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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일, 서울 반포대로 5갤러리(서울시 서초구 반포대로 5)에서 6월 2일까지 아홉 번째 개인전을 연 박숙현 작가를 만나보았다. 
 
박숙현 작가 약력
1974년 울산 출생. 10여 년 동안 해외 생활을 하며 하늘과 숲이 주는 치유 효과를 경험했다. 동양 미술과 서양 미술을 절묘하게 섞어 한지 위에 자신만의 세계관을 펼쳐낸 박숙현 작가는 현대인들에게 '쉼'과 '치유'의 시간을 선물한다.

- 작가님께서는 자신을 '치유작가'라고 묘사하시는데요, '치유'와 '쉼'에 주목하신 계기가 있으신가요?

"오랜 해외 생활이 제 작업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기점이 된 것 같습니다. 2008년에 해외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중국 북경과 태국 관광지 외에 가 본 곳이 없었어요. 미술 공부를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을 거라고 짐작하시는 분이 많으신데, 남편이 유럽으로 발령받아서 떠나게 됐어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시에 전업 작가로 활동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번아웃이 찾아왔고 그 시기와 겹쳐 도망치듯 유럽으로 떠나갔어요. 생전 처음 해외에서 터전을 잡고 살면서 많은 걸 내려놓았어요. 간단한 인사말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채 도착한 나라에서 살기 위해 그들의 삶으로 스며들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조용하고 할 일도 없는 그곳에서 살아가면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다른 별에 떨어진 듯한 느낌이 불안하기보다는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왔어요.

'빨리, 빨리'를 외치는 바쁜 생활에서 벗어나자 자유로워졌어요. 아침에 일어나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숲길을 되돌아오면서 살아 숨 쉬는 일이 참 감사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평안의 상태를 경험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됐어요.

자연과의 교감이 나를 살리고 치유했다는 걸 말이죠. 그리고 진정한 나를 돌아볼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것도요. 그 무렵을 돌이켜 보면, 그곳에서의 삶이 없었다면 저는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질주하다가 결국 자책하며 그림 그리는 일을 관뒀을지도 모릅니다.

제게 '쉼'이란 삶의 여정에서 잠시 멈추고 쉬라는 신호입니다. 잠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틈을 주는 겁니다. '쉼'의 목적은 제대로 사는 겁니다. 이과의 관점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름의 패턴을 만드는 겁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고, 채웠다가 다시 비우는 과정이 반복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지, 안료, 돌가루, 2024
▲ 쉼, 한지, 안료, 돌가루, 2024
ⓒ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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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화의 바탕이 되는 한지 위에 서양화용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시는데요. 얇고 부드럽지만 강한 한지가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 더욱 은은하고 아름다운 색감을 만들어내는 느낌입니다. 그래서인지 한지와 서양화용 물감을 함께 활용하는 방식이 '쉼'과 '치유'라는 주제와 잘 어울립니다.

"맞아요. 물감의 원재료인 안료와 적당한 접착력을 지닌 수용성 본드, 그리고 물을 적당량 섞어서 사용합니다. 제가 사용하는 재료들은 모두 자연에서 온 것들로, 감정을 이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딱딱한 재료는 저와는 잘 맞지 않습니다."

- 붓으로 길게 획을 긋는 방식 대신 다양한 색깔의 물감을 붓에 묻혀 점을 찍는 색점 기법이 눈에 띕니다. 색점 기법을 보니 김창열 화백의 물방울, 김환기 화백의 점화, 쇠라의 점묘법이 연상됩니다. 무수히 많은 붓 터치가 모여 하나의 조화로운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색점 기법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완성된 그림을 보면 처음부터 색점을 찍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물방울이 맺혀서 생긴 얼룩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할 겁니다. 자연스러운 색점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 보니 이런 방법을 터득하게 됐습니다. 뭐든 자연스러운 걸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완성된 그림을 보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작업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한지에 맺힌 물방울이 다 마르기를 기다려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기다리는 시간이 참 좋습니다. 꽃이 피는 과정, 혹은 나무가 자라는 과정을 슬로 비디오로 보는 느낌이랄까요? 사실, 저는 빨리 무언가를 해내는 게 참 힘든 사람입니다. 식물도 제대로 키우려면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저도 무언가를 기르고 기다리고 키워내는 과정을 즐기는 것 같아요."

- 여러 겹의 물감이 더해져 한지 위에 두툼한 색깔이 배어납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주신 릴스 영상을 보면 붓에서 가볍게 흘러내리는 물감은 맑고 연해요. 하지만 수없이 색점을 덧입혀서 완성하신 작품을 보면 물감의 두께감이 상당합니다. 심지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어요. 단순히 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작가님의 마음과 시간이 겹겹이 쌓여가는 과정처럼 보입니다.

"그동안 선보인 제 작품들을 돌이켜 보니 정말 여러 겹의 색으로 층을 쌓은 작품이 많은 것 같아요. 한지라는 종이가 참 신기한 점은 캔버스 천보다 얇아 보이지만 안료들이 얇은 층 안에서 서로 색을 받아들이고 엉키는 과정에서 발색이 더 자연스러워져요. 그래서 그 매력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면 아크릴 위에 그릴 때보다 확실히 채도가 낮아요. 하지만 편안함은 있어요. 자연스럽거든요."

- 그림 위에 금박 덩어리를 올려놓고 도구를 이용해 잘게 조각내는 릴스를 봤습니다. 피아니스트 신기원이 연주하는 <Dream>이 배경 음악으로 깔려 있더군요. 경쾌하고 달콤한 연주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커다란 금박이 수없이 많은 입자로 쪼개져 한층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모습이 신비로웠습니다.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작가님도 작업하시는 과정에서 치유의 감정을 느끼시나요?

"저는 작업할 때 주로 피아노 음악을 들어요. 제일 편안한 악기 같아요. 개인적으로 현악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뭔가 조마조마한 긴장감과 예민함이 느껴져요. 인스타 릴스를 만들 때는 음악을 고르는 데 시간이 좀 걸려요. 신기원 곡은 경쾌한데도 깊이가 느껴지곤 해요. 재즈도 좋아해요. 자유로운 영혼들이 득실대는 어느 골목에 있는 것 같아서요.

몬드리안처럼 차가운 추상에 몰두했던 작가가 재즈에 매료됐다는 일화를 듣고 많이 공감했습니다. 예술가는 늘 나와 다른 무언가를 동경하거든요.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에도시대에 유행한 우키요에라는 판화를 앞다투어 수집하고 따라 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예술가 집단은 늘 새로운 뭔가를 갈구하는 집단이고, 예술가는 그 안에서 사는 걸 선택한 사람들이죠."

- 작품에 사용하시는 재료가 여느 작품의 재료와는 달라 보입니다. 은은하면서도 아름다운 빛깔이 뿜어져 나오는데요. 작가님이 사용하시는 재료에 관해서 설명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 작품을 보시는 분들이 재료에 관한 질문을 정말 많이 해요. 한국화를 전공한 분들도 많은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동양의 재료와 서양의 재료를 섞어서 만든 작품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업 형식도 좀 독특하긴 합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붓글씨를 쓰듯이 눕혀서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저는 금박과 은박도 즐겨 사용합니다.

마무리 단계에서 금박과 은박을 적당히 사용하는 건 뭔가 더 포인트를 주고 싶어서이기도 하고요, 색점들이 화면 위에서 아래로 살포시 떨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을 더하고 싶어서이기도 합니다. 껌을 감싸는 종이보다 더 얇은 은박과 금박을 뾰족한 핀으로 찢고 두드려 붙이는 작업이라 힘은 들지만 집중하다 보면 재밌기도 하고 완성한 그림을 보면 숭고한 뭔가가 표현된 것 같아 만족감이 큽니다."

- <자연을 닮은 초록>을 작업하시는 과정이 담긴 영상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초록 위에 금박을 입히고 다시 초록 색점을 찍으시더라고요. 잘게 부서진 금박이 여러 겹의 초록 색점 사이에서 아름다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상처를 받는 일이 있는데요. 상처 위에 한 겹씩 약을 바르고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토닥여주는 모습 같기도 했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은 그런 노력과 인내의 시간을 견딘 후에야 얻을 수 있는 보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맞아요. 작업하는 시간은 내가 나를 토닥이는 시간처럼 느껴져요. 예술가들이 자신이 하는 작업을 그냥 일로만 느낀다면 절대로 그 작업을 계속할 수 없어요. 예술 작업의 매력에 빠지면 애인이랑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는 것 같은 애증의 관계가 생깁니다. 쉰 살이 되고 보니 예술가가 참 축복받은 직업같이 느껴집니다."
 
박숙현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비
▲ 나비 박숙현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나비
ⓒ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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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색점 속에 의미를 담아내는 작품을 주로 선보이시는데, 작가님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구체적인 생명체가 나비입니다. 나비는 무엇을 상징하나요?

"제 작품에 나비가 처음 등장한 건 2007년입니다. 당시에는 나비를 저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 같아요. 그 무렵, 비 오는 날 만난 작고 하얀 나비 한 마리가 제게 큰 위로가 됐어요. 그때는 그랬습니다. 사실 지금은 나비가 영혼과 영혼을 이어 주는 매개체 같은 느낌입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는 장수풍뎅이가 발견되는데요, 저는 사후 세계를 떠올릴 때마다 나비라는 생명체가 연상됐습니다. 그중에서도 흰 나비가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는 영적인 세계를 믿는 사람인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비가 자꾸 제 마음을 건드립니다."
 
116X91cm, 한지, 안료, 돌가루, 2024
▲ 쉼,  116X91cm, 한지, 안료, 돌가루, 2024
ⓒ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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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양한 색을 활용하시지만 블루 계열을 특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블루의 어떤 느낌에 매료되신 걸까요? 블루 중에서 특별히 좋아하시는 색감이 있으신가요?

"여러 나라에 살아 보니 나라마다 색깔이 있더라고요. 공기가 달라서 그런지 각 나라의 색깔이 달라 보여요. 그것처럼 블루도 그 빛이 참 다양해요. 보랏빛을 몇 방울 떨어뜨린 블루도 있고 검은색이 약간 더 들어간 것 같은 블루도 있어요.

디자인하는 사람들은 딥블루, 페르시안 블루 같은 이름을 정해두지만, 제가 좋아하는 색감은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는 진짜 나만 아는 블루예요.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흑색에 가까운 블루요. 제가 좋아하는 블루의 색감을 한국에서는 찾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한 선배가 어슴푸레한 새벽녘의 사찰에서 바로 그런 블루를 찾을 수 있다고 얘기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 작가님의 작품을 보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쉼'의 시간을 갖는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독일에 살면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11킬로씩 걸었어요. 숲길을 걷고, 또 걷다 보니 몸도 마음도 매우 건강해지더라고요. 저는 자연이 주는 치유의 힘을 믿어요. 복잡한 삶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잠시 재충전하며 쉬어 가는 순간이 제대로 살아갈 힘을 줍니다. 프라하 레트나 호수에 비친 버드나무 잎을 닮은 제 그림이, 독일의 검푸른 하늘을 닮은 제 그림이 여러분께 잠시나마 '쉼'의 순간을 선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박숙현 작가 쉼, 전시회가 열린 갤러리 내부
▲ 갤러리 전경  박숙현 작가 쉼, 전시회가 열린 갤러리 내부
ⓒ 김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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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숙현 작가 약력
동국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석사 졸업

개인전
2002 제1회 개인전 (홍익대학교 현대미술관, 서울)
2006 제2회 개인전 (모로 갤러리, 서울)
2007 제3회 개인전 (정독 도서관 전시실, 서울)
2008 제4회 개인전 (kaschenbach Galerie, 서울)
2017 제5회 초대 개인전 (wave 갤러리, 부산)
2018 제6회 초대 개인전 (선 갤러리 문화원, 울산)
2019 제7회 개인전 (해운대 마린 컬쳐 후원, 화인 갤러리, 부산)
2023 제8회 개인전 (후원 아트센터 원리, 갤러리 한옥, 서울)
2024 제9회 초대 개인전(반포대로5갤러리, 서울)

단체전 및 아트페어 50여 회(한국, 일본, 미국, 독일 등 다수)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SNS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박숙현, #박숙현작가, #치유작가SUE, #반포대로5갤러리,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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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사랑하는 번역가. 원작자의 글을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새로운 언어로 재탄생시키는 직업적 특성을 살려 다양한 형태의 예술 작품을 알기 쉬운 언어로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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