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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없다―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
말갛게 행주질한 비어홀의 카운터에
돈을 거둬들인 카운터 위에
적막이 오듯이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고 돈을 내면
또 거둬들이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카운터 같기도 한 것이니

 

이유는 없다―
가다오 너희들의 고장으로 소박하게 가다오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가다오
미국인과 소련인은 '나가다오'와 '가다오'의 차이가 있을 뿐
말갛게 개인 글 모르는 백성들의 마음에는
'미국인'과 '소련인'도 똑같은 놈들
가다오 가다오

'4월 혁명'이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고 끝나고 또 시작되는 것은
잿님이 할아버지가 상추씨, 아욱씨, 근대씨를 뿌린 다음에
호박씨, 배추씨, 무씨를 또 뿌리고
호박씨 배추씨를 뿌린 다음에
시금치씨, 파씨를 또 뿌리는
석양에 비쳐 눈부신
일년 열두 달 쉬는 법이 없는
걸찍한 강변밭 같기도 할 것이니

 

지금 참외와 수박을
지나치게 풍년이 들어
오이 호박의 손자며느리 값도 안 되게
헐값으로 넘겨버려 울화가 치받쳐서
고요해진 명수 할버이의
잿물거리는 눈이
비둘기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동안에
나쁜 말은 안하니
가다오 가다오

 

지금 명수 할아버지가 멍석 위에 넘어져 자고 있는 동안에
가다오 가다오
명수 할버이
잿님이 할아버지
경복이 할아버지
두붓집 할아버지는
너희들이 피지 섬을 침략했을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들은 아직 젖도 떨어지기 전이었다니까
명수 할버이가 불쌍하지 않으냐
잿님이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으냐
두붓집 할아버지가 불쌍하지 않느냐
가다오 가다오

 

선잠이 들어서
그가 모르는 동안에
조용히 가다오 나가다오
서푼어치 값도 안 되는 미․소인은
초콜릿, 커피, 페티코트, 군복, 수류탄
따발총……
을 가지고
적막이 오듯이
적막이 오듯이
소리없이 가다오 나가다오
다녀오는 사람처럼 아주 가다오!
(1960. 8. 4)

 

선생님, 우울한 이야기부터 전합니다. 며칠 전, 국회의원이 연루된 '내란 예비 음모' 사건이 터졌습니다. 문제의 국회의원은 이석기 통합진보당(아래 진보당) 의원입니다. 그가 속한 통합진보당은 의원 수가 일곱입니다. 규모는 작지만, 정부 지원을 받습니다. 공당입니다. 많은 국민이 이 의원과 진보당이 연루된 이번의 '내란 예비 음모' 사건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이유입니다.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의원을 포함하여 진보당에서는 거꾸로 흘러가는 역사를 말합니다. 그들은 국정원이 당에서 공식적으로 실시한 정세 강연회를 '내란 예비 음모'로 날조했다고 주장합니다.이정희 진보당 대표는 그 모임의 일부 토론에서 나온 총기 탈취 및 준비 지시가 '농담'으로 나왔다고 해명합니다.


믿고 싶습니다. '마녀 사냥'과 '여론 재판'이라는 진보당 쪽의 항변도 전혀 틀린 말만은 아닙니다. 혐의가 입증되기 전인데도 진보당 해체 목소리가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은 이석의 의원을 향해 '대한민국의 적'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벌건 증오의 말들이 여기저기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습니다. 이 의원과 진보당은, 재판을 받기 전인데도 이미 '공공의 적'이 돼버렸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진실'은 쉽게 보이지 않는 법이지요. 오늘(9월 4일) 낮 국회에서는 이석기 의원의 체포동의안을 처리하는 무기명 투표가 있었습니다. 개표 결과, 여야 국회의원은 압도적으로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 처리에 찬성했습니다. 표결에 들어가기 전, 이석기 의원은 신상 발언을 했습니다.

 

"민족의 미래가 자주에 달렸다는 것은 정치인으로 확고한 나의 소신이다. 잠시 동안 나를 가둘 순 있지만, 자주와 평화로 나아가는 우리 민족의 발걸음은 결코 멈춰 세울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듯합니다. 신상 발언에서 그가 한 또 다른 말마따나, 이번 사건은 '마녀 사냥'처럼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범죄 '혐의'는 '압도적인(?)' 여론에 의해 이미 명백한 범죄 '사실'이 돼가고 있습니다. 일종의 '여론 재판'이 펼쳐지고 있는 셈입니다.


'마녀 사냥'과 '여론 재판'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석기 의원이 자신이 외친 그대로 '민족 자주'를 신봉하기 때문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통일하고, 우리 민족끼리 하나 되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꿈을 버리지 않는 한, 그는 영원히 대한민국의 주류가 혐오해 마지 않는 '친북파', 혹은 '종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유는 없다 ― / 나가다오 너희들 다 나가다오 / 너희들 미국인과 소련인은 하루바삐 나가다오"(1연 1~3행)라고. 지지부진하여 실패를 향해 나아가는 혁명 정국의 배후에 "서푼어치 값도 안 되는 미․소인"(5연 4행)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요. 외세의 부당한 개입과 그들의 존재가 우리 민족의 역사적인 발전에 훼방을 놓을 것이라 생각하셨겠지요.


그래서 "초콜릿, 커피, 페치코트, 군복, 수류탄 / 따발총"(5연 4~6행) 따위를 들고 조용히, 하지만 완전히 사라질 것을 요구하신 게 아닐런지요.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완전하게 나가지 않으면 '명수할버이'와 '잿님이 할아버지', 그리고 '두붓집 할아버지'가 들고 일어설 것이라고 말씀하고 싶으셨겠지요. 1연에 난데없이 '혁명'이 등장하게 된 까닭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선생님, 지금 대한민국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갯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 문제 때문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시에서처럼 이미 1960년에 미국과 소련을 향해 나가라며 소리치셨습니다. 이 말을 2013년의 대한민국에서 외치면 어떻게 될까요. 미국은, 주한미군은 조용히 이 땅에서 나가라고 말입니다. 결코 좋은 말 듣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도 서슬이 시퍼런 국가보안법의 사슬에 묶일 수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이들의 격렬한 손가락질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석기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었습니다. '내란 예비 음모죄'라는 무시무시한 범죄 혐의 때문입니다. 이석기 의원과 진보당의 초라한 모습에서 내란을 결행할 의지나 능력을 찾아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들 말대로라면, 그들은 지금 자신들의 '사상'과 '양심', 곧 머릿속 '생각'으로 인해 핍박을 받고 있는 것이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법원의 최종 판단이 기다려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가나도 나가다오>#김수영#이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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