 구절이 새겨졌다. 

 개 같은
 왜적놈들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간에 멸하고저
 대보단에 맹서하고
 한의 원수까지 갚아
 독립 달성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서 발표된 수많은 격문·시문·성명·성토문 중에서 이만큼 간결하면서도 큰 함의가 담긴 어록은 많지 않을 것이다.

춘암 박인호 선생은 업적에 비해 연구가 덜 되고, 그러다보니 일반에는 다소 생소한 선열이다. 1990년에야 서훈이 있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생산된 기록물이 2023년 5월 18일 제216차 유엔산하 유네스코 집행이사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동학에 대해 국제적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춘암 선생은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이고, 3.1혁명의 민족대표 48인이며, 총독부에 맞서 민족종교 천도교를 지켜온 종교지도자이다. 이제라도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과거의 동학이 민생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살아 있는' 동학이었다면, 현재의 동학은 그 규모로나 활동량의 측면에서 거의 '사라져가는' 동학이다. 서너 집 건너 한 집 꼴이던 당시 동학도의 수는 이젠 거의 그 흔적만 남은 듯하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살아있는' 동학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민생 개혁의 선도 역할을 했기 때문이고, '사라져가는' 이유는 화석화된 과거의 관습에 천착하는 경향성을 다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학정신에는 여전히 불평등에 대한 저항이라는 강력한 DNA가 웅크리고 있다. 그리고 1% 및 99% 사이의 불평등 문제가 최대의 화두인 오늘날, 동학은 우리 공동체 구성원과 세계시민 모두에게 '우리 모두는, 그리고 우리 인간을 비롯한 세상 만물은 모두 평등하다'라는 그야말로 가장 동학적인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주석 1)

춘암 박인호 선생의 유해는 여전히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포천에 묻힌 채 그대로이며, 변변한 기념관이나 기념사업회도 없는 실정이다. 그는 인간적으로도 대단히 폭이 넓고 신앙심이 도타웠다. 의암의 소견이다.  

도통을 넘긴 의암 손병희는 평소에도 "춘암 대도주는 생각하는 것은 나만 못하지만, 대도를 지키는 데는 내가 춘암만 못하다. 춘암은 밤에 만져 보아도 도(道) 덩어리이다"라고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니까 창업보다 더욱 힘든 것이 수성이라고 춘암은 언제나 참에 살면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를 실천함으로써 엄혹한 시절을 버티면서 동학·천도교를 지켜낸 인물이다. 단 한 치라도 거짓된 삶이라면 그는 곧 죽음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철저하게 지켜온 시대의 어른이자 지도자였다. (주석 2)

춘암 박인호는 평생을 동학과 천도교의 역사와 함께한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동학의 이념에 끌려 동학에 입도하고 반봉건과 반외세를 위해 투쟁하였다. 박인호는 동학혁명 이후 붕괴된 동학교단을 다시 일으켜 세워 300만 교도를 만들고 나아가 천도교가 민족운동의 구심점이 될 수 있게 한 결정적 공헌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교단이 분열되는 위기에 교조로서의 기득권을 고집해 교단이 황폐화되는 것을 막았으며 민족운동에 있어서도 천도교라는 특정 종교에 매몰되어 유아독전적 운동노선을 고집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대의를 위해서는 자신을 한없이 낮출 줄 아는 진정한 민족 지도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주석 3)
 
멀리 삼각산 백운대를 뒤로 하고 서 있는 봉황각. 당시에는 아마도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독립의지를 교육하는 곳이었으니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중에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봉황각 멀리 삼각산 백운대를 뒤로 하고 서 있는 봉황각. 당시에는 아마도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독립의지를 교육하는 곳이었으니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중에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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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왜기도운동은 교인들의 정신적인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식고문을 아침, 저녁을 먹을 때 마다 시행하는 계획과 구파의 국권회복의 기회에 대비하여 활동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특별희사금모집 계획, 끝으로 일본을 소멸하여 독립을 기원하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멸왜 기도문으로 특별기도를 실시하는 세 가지 계획으로 진행되었다. 이 운동은 박인호의 지시에 의해 황해도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시행되었다. 멸왜기도운동은 가장 종교적인 민족운동의 하나로서 매우 높은 정신사적 의의를 갖는다. 같은 시기에 천도교 신파가 친일협력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과 대조되어 박인호가 참여하였던 동학농민전쟁과 3.1운동의 맥락과 이어지는 구국운동으로서, 천도교 정신사뿐 아니라 민족운동사에도 큰 의의를 갖는 운동이었다. (주석 4)


주석
1> 임상옥, <동학연구의 확장성 제고>, <동학학보>, 2023. 9. 324~325쪽, 동학학회.
2> 임형진, <간행사>, 앞의 책, 11~12쪽. 
3> 임형진, <192년대 천도교의 민족운동과 박인호>, 앞의 책, 212~213쪽.
4> 정을경, <일제강점기 박인호의 천도교활동과 민족운동>(석사학위 논문), 29~3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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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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