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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가는 물결처럼
지나인(支那人)의 의복
나는 또하나의 해협(海峽)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

기회(機會)와 유적(油滴) 그리고 능금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
그리하야 응결한 물이 떨어진다
바위를 문다

와사(瓦斯)의 정치가여
너는 활자처럼 고웁다
내가 옛날 아메리카에서 돌아오던 길
뱃전에 머리 대고 울던 것은 여인을 위해서가 아니다

오늘 또 활자를 본다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을 보고
와사의 정치가들을 응시한다
- <아메리카 타임 지>(1947)

시인 김수영이 동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신시론>(新詩論)은 모더니즘을 표방했습니다. 근대성·새로움 등은 이들이 늘상 관심을 둔 주요 화두어들 중의 하나였지요. 그 동인지였던 <신시론> 1집은 1948년 4월에 세상에 나왔습니다. <신시론> 1집은 기껏해야 전체 16쪽짜리의 앤솔러지(anthology·한 명 또는 여러 명의 시나 문장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골라 모은 책)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편집 방식(표지 없이 위쪽에는 시를, 아래쪽에는 시론과 산문을 싣는 방식) 덕분에 많은 이의 눈길을 사로잡았지요.

<신시론>에 대한 당시 시단의 반응은 극와 극으로 나뉘었습니다. 우선 새로운 시의 출현이라는 평가가 한쪽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극언에 가까운 말들이 나왔습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그것들이 무슨 시냐는 것이었지요(<김수영 평전> 109쪽). 그들의 시가 난해했다는 것입니다.

수영의 네 번째 작품 <아메리카 타임 지>는 바로 그런 '모던한'(?) 난해시의 전형적인 보기입니다. 이 시의 난해성이나 실험성은 흔히 수영의 대표적인 처녀작이면서 난해시의 공인(公認) 작품으로 평가되는 <공자의 생활난>보다 그 정도가 훨씬 심해 보입니다. 두 작품을 좀더 눈여겨 견줘 보면 <공자의 생활난>이 평이한 작품으로 여겨질 정도로 말이지요.

본문을 한 번 봅시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작품의 시구들은 일관된 하나의 문맥으로 포섭되지 못한 채 공중에 붕 떠있습니다. 이를테면 "흘러가는 물결처럼 / 지나인의 의복 / 나는 또하나의 해협을 찾았던 것이 어리석었다"로 돼 있는 1연은 문장 구절 간의 연결조차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이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1행의 '흘러가는 물결'은 중국인(지나인)이 입는 치파오(旗褓)의 늘어뜨려진 주름에 대한 비유일까요. 이어 화자 '나'가 고백하는 '또 하나의 해협'은 또 무엇일까요.

2연으로 보면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여기서는 '기회'라는 추상 명사가 '기름 방울'이라는 뜻의 '유적'이나 '능금'과 같은 구체 명사와 등가적으로 결합돼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성질의 명사 단어들을 이렇게 하나의 줄로 꿸 수 있는 기준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그 기준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시적 사기니 수준과 함량 미달이니 하는 식으로 <신시론>에 대한 비난에 가까운 평가가 이러한 맥락 속에서 나왔겠지요.

그럼에도 이 작품을 수영 시의 통시태(通時態) 차원에서 살펴보면 어떤 희미한 의식의 연결고리가 엿보입니다. <묘정의 노래>는 혼란스러운 현실이 자아내는 슬픔을 그리고 있습니다. <공자의 생활난>에서는 그러한 현실을 정직하게 바라보겠다고 다짐하고 있지요. 그리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에는 현실의 극복 과정에서 서구(미국)를 이중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수영의 미묘한 의식이 투영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메리카 타임 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들 작품의 연장선에서 이해되는 시상은 무엇일까요. 액면 그대로를 주목하면서 봅시다. 먼저 2연에서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 나는 수없이 길을 걸어왔다"(2·3행)가 눈에 띕니다.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기', 이것은 <공자의 생활난>에 등장하는 '이제 나는 바로 보마'의 정신이 아닐런지요.

<아메리카 타임 지>의 '한없이 긴 활자의 연속'(4연 2행)을 보는 것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이는 결코 서구(미국)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응시', 곧 말 그대로 깊이 살피어 '응결한 물'을 찾아내겠다는 다짐의 실천인 것이지요.

김병욱은 누구?
김병욱: 시인. 대구 출신으로 일본대 불문과를 나왔다. 그는 일본의 시 동인지 중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신영토> <사계>의 동인이다. 평전의 저자인 최하림은, 김수영이 김병욱에 대해 '애증동시병발증(愛憎同時倂發症)', 곧 '좋아하는 마음과 미워하는 마음이 동시에 나오는 증세'에 걸렸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고 썼다. 그 정도로 김병욱에 대한 수영의 태도는 매우 각별한 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수영 평전>에 따르면, <신시론>의 출범 이후 동인 모임은 김경린 대표·박인환 총무격으로 운영됩니다. 그러자 "일본 대학에 다니면서 사 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 노동을 한 강자"(<거대한 뿌리> 1연 참조)인 김병욱이 이렇게 일갈합니다. "이게 민족의 현실을 뚫어지게 보고, 그에 대응하려는 새로운 시운동을 하는 잡지냐? 모더니즘 플러스 예술지상주의가 아니냐?"고 말이지요.

김병욱은 그러면서 동인 모임에서 탈퇴하겠다는 선언을 합니다. 수영에게 병욱은 절친한 벗이자 문학적인 선배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수영이 쓴 한 산문을 보면, 시를 잘 썼다는 병욱의 칭찬에 자신이 무척 감격했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수영은 병욱의 그런 견해에 동조해 모임에서 탈퇴하려고 하지요. 두 번째 앤솔러지를 내기 위해 맡겼던 다섯 편의 작품을 되찾으려고 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습니다. 결국 수영은 세 편을 돌려받습니다. 그리고 그때 남은 두 작품이 바로 이 시와 앞서 본 <공자의 생활난>이었습니다.

수영이 왜 이 두 작품만을 남겨뒀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추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 김병욱이 일갈한 말속에 담겨 있지 않을까요? 곧 맹목적인 서구 추종이나 예술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이 <아메리카 타임 지>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겠는가 하는 것이지요.

가만히 보면 이 두 작품 사이에는 서로를 연결해주는 고리 같은 게 있습니다. <공자의 생활난>의 고갱이인 '바로 보마'와,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고 있는 '본다'(4연 1행)와 '응시한다'(4연 3행)에서 드러나는 '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 2연에서 화자가 고백한 '올바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2행) 살아온 길을 덧붙일 수 있겠지요.

이 시대는 극도의 혼란기였습니다. 가공할 현실은 제 몸 하나 추스르는 일조차 버겁게 했지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수영은 자신과 세계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올바르게 보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과 자매격이랄 수 있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에서 화자가 책을 '멀리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지 않을런지요.

스물일곱 살의 젊은 수영은 분명히 치기에 차 있었습니다. 그 자신도 이 시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 자신의 입으로 이 작품을 "나의 마음의 작품 목록으로부터 깨끗이 지워버렸다"(<김수영 전집 2> 334쪽)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세계를 바로 보려는 그의 사려 깊은 태도와 목소리는 '시적 사기'와도 같은 <아메리카 타임 지>에서 조심스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김수영, #<아메리카 타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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