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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전봉준과 동학농민운동. 광화문광장 동북쪽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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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봉기의 열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충청도 보은에서 동학도인들이 귀향할 무렵 호남의 도인과 농민 1만여 명이 전라도 금구현 수류면 원평리에서 별도의 집회를 열었다. 동학도 전봉준·서장옥·황하일 등이 주도하여 한양 진격 문제를 논의하던 중에 보은집회의 해산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선 제일의 쌀농사지대인 고부 지방에서는 개항 뒤 쌀 수출이 늘어나면서 지주들이 소작농민들을 더욱 수탈했다. 또 이곳에는 조선 후기부터 왕실 소유의 토지인 궁방전이 몰려 있어 이를 관리하는 감관의 농간으로 농민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조세 운반을 맡은 전운사 조필영이나 균전을 경영하려고 중앙에서 파견된 균전사 등도 제멋대로 세금을 거두어 정부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을 부추겼다.

조선후기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리면서 관리들은 돈을 주고 산 감투이니 본전을 뽑고 챙기려는 탐욕행위가 거칠 것이 없었다. 부농은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견디다 못해 농민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났다. 역사에서는 이를 민란이라 부른다. 생존권 투쟁이었다. 

어느지역보다 가장 큰 불만이 감돌고 있던 곳은 전라도 곡창지대였다. 예로부터 호남곡창지대에는 부농이 많이 살고 있었으므로 여기에는 갖은 명목으로 세금을 받아가고 백성들에게 죄를 씌워 재물을 빼앗아 자기 몫을 삼는 관리들의 탐학이 극심하였다. 이때에 관기가 더욱 해이된 데다 민씨 척족 세도를 배경으로 한 매관매직이 성행했으니, 이곳의 방백수령들은 오는 사람마다 여기서 한 밑천을 뽑아 챙기려고 광분하였다. 이에 당하는 것은 힘없는 농민들이었다. 더구나 이곳에 동학이 성행하니 그들에게는 이것이 둘도 없는 착취의 구실이 되었다. 

자기들 마음대로 온갖 명목을 붙여 세금을 뜯어갈 뿐만 아니라 효자·열녀·충신을 표창 기념하는 사업을 한다고 그 비용까지 물리는가 하면, 수령·아전·군졸들이 이중삼중으로 착취하니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동학에 입도하고 접소에 모여 불평불만을 이야기하면 다시 나라에서 금하는 사교를 믿는다고 잡아가 매질을 하고 돈을 뜯은 후에 내보냈다. 

동학은 창도정신에서 이미 사회개혁→혁명성을 담고 있었다. 최제우는 "도(道)는 비록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곧 동학(東學)이다"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동(東)은 넓은 의미로는 동양, 좁은 의미로는 동국 즉 한국을 뜻한다. 동학은 서학이 아닌 한국사상을 말하고, 내세운 목표가 '보국안민'의 민족·민중주체 의식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 그리고 '척왜척양'과 '후천개벽(後天開闢)'을 제시하였다.

선천(先天)이 기존체제라면 후천(後天)은 새로운 사회를 의미하며 개벽(開闢)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말한다. 최제우는 정신과 물질 현상이 근본적으로 혁신되어 새 세상이 된다는 뜻으로 '개벽운수(開闢運數)'를 제시하였다. 또한 천도교에서는 기미년 3·1혁명 후 <개벽>이란 제호의 종합지를 창간하여 72호까지 내다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된 바 있다. 

동학사상을 비롯 한말의 각종 민족종교에는 '후천개벽'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 <정역>의 창시자 일부 김환, <증산교>의 창시자 증산 강일순,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 등 신흥 민족종교의 공통적인 키워드는 우연인지 섭리인지 공교롭게도 후천개벽사상이었다. 

후천은 선천(先天)의 대칭개념으로 풀이되었다. 인지가 열리지 못하고 모순과 불합리와 상극이 지배하던 어두운 시대와 세상이 선천이라면, 인지가 열리고 통합과 합리와 상생이 지배하는 밝고 새로운 시대와 세상이 후천이다. 민족종교에서는 선천과 후천의 교역(交易)에 따라 선천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후천의 신천지가 열리는 것을 후천개벽이라 한다. 

19세기 말에서 조선은 외세의 침범과 정치의 부패, 사회지도층의 타락과 국교인 유학의 쇠락으로 나라가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여기에 서양의 종교인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한국사회의 가치관은 근저에서부터 크게 흔들렸다. 이에 따라 당연히 말세론, 미륵불출현설, 각종 예언과 도참설이 나돌았다. 정감록과 민간신앙의 말세구원론과 메시아 신앙이 불안한 백성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결과는 홍경래난, 삼남민란, 동학농민혁명 등으로 폭발되기도 하고, 신흥종교 창시자들의 후천개벽사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동학은 창도 정신에서부터 본래의 민(民), 제도와 위학으로 조립된 민이 아닌 하늘로부터 타고난 민(民)을 바탕으로 삼았다. 역대 왕조가 위민(爲民)과 민본(民本)을 내세웠지만 허울에 그치고, 민은 언제나 압제와 수탈의 대상일 뿐이었다. 동학이 종교와 인간개혁의 대상으로 제기한 것이다. 한 연구자는 동학의 민에 대한 인식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 동학에서는 민을 서양의 종교적·무력적 침공에 의하여 위기에 처해 있는 한국인 민간집단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위기에의 독자적 대응으로서 서학에의 거부, 민속의 공통성, 그리고 국토애·향토애의 공통성을 사회적 매개물로 하여 다시 말하면 생활방식의 공통성을 매개로 하여, 한국인 인간집단을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고 파악하였다.(…)

둘째, 동학에서는 한국 주민의 민족으로서의 형성에 한국주민의 주체적인 계기를 설정하였는데, 그것은 한국인 개개인의 도덕적 자각이었다. 그 도덕적 자각은 한국인 각자 각자가 최제우가 상제로부터 들은 오심즉여심야(吾心卽汝心也)(논학문)라는 말과 최제우의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논학문)이라는 말 등에서의 오심=천심=인심의 마음 즉 "태어날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는 마음"='본마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경천명·순천리(敬天命 / 順天理)는 '본마음' 회복의 전제이고 과정이자 결과이며, 수심정기(守心正氣)와 성·경·신(誠·敬·信)은 그 필수의 방법이었다. (주석 1)

동학은 가혹한 관의 탄압과 유림세력의 질시에도 불구하고,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민란과는 달리 조직과 연대가 이루어져 마침내 혁명으로 발화되었다. 여기에는 그 중심에 동학사상으로 무장한 동학도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주석 
1> 정창열, <한국사(학)에서의 민중인식>, <한국 민족 민중운동연구>, 95~96쪽, 두레, 1989, (발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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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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