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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 박인호 어록비
 춘암 박인호 어록비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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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암(春菴) 박인호(朴寅浩, 1855~1940) 선생은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독립지사이고, 동학·천도교의 제4대 대도주를 역임한 종교지도자이다. 앞선 이들의 그림자가 너무 크거나 짙으면 뒤를 잇는 이는 그만큼 작아보이거나 옅여지는 것은 자연현상일 뿐 아니라 사회현상이기도 하다. 

기미년 3.1혁명 당시 천도교내의 위상이나 그간의 공적으로 보아 민족대표 33인(천도교측은 15인)에 포함되어야 함에도 제외된 것은 민족종교 천도교를 지켜달라는 의암 손병희 성사의 요청때문이었다. 3.1거사가 일제의 치안유지법에는, 내란죄의 우두머리를 사형·무기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었기에, 춘암은 살아남아서 천도교의 교통을 유지하라는 교시였다.

이것은 수운 최제우 교조 이래 동학의 전통이었다. 수운이 좌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감영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방에서 포교 중이던 해월 최시형이 옥바라지 비용을 모으는 등 대책을 마련할 때 "해월이 지금 성중(城中)에 있는가. 머지않아 잡으러 갈 것이니 내 말을 전하여 '고비원주(高飛遠走)'하게 하라. 만일 잡히면 매우 위태롭게 될 것이다."고 연통하였다. 자신은 비록 참수되더라도 후계자를 살려 동학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었다. 

해월이 수운의 뜻에 따라 피신하면서 동학의 도통을 지키고 경전을 펴내는 등 큰 역할을 하였듯이, 춘암도 다르지 않았다. 일제가 대한제국의 국권침탈이라는 미증유의 국난기였다. 

동학→천도교 역사상 어느 때라고 평온한 시기가 없었지만, 춘암이 도통을 물려받은 시기는 과거 수난기의 상황과 다르지 않았다. 

알제리아 출신의 프랑스 제8대학 교수 자크 랑시에르는 "셈해 지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주목하였다. 역할은 주역에 못지 않는데, 사람들은 주역 몇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는 대부분 잊히거나 셈해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 3.1혁명기 '민족대표'들도 그렇고 다수의 독립운동가도 마찬가지다. 

춘암 선생은 의암 성사로부터 뒷일을 맡으라는 배려에도 불구하고 3.1혁명 후 일제에 피체되어 총독부 경무국을 거쳐 서대문감옥에서 갖은 고문과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1년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민족대표 33인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풀려난 춘암에게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두 가지 과제가 안겨졌다. 하나는 제4대 교주로서 천도교를 지키고 교세를 확장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대표 48인'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회복하는 책무였다. 둘 다 소홀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춘암은 평정심을 잃지 않고 치밀하고 치열하게 대처하였다. 일제는 조선근세사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과 1919년 3.1독립혁명의 뿌리에 동학이 존재함을 꿰고 있었다. 동학혁명 당시 무라타소총 등 현대식 병기로 25~30만 명을 학살한 것이나, 3.1혁명 당시 비무장시위의 한국인 7,509명을 죽이고 15,961명의 부상, 피검자는 46,948명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을 지낸 김승학이 해방 후 귀국하여 펴낸 <한국독립사>는 일제의 천도교 탄압 실상을 이렇게 기록했다. 

왜적은 천도교를 소위 유사종교단체라 하여 종교로 인정치 아니하고 항상 경관을 파견하여 중앙총부와 각지 교구를 감시하였고, 매월 재산상황을 보고케 하는 등 구속과 제압이 날로 심하였으며 사소한 일에도 징역을 가하고 주요 간부의 일거일동을 모조리 정찰하여 교인의 자유를 속박하고 일상 출입에도 속박을 받아 노예와 가축의 대우였다.

교인과 비교인 간에 소송이 제기되면 사안의 곡직을 불문하고 교인을 패소케 하였으며 일요일의 집회강연 등에는 헌병순사를 파견하였고 그 강연 내용이 정치와 하등의 관계가 없더라도 의례히 가두심문하여 자유를 허치 않았다. 3교주의 수도(受道) 기념일인 천일(天日) 지일(地日) 인일(人日)의 기념식에는 특히 경계와 감시를 엄중히 하여 교서출판·월보발행을 정지시키며 강습소를 폐쇄시켰다. (주석 1)

천도교는 3.1혁명을 준비하면서 후속적인 대책을 마련하였다. 민족대표들이 구속되고, 독립선언 시위가 일회성으로 끝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였다. 당시 조선에는 언론매체가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뿐이었다. 이런 신문이 민족운동을 제대로 보도를 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춘암을 중심으로 이종일 등이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발행하여 3.1혁명의 소식을 널리 국민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도록 하였다.

보성사 사장을 맡고 있으면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인쇄한 이종일은 자신이 발행인이 되어 <조선독립신문>을 발행코자 했다.

"그러나 독립선언 후 일제에게 체포될 각오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피고인 되는 사람이 자신이 포함되는 기사를 싣는 신문의 사장이 되는 것은 모순이 된다고 하여 대신 박인호의 의사를 좇아 윤익선이 사장이 되었다." (주석 2)

<조선독립신문>은 사장 윤익선이 구속되고 발행인이 바뀌면서, 그리고 판형과 발행처를 바꿔 가면서 계속 발행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춘암 선생의 내밀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1혁명 이듬해(1920년)에 미국인들에게 3.1혁명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歐美)지역 한국위원회 위원인 정한경(鄭翰景)이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영문으로 쓴 <한국의 사정>(The Case of Korea)에 <조선독립신문>에 대해 기술하였다.

3, 4, 5월 동안 일간지로 나왔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간행되고 있는 이 신문은 제작 면에서 퍽 낭만적이고 대담한 면이 있었다. 이 신문은 등사기로 찍어냈는데 제작진은 감시의 눈을 교묘히 피하면서 신문을 계속 찍어내서 그에 얽힌 얘기는 탐정소설이 되고도 남았다.

체포되어 가거나 군인들에게 얻어맞아 활동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 즉시 그 사람 몫의 일을 했다. 이 신문은 동굴이나 어부의 배안에서도 찍었으며 심지어 교회에 인조무덤을 만들고 그 속에서 찍어내기도 했다. 보급망도 아주 잘 정비되었으므로 전국 각처에 뿌려져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들과 일본인들도 받아볼 수 있었다.

총독은 매일 아침 자기 책상 위에서 이 신문 2장씩을 발견했다. 일본인들은 완전히 당황했다. 외딴 초소에 근무하는 경찰관들은 초소의 의자에서 이 신문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간수들은 각 감장에 이 신문이 배포되었음을 뒤늦게 알곤 했다.

신문을 배부하다가 수백 명이 체포되고 발행 문제와 관련된 혐의로 더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들 중엔 편집자들도 많았지만 그 신문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발행되었다. 이 신문 발행을 주관한 일단의 사람들을 완전히 체포했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들을 담당한 검사의 책상 위에 그 신문이 또다시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주석 3)


주석
1> 김승학, <한국독립사> 133쪽, 통일사, 1965
2> 윤병석, <1910년대 일제의 언론정책과 '독립신문' 류>, <한국근대언론과 민족운동>
3> <한국의 사정>, <3.1운동> 42쪽, 국가보훈처, 199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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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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