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
세계는 그러한 무수한 간단(間斷)


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
내가 나의 밖으로 나가는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산이 있거든 불러보라
나의 머리는 관악기처럼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 만다
(1960. 10.29)


얼마 전, 선생님께서 쓰신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이하 '<카보이야>')를 살펴봤습니다. 선생님이 직접 하신 말씀을 보면,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을 다시 잡아오라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입니다. 당연히 그가 저지른 역사적 죄과를 묻기 위함이셨겠지요. 이 작품은 4·19 혁명 후의 정국이 지리멸렬하게 펼쳐지는 상황에 대한 선생님 나름의 몸부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보니 이 작품에는 씁쓸한 사연이 담겨 있더군요. 원래 <카보이야>는 모 신문사의 청탁으로 쓰였다가 퇴짜를 맞았습니다. 선생님이 어느 선배로부터 들은 그 전후 시말을 보았습니다. 퇴짜 사유가, 신문사 '사시(社是)'로 이기붕까지는 욕을 해도 좋지만 이승만은 욕을 해서는 안 된다는 내규 때문이었다지요.

선생님, 그래서 그러셨겠지요. <카보이야>가 쓰인 무렵부터 이 시가 쓰인 10월까지 선생님께서는 꾸준히 힘주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민주당의 장면이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가 된 것이 1960년 8월 19일이었습니다. 내각책임제하의 최초 총리가 탄생한 역사적인 날이었지요. 민주당 신·구파가 어정쩡하게 타협한 결과이긴 했지만 혁명 후 새 역사를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일말의 희망으로 다가오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4·19 후, 그 8월 19일을 전후로 한 몇 달 간은 그야말로 혼란기이자 과도기였습니다. 가령 선생님 말씀마따나 혁명 직후 들어선 허정 과도정부는 교원노조 운동이나 노동조합의 파업 문제를 '빨갱이' 사건을 처리하듯이 대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서푼어치 가치도 안 되는 총리 선출보다 교원노조운동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었겠지요.

<카보이야>에 얽힌 곡절 많은 비사(秘史)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던 것처럼, 독재자 이승만은 물러났지만 여전히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억압과 통제로 일관했던 제1공화국 치하의 시대 분위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언론사마저 무려 '사시'로 이승만을 향한 '불경'을 금지할 정도였으니 일반 시민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 조항에 규정이 적혀 있다고 해서 그것은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가 예술가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김수영 전집 2 산문>, 338~339쪽)

선생님께서 1960년 9월 20일에 쓰신 일기입니다.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이며 '학자나 예술가는 불가침의 존재'라니요. 선생님께서는 이 일기로부터 반 세기가 훌쩍 지난 오늘날에더라도 쉽게 할 수 없는 '과격한' 주장을 뱉어내고 계십니다. 사적인 일기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얼마나 위험천만한 말들인지요. 오늘날 이 나라의 국가정보원이 보았다면 내란선동죄로 옭아맬 만한 좋은 먹잇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혁명이 있었음에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는 여전히 과거처럼 위축되어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언론과 자유의 희생자"를 자처하고 나서려는 의도로 쓰신 <허튼 소리>(1960. 9. 25), 일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다고 하신,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인 <잠꼬대>(1960. 10. 6; 최초 제목은 <김일성만세>였다. 이 작품은 지난 2008년에 발굴되어 <창작과비평> 지면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가 그런 배경 속에서 나왔으리라 봅니다. 오죽했으면 "한국의 언론 자유? God damn이다!"(1960년 10월 18일 일기)라는 격한 표현을 쓰셨을까요.

하지만 선생님, 'God damn'을 뱉어내면서까지 그토록 강하게 언론 자유를 외치셨지만, 결국 <잠꼬대>는 발표하지 못하셨지요. 1960년 10월 29일, 그러니까 오늘 보는 시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피곤한 하루>)이 쓰인 날의 일기 한 토막이 쓸쓸하게 다가오는 까닭입니다.

지금 같아서는 시집에 넣을 가망도 없다고 한다. (<김수영 전집 2 산문>, 340쪽)

선생님 말씀처럼, 이 시 <피곤한 하루>는 전작인 <허튼 소리>와는 백팔십도 전환한 작품입니다. 이 시에서는<허튼 소리>나 <잠꼬대>에서 보이는 선생님식의 몸부림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대신 극심한 무력감과 좌절감이 시편 전체에 눅진하게 들러붙어 있습니다.

'하루'는 '피곤하다'라는 형용사로 수식되고 있습니다. 그 '하루'의 '나머지'는 맥없이 "눈을 깜짝거"(1연 1행)립니다. "사랑이 추방을 당하"(2연 1행)고, "나의 머리는 관악기처럼 / 우주의 안개를 빨아올리다"(3연 2, 3행) 맙니다. 화자 '나'는 살아 있지만 죽어 있는 존재입니다. 현실의 '나'는 또 다른 본질적 존재인 '나'로부터 분리됩니다(2연 2행 참조). 그것은 이를테면 날카로운 정신의 붕괴이겠지요. 선생님 스스로 이 시를 '반동의 시'라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봅니다.

선생님, 지금 대한민국은 이른바 '역사전쟁'이 뜨겁습니다. 교학사라는 한 출판사에서 만든, 역사 왜곡 교과서 때문입니다. 집권 새누리당이 중심이 된 보수·우파 진영에서는 이 전쟁을 '이념전쟁'으로 바꿀 속셈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거칠게 추론하면,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전가의 보도인 '빨갱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달라졌고, 사람들 생각도 많이 바뀌어 있습니다. 그러니 상황이 그들 뜻대로만은 펼쳐지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거대 국가정보기관이 칼춤을 추고, 고풍스러운 내란음모 사건이 30여년 만에 부활한 상황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 극우 교과서보다 더 '친일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역사 교과서가 버젓이 국가기관의 검정 심사를 통과한 사실이, 선생님이 <피곤한 하루>를 쓰신 그때의 '피로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입니다. 지금은 오후 네 시 이십칠 분. 저는 정말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김수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