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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생종이에 흑백사진을 곁들이고 표지에 책 띠지도 없으며 가격도 요즘 책들에 비해 절반값이다.
 재생종이에 흑백사진을 곁들이고 표지에 책 띠지도 없으며 가격도 요즘 책들에 비해 절반값이다.
ⓒ 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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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결심을 한 지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아직 도시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귀농을 포기했냐고? 그렇지 않다. 귀농계획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끊임없는 소비를 강요하도록 체계가 잡힌 도시에서의 삶에 염증을 느꼈을 무렵에 귀농한다는 친구의 말에 솔깃했다. 만약에 그때 무작정 내려갔다면 나는 지금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을까?

십중팔구 다시 도시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 이유는 고된 농사에 힘이 부쳐서라기보다는 당시 내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IMF사태로 의기소침했던 당시의 나는 먹고 써야할 돈이 넉넉치 못했고, 농촌정서에 쉽게 동화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내 가족의 울타리만 치면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귀농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초판일이 1998년인 이 책을, 지금이 아니라 귀농열병을 앓았던 그때 읽었더라면 귀농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지 않고, 철저한 마음의 준비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꾼이 된 철학교수로 잘 알려진 윤구병 선생이 변산에 터를 마련하고 농사를 막 시작한 초보농사꾼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담은 <잡초는 없다>(윤구병 저, 보리 펴냄)는 요즘 전 지구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환경파괴와 FTA와 같은 강대국 힘의 논리에 무너지는 식량주권의 위기도 미리 내다보고 있다.

"수출을 많이 해서 나라 밖에서 모자라는 곡식을 사들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너무나 순진하다. 경제 쪽에서만 따지면 이른바 '비교 생산비 우위설'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제교역에서 식량수급을 결정하는 요인은 경제만이 아니다. 정치, 군사, 이념 심지어는 종교에 이르기까지 경제 밖의 여러 요인들이 농산물의 수출입에 개입한다." - p. 228

언젠가(?) 귀농을 할 예정이라서 그동안 농촌과 귀농인들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가까운 사이에는 종종 휴가를 명분으로 며칠씩 머물면서 농사일을 돕는 흉내를 내기도 하지만 대체로 술잔을 기울이는 시간이 많았다. 또 귀농을 했다고 하면 이런저런 인연을 맺고 있는
이들의 방문을 오는대로 다 받다보면 농사일은 뒷전이 되기도 하고, 동네사람들의 따가운 눈총도 감내해야 한다. 하물며 대학교수가 귀농을 했다하니 언론이 그냥 둘 리 없으며,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일은 다반사로 겪어야 했을 터이고, 그 때문에 그를 두고 좋지 않은 뒷말이 흘러다니는 것을 들은 적이 있어서 나 역시 오해를 한 적도 있었다.

"오늘 온 손님들도 오해가 많겠지만 앞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꾸 찾아오고, 그 사람
들도 욕하면서 떠날 것이다. 그리고 윤구병에 대해서 좋지 않은 소리들을 해댈 것이다. 차라리 그렇게 호기심만 있고 몸으로 동참할 뜻은 없는 사람들은 걸러지는 것이 훨씬 낫다. 한 사람에게 잘 해주면 그 사람이 가서 변산에 가니까 변산 사람들 참 친절하더라. 밥도 주고 술도 주고 귀담아들을 얘기도 해주더라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떠들어대어 온갖 떨거지들이 다 모여들 터이니 그러고서야 무슨 일인들 제대로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말로 내 뜻을 전했다." - p.160 


몇년째 텃밭농사를 하면서 화학농약과 비닐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고 있지만,뽑고 돌아서면 어느새 한 뼘씩 올라오는 풀을 보면 몸이 지친다. 때문에 적당히 타협을 하라는 하나의 마음과 처음의 원칙은 지켜야 한다는 또 다른 마음이 대립하기도 했었다.

선택적인 수탈농업이 시작되면서 인간의 편협함 때문에 제 이름과 유용하게 쓸모가 있음에도 거두고자 하는 작물 외에는 뭉뚱그려서 잡초라고 불리게 된 야생의 풀들이 원래는 흙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그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농사를 해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작물과 풀이 적절하게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잡초라는 말을 함부로 써서는 안되는 이유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변산의 초보농부는 어떠했을까?

"마늘밭을 온통 풀밭으로 바꾸어놓은 그 괘씸한 '잡초'들을 죄다 뽑아던져 썩혀버린 뒤에야 그 풀들이 '잡초'가 아니라 별꽃나물과 광대나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정갈하게 거두어서 나물로 무쳐 먹고 효소 식품으로 바꾸어도 좋을 약이 되는
풀들을, 내 손으로 그 씨앗을 뿌리지 않았는데도 돋아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대시하여 죄다 수고롭게 땀 흘려가며 뽑아 버렸으니 어리석기도 하지." - p.91 -


혹자들이 '잡초가 없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잡초라고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인위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무언가를 기르는 사람들은 나머지 모두를 잡초로 본다. 여기에는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쓸모없는 것이라는 편견이 담겨있다.

변산농부 윤구병은 이것이 기르는 문화에서 만드는 문화로 바뀌면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삶에 여러가지 문제들로 나타났음을 알게됐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농업은 '기르기'가 중심이 되는 삶의 길이라고 봤다. 학교의 문제도 자연과 삶터에서 동떨어져 실험실 형태로 유지된 것에서 생겨났다고 봤다. 그래서 햇볕과 공기, 흙과 물 땅속의 유기물과 무기물이 전체로 참여하는 실험학교를 구상하게 된다. 그것이 지금의 변산공동체학교로 자리 잡았다.

돈이 사회와 학교에 끼어들어 사람의 길을 벗어나게 하는 자본주의에 문제를 느꼈던 한 철학교수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변산에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를 이뤄가는 과정들을 수필과 일기로 기록해서 묶어낸 <잡초는 없다>. 이 책은 요즘 끊임없이 터지는 우리사회의 문제들이 어디서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 자연과 공존하며 농사 짓는 농사꾼의 삶을 통해 올바른 삶의 길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 잡초는 없다. 윤구병(동화작가) 저, 보리 펴냄, 1998.05.15, 6800원



잡초는 없다

윤구병 지음, 보리(1998)


태그:#윤구병, #변산공동체, #농부, #잡초,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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