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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과학선생인 부럼씨네 아이들.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부끄러워 방문 앞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과학선생인 부럼씨네 아이들. 낯선 이방인의 등장에 부끄러워 방문 앞에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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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코사니 간디 아쉬람에서 닷새째. 평소 허름한 점퍼 차림의 가텀씨가 양복에 스카프까지 두르고 나선다. 나는 한국에서 출발했을 때 옷 두 벌이 전부였기에 외출복이 따로 없다. 외출복이 날씨가 추우면 잠옷이 되기도 하고 또 등산복이 되기도 한다.

"날씨가 더운데…."

내가 빙그레 웃으며 그의 목에 두른 스카프를 가리켰더니 그는 한바탕 기침을 하고 손을 목에 대며 말했다.

"목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가텀씨와 함께 코사니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서메쉘이라는 곳으로 나서기로 했다. 오늘 저녁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부럼 선생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았다는데, 가텀씨가 술을 사러 나가자는 것이었다. 코사니에는 술집은 물론이고 술을 파는 상점이 없다. 코사니에서 가장 큰 식료품 가게에서조차 술을 팔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동네 구멍가게에서도 술을 기본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인도는 다르다. 대도시 델리에서도 그랬듯이 술 파는 상점이 따로 있다. 인도에 온 지 한 달째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고 다니는 인도 사람들을 만나보지 못했다. 내게 술 마시자고 권한 인도 사람은 가텀씨가 처음이었다.

아직 인도에 익숙지 않은 나는 어리바리한 촌놈이 되어 나름 폼 나게 차려 입은 가텀씨를 따라 버스를 탔다. 시골 버스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다. 시골 노인네부터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가 뒤섞여 있다. 마치 오일장에 맞춰 읍내로 나서는 분위기다. 거기다가 버스 안은 요란한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는 승객들의 몸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버스와 함께 심하게 흔들리는 사람들의 몸짓이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락에 맞춰 춤을 추는 듯하다. 나는 심하게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떠맡겨 놓고 인도영화의 중간 중간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춤과 노래를 떠올렸다. 그렇게 버스 안의 승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랑하는 남녀가 번갈아가며 부르는 열정적인 노래 가락에 온몸을 떠맡겨 놓고 그 큰 두 눈을 창밖으로 고정시켜 놓고 있었다.

북인도 코사니에서 서메쉘 가는 길. 농가 사이사이로 한국의 농촌처럼 뼈대만 앙상한 빈집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북인도 코사니에서 서메쉘 가는 길. 농가 사이사이로 한국의 농촌처럼 뼈대만 앙상한 빈집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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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시선 따라 도로 양옆으로 드문드문 농가들이 보인다. 농가 사이사이로 한국의 농촌처럼 뼈대만 앙상한 빈집들이 심심찮게 드러나 있다. 인도나 한국이나 자본에 잠식당하고 있는 고단한 시골살이는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버스가 잠시 속도를 줄인다. 한 사내가 회초리를 휘둘러 등허리가 휘어지도록 짐을 잔뜩 실은 나귀들을 길 한 옆으로 몰아가고 있다. 회초리를 든 사내의 반대쪽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다.

달콤하고 고소한 200년 전통의 맛

서메쉘은 코사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번잡하다. 버스 정거장을 중심으로 식당이며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코사니가 작은 면 소재지라면 서메쉘는 읍 단위라 할 수 있다. 가텀씨는 코사니만큼이나 서메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부럼씨가 부탁했다는 '달콤한 과자'를 사기 위해 서메쉘 상가 구석진 곳에 자리한 과자점을 찾아 갔다. 과자점이라 할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점포였다. 우리로 말하자면 호떡 한 가지만 구워 팔고 있는 포장마차 호떡집과 다름없었다.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작은 점포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메쉘에서 유명하다는 과자집. 2백년 전통의 과자를 기름에 튀기고 있다.
 서메쉘에서 유명하다는 과자집. 2백년 전통의 과자를 기름에 튀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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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동안 줄곧 저 과자만 굽고 있는 곳입니다. 다른 곳에서 맛볼 수 없는 아주 맛있는 과자지요."

부러 웃지 않아도 웃는 얼굴인 중년 사내가 화덕에 장작불을 지펴 무쇠 솥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기름에 동그란 과자를 튀기고 있었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름에 튀긴 작은 찹쌀 도너츠처럼 보인다. 노릿노릿 기름에 튀겨진 과자 빛깔이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헌데 찹쌀 과자가 아니다. 밀가루 반죽을 둥그렇게 만들어 기름에 튀겨내고 그것을 다시 물엿에 가까운 진한 설탕물 통에 푹 담가 놓고 있었다. 물엿에 버무리는 것을 보기만 했는데도 설탕이 입안에 가득 찬 것처럼 얼얼해져왔다.

"맛 좀 볼래요?"

가텀씨가 금방 구워내 물엿에 버무린 과자를 신문지에 싸서 내밀었다. 나는 머뭇거렸다. 신문지의 불결함 때문이 아니라 물엿 때문이었다. 나는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보통 한국의 찹쌀 도너츠는 팥고물이 들어 있는데 속에 아무것도 없다. 역시 입 안이 얼얼할 정도로 달았다.

하지만 입안에 들어가 오물오물 씹는 과정에서 그 맛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단지 단맛뿐이 아니었다.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베어나왔다. 나는 그 맛에 끌려 물엿을 약간만 찍어달라고 하여 다시 맛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찹쌀 도너츠보다 더 깊은 맛이 났다.

기름에 튀긴 과자를 물엿에 푹 담궈 내놓는 일명 '달콤한 과자'. 입안에 넣는 순간부터 너무 달아 얼얼했지만 씹을 수록 고소한 깊은 맛을 낸다.
 기름에 튀긴 과자를 물엿에 푹 담궈 내놓는 일명 '달콤한 과자'. 입안에 넣는 순간부터 너무 달아 얼얼했지만 씹을 수록 고소한 깊은 맛을 낸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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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나시에서 이런 과자를 맛보기도 했는데 너무 달아 혼쭐이 난 적이 있었다. 처음과 뒷맛 모두가 달기만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에 할아버지, 조상 대대로 물려받고 있다는 200년 전통의 이 과자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이 '달콤한 과자'의 깊은 맛의 비결은 밀가루 반죽, 튀김용 기름과 가마솥 온도 등에 담겨 있을 것이었다. 거기다가 과자를 튀기는 중년 사내의 웃음 띤 손길이 더욱 더 깊은 맛을 내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가격도 쌌다. 서민들이 먹기에는 큰 부담이 없는 2개에 5루피(약 100원)였다.

우리는 부럼씨가 부탁한 200년 전통의 '달콤한 과자'를 싸들고 다시 복잡한 시장 한복판으로 나섰다. 나는 얼치기 촌놈처럼 가텀씨 꽁무니를 졸졸 따라 다니며 읍내 구경을 하다가 전자제품 상점에서 전기주전자(커피포트)를 구입했다.

그동안 숙소에서 뜨거운 물을 구할 방도가 없어 한국에서 가져온 커피와 녹차가 배낭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또한 커피포트가 있으면 물을 따로 사지 않고 끓여 마실 수 있다. 여행비를 절약하기 위해 끼니 때마다 식당 신세를 지지 않고 분말 우유를 끓여 하루 한 끼 정도를 값싼 식빵과 함께 해결할 수 있다.

가텀씨의 흥정으로 커피포트를 50루피 정도 싸게 구입하고 주차장 부근에 자리한 주류 상점을 찾아갔다. 주류 상점은 매표소나 전당포처럼 철망을 쳐놓았다. 철망 사이로 두 군데의 작은 구멍을 만들어놓았는데 하나는 돈을 지불하는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술을 내주는 구멍이었다. 철망을 쳐 놓은 것은 큰돈이 오고 가기 때문인 듯했다. 가텀씨는 코냑 종류의 술을 원했다.

"술 한 병에 얼마입니까?"
"500루피…."
"이 술값은 내가 지불하겠습니다."
"아 괜찮아요. 내가 마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부럼씨네 집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았으니 내가 선물로 구입하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술이니까 내가 사야지요."
"한국 사람들은 친구 집에 방문할 때 선물을 사가지고 갑니다. 제게 양보하십시오."

주류 상점 앞에서 서로 실랑이를 벌이다가 내가 먼저 지갑에서 돈을 꺼내들자 그는 반반씩 부담하자고 했다.

"당신 돈을 내게 주세요. 외국인이 구입하면 두 배로 비쌉니다."

500루피면 인도 서민들에게는 아주 큰돈이다. 술을 마시기 위해 500루피를 투자하지 않을 것이었고, 술값이 비싼 만큼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500루피는 하루 식비가 50루피 정도에 불과한 내게도 큰돈이다. 하지만 영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이방인인 나를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고 있는 가텀씨와 락시미 아쉬람의 학교 곳곳을 안내해주고 선뜻 식사에 초대해준 부럼씨를 생각하면 결코 큰돈은 아니다.

하루 식비 50루피인데 술 한 병에 500루피

거리에는 티베트 사람들도 눈에 띈다. 우리는 자동인출기에서 돈을 찾아 점심을 먹기 위해 낡고 허름한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메뉴판을 눈여겨보던 가텀씨가 키득키득 웃어가며 내게 물었다.

"모모? 아니면 자오민?"
"모모와 자오민 반반씩 주문하겠습니다."

코사니에서 닷새를 보내면서 가텀씨와 매일 같이 붙어다니다 보니 이제 서로의 식성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사실 식성이라 할 것도 없이 내가 먹는 음식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간디 아쉬람에서 한 끼를 먹고 나머지 한 끼는 과일 혹은 코사니 상가 주변의 식당에서 해결하고 있었는데, 나는 주로 일당벌이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아주 작고 허름한 식당에서 15루피짜리 '모모'(만두)나 '자오민'(야채 비빔국수 종류)를 시켜 먹곤 했다. 가텀씨도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음식을 시키기도 전에 키득키득 웃었던 것이다.

가텀씨는 짜파티와 카레, 거기다 '모모'까지 시켰다. 그는 음식을 앞에 두고 양복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으로 돌돌 말려 있는 뭔가를 꺼냈다. 고기를 써는 나이프와 포크였다. 내가 그의 웃음을 흉내내며 키득키득 웃자 그 역시 키득키득 웃으며 내게 말했다.

"키득키득, 인도 시골 식당은 아주 불결해요."
"흐흐흐, 당신답지 않네요."

폼나게 양복을 차려 차려 입고 서메쉘 읍내에서 음식을 먹는 가텀씨. 속 주머니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꺼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을 바지춤에 씩씩 문댔다.
 폼나게 양복을 차려 차려 입고 서메쉘 읍내에서 음식을 먹는 가텀씨. 속 주머니에서 나이프와 포크를 꺼낸 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것을 바지춤에 씩씩 문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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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알게 된 이후 줄곧 붙어 다녔지만 닷새에 불과했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는 소탈한 성격이었다. 잘 웃고 사람들과 잘 소통하고 또 나처럼 일용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값싼 식당을 드나드는 그였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아주 소탈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았군요'라고 말해주려 했지만 영어가 달려 그 말을 전달하지 못하고 그저 키득키득 웃고 있을 때였다. 그가 칼과 포크를 바지춤에 쓱쓱 문질러 닦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와하하! 당신은 역시 내가 알고 있는 미스터 가텀이 맞네요."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가며 내게, 바지춤을 행주 삼아 문질러댄 자신의 나이프과 포크를 내밀며 슬며시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었다.

"노! 노! 고맙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엄마 손잡고 식당에 들어선 시골 아이들. 녀석들은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 장난감이나 군것질 거리를 찾아 나섰다.
 엄마 손잡고 식당에 들어선 시골 아이들. 녀석들은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 장난감이나 군것질 거리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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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바탕 웃어가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예닐곱 살 돼 보이는 아이 셋이 엄마 따라 식당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우리 식탁 맞은편에 앉아 주문을 하는 사이에 세 녀석들이 엄마를 졸라댔다. 시골 촌놈들이 모처럼 읍내에 나와 시장 바닥에 널려 있는 장난감이나 군것질거리를 눈여겨본 모양이다. 결국 녀석들은 10루피씩 들고 기분 좋게 밖으로 나선다. 젊은 아낙네들 역시 식당을 나서는 녀석들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기분 좋게 웃고 있다.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에 푹 빠져 있을 때처럼 내 가슴속으로 10루피를 손에 쥐고 나서는 녀석들의 설레는 마음이 파고들어왔다. 녀석들은 엄마 따라 시장에 나와 10원짜리 오징어 다리 튀김이나 꽈배기를 사먹었던 아주 오래 전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기도 했다. 녀석들이 떠난 자리에 빈 의자만 남아 있듯이 나의 어린 시절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모든 게 찰라다. 녀석들이 10루피짜리 먹거리를 사들고 다시 식당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나처럼 턱 수염이 허연 50대 중반의 낯설고 낯선 사내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코사니로 되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전에 부럼 선생네 아이들을 위해 초콜릿을 두 개 샀다. 인도 사람들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체로 단 것을 좋아한다. 초콜릿은 생각보다 비쌌다. 좀 전에 샀던 전통 과자가 두 개에 5루피였는데 초콜릿은 한 개에 30루피나 했다. 인도의 시골 아이들에게는 아주 고급 과자였던 것이다.

이방인을 바라보던 사슴을 닮은 큰 두 눈

간디 아쉬람 숙소로 돌아와 히말라야 설산 난다데비를 향해 '멍 때리고' 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사방팔방 내리꽂히면서 어둠과 함께 빗줄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낮에는 한여름 날씨였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갑자기 쌀쌀한 늦가을 날씨로 돌변했다.

"비가 오는데 오늘 저녁 부럼 선생네 집에 갈 수 있겠어요?"
"걱정 말아요. 비가 금방 그칠 테니까."
"지금 상태로 봐서는 계속 내릴 것 같은데요."
"천둥번개 치고 비가 오다가 금방 그치고, 코사니 날씨가 그렇습니다."

재봉질을 하고 있는 부럼씨 아내. 래카 라인. 옷 수선은 물론이고 직접 어지간한 옷은 만들어 입기도 한다.
 재봉질을 하고 있는 부럼씨 아내. 래카 라인. 옷 수선은 물론이고 직접 어지간한 옷은 만들어 입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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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다섯 시쯤 돼자 가텀씨 말대로 비가 그쳤다.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았다. 부럼씨네 집은 락시미 아쉬람 학교 근처 숲에 자리한 외딴 시골집이었다.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들마루에 앉아 있던 부럼씨와 재봉틀을 돌리던 부인이 반긴다. 어지간한 옷들은 재봉틀을 돌려 수리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디에 있나요?"
"방 안에 있습니다."

부럼씨가 방을 향해 아이들을 부른다. 아이들이 문틈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다. 낯선 이방인과 마주 대하기가 부끄러운지 가녀린 사슴을 닮은 그 큰 두 눈으로 빙글빙글 웃기만 하고 선뜻 밖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세상 어디든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자리는 다르지 않다. 부럼 선생네 아이들은 우리 집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닮아 있다. 두세 살 무렵부터 시골살이를 했던 우리 집 아이들은 낯선 도시 손님들이 방문하면 선뜻 나서지 못하고 부럼 선생네 아이들처럼 저만치서 고개만 빼꼼 내밀곤 했었다.

"아이들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아들은 하르셋, 딸은 기탄잘리입니다."
"아, 그…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기탄잘리…?"
"예 맞습니다."

코사니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과학선생 부럼씨네 가족.
 코사니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과학선생 부럼씨네 가족.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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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내 이름은 '래카 라인'. 그는 허공에 대고 손짓으로 선을 그어 보이며 그런 '라인', 선이라며 킬킬 놀려댄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은 아주 길다며 영어로 또박또박 말해준다.

"부럼 컴프리트 푸나찬드리 반드레이."
"와! 이름 정말 기네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 이름에는 보름달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 이름은 단지 '송!'입니까?"
"부르기 쉽게 '송'. 정확하게 말하자면 송, 성, 영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에도 당신 이름에 깃든 보름달과 비슷한 의미가 있습니다. 보름쯤에 태어났다 하여 아버지가 지어준 '성영'이라는 이름은, 중국식 한자로 풀이하면 '달 성'에 '길 영', 즉 달길(문 로드)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지요."

그는 떠듬거리며 단어들을 나열하고 있는 나의 서툰 영어를 이해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의 시골 농가와 닮아 있는 그의 집 주변에는 20여 평쯤 돼 보이는 채소밭이 있었고 방문 앞에는 신에게 가족의 안녕과 복을 기원하는 힌두교 문양 '랑골리'(Rangoli)가 새겨져 있다. 내가 바라나시와 알모라에서도 이런 비슷한 문양을 봤다고 말했더니 그가 덧붙인다.

"힌두교 집안 여자들은 2천 년 전부터 집에 저런 랑골리를 새겨왔습니다."

우리는 그의 아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서머쉘에서 사온 '고급술'을 마셨다. 한국에서는 보통 식사를 하고 난 후에 간단한 차나 술을 마신다고 했더니 대부분 인도 사람들은 식사를 하기 전에 차나 술을 먼저 마신다고 한다. 힌두교도인 부럼씨는 아이들이 술병을 볼 수 없도록 수건으로 덮어 놓는다. 그만큼 힌두교인들에게 술은 멀리 있었다.

깊이 있는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없었기에 나는 한국어로 타고르의 시집 <기탄잘리>와 <바가바드 기타>(기원전 4∼3세기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 <마하바라타> 속에 편입되어 있는 하나의 시편으로, 700편의 노래로 이루어졌는데, 힌두교인들은 이것을 최상의 성전으로 여기고 있다)를 읽었다고 얘기하면서 부럼씨와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부럼씨의 아내인 래카 라인씨가 준비한 인도 전통 음식. 인도에서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이 있었다.
 부럼씨의 아내인 래카 라인씨가 준비한 인도 전통 음식. 인도에서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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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소통 힘든 인도에서 사람과 사람을 만났다

술을 반 병쯤 비웠을 때 부럼 선생의 아내가 저녁 식사를 내왔다. 가텀씨가 미리 얘기해주었듯이 그녀의 요리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인도인들이 즐겨 먹는 양고기 수프와 감자볶음 달, 뿌리 카레 등이 푸짐하게 나왔는데 인도에 와서 먹어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보통 인도 식당의 음식은 짭짤한 편인데 적당히 간을 한 그녀의 음식은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저녁 식사를 간단하게 과일로 대신하는 날이 많았는데 오늘은 꼬박 두 끼를 꽉 채워 먹었다. 거기다가 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려가며 보통 때보다 두 배로 먹었다.

식사를 다 마칠 무렵 갑자기 천둥번개가 후려치고 엄청난 굉음을 냈다. 낮에 한 차례 몰아 닥쳤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강력했다. 코사니에서는 종종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다음 날 알게 된 것인데 코사니 아랫마을의 한 농가에 번개가 꽂혀 화재로 몇 마리의 양들이 죽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부럼 선생네 안방에 모여 앉았다.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자는 둥 마는 둥 낯선 나를 주시하며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안방을 내준 이들 가족과 한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졸린 눈을 치켜뜨고 있는 안방에 앉아 천둥번개 소리를 들어가며 밤늦도록 서로의 가족과 명상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비좁은 방안에 둘러 앉아 가족 얘기며 인도의 명상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한가족처럼 지내는 친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비좁은 방안에 둘러 앉아 가족 얘기며 인도의 명상가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에서 한가족처럼 지내는 친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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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심사는 서로 극과 극의 삶을 살다간 오쇼 라즈니쉬와 라마나 마하라쉬였다. 오쇼 라즈니쉬가 물질의 풍요 속에 살다간 사람이라면 라마나 마하리쉬는 평생 물욕을 멀리하고 살다 간 사람이었다.

20여 년 전, 나는 수행자의 길을 걷겠다며 인도 고행길을 꿈꾸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 무렵 오쇼 라즈니쉬보다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으로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인도의 성자, 마라나 마하라쉬에 푹 빠져 있었다. 그를 생각하면 비쩍 마른 체구에 빨려들어 갈 듯한 영롱한 눈빛의 흑백 사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는 내가 누구인지, '나'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부자유스러운 내 자신을 좀 더 깊이 있게 바라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던 큰 스승이기도 했다.

독일에서 명상센터를 운영하고 있다는 명상가 가텀씨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오쇼 라즈니쉬'에 대해 가혹한 평을 내렸다. 영어가 짧아 그의 말뜻을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했던 말을 대략 정리해 보면 이러했다.

"나는 오쇼의 가르침에 따라 성욕에서 해방되는 길을 찾아 나서겠다는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더러는 가족을 버리고 재산을 탕진해가며 오히려 성욕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라즈니쉬, 그는 탁월한 언변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단지 언변 좋은 섹스 명상으로 성공한 사업가일 뿐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물욕에서 벗어나라 가르치면서 아이들이 장난감 자동차를 수집하듯 수십 대의 롤스로이스를 수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라즈니쉬를 따르는 사람들이 성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할 때 라즈니쉬는 그럴싸한 언변으로 재산을 늘려나갔던 것이지요."

밤이 깊어가면서 천둥번개가 멈췄다. 우리가 떠올렸던 사람들은 천둥번개 속으로 모두 사라졌다. 그들은 이미 모두 죽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있다. 낯선 이방인을 위해 준비한 정성 어린 음식을 맛있게 먹었고 비좁은 방 안에 둘러앉아 정을 나눠가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체온을 느꼈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했다. 그렇게 나는 낯선 이국 땅, 언어 소통이 힘든 인도에서 사람과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미량게!"
"미량게!"

'미량게'는 인도말로 '다시 봅시다'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미량게와 함께 부럼 선생 부부가 숙소로 향하는 내게 덧붙인다.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 집에서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하자면 '내 집을 당신 집처럼 편하게 여겨라'였을 것이다. 밤 10시도 채 안 된 시간인데 코사니 상가는 어둠에 잠겨 있다. 코사니는 저녁 8시가 넘으면 거의 모든 상가의 문이 닫히고 거리는 어둠 속으로 잠들어간다. 숙소로 향하는 길은 가로등조차 없다. 손전화기로 불을 밝혀가며 밤길을 더듬어 가야 하는 불편한 길이었지만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술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이방인을 가족처럼 따듯하게 맞이해주었던 가텀씨와 부럼씨네 가족, 내게 또 다른 가족이 생겼기 때문이다.

○ 편집ㅣ최규화 기자



태그:#북인도 서메쉘, #달콤한 과자, #주류 상점, #부럼씨 가족, #달콤한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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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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