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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상징 대궐. 수양과 안평의 대권경쟁은 정보 전쟁이었다. 안평의 참모 이현로는 감으로 정보를 수집했고 수양의 장자방 한명회는 철저히 현장에서 정보를 채집했다. 정보의 양과 순도에서 밀린 안평은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 궁궐 왕권의 상징 대궐. 수양과 안평의 대권경쟁은 정보 전쟁이었다. 안평의 참모 이현로는 감으로 정보를 수집했고 수양의 장자방 한명회는 철저히 현장에서 정보를 채집했다. 정보의 양과 순도에서 밀린 안평은 참담한 결과를 맞았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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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이 해주 온천 행차에 나섰다. 온양과 해주에는 왕실 온정이 있다. 주로 왕실 여인들이 애용한다. 왕실 여인은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정신적으로 학대 받고 육체적으로 홀대 받았다.

왕실 여인에게 있어 임금은 사적으로 '내 남자'이지만 공적으로는 군신관계다. 임금이 나 아닌 다른 여자를 총애하고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내도 아무 소리 못하고 홀로 밤을 보내야 한다. 왕실의 여자도 인간이기에 끓어오르는 비등점을 제어하지 못해 감정을 표출하면 '투기녀'라는 딱지가 붙는다. 남성 중심사회 전가의 보도 칼을 맞을 위험 0순위. 퇴출대상 1호다. 하물며 왕인데 말해 무엇하랴. 그렇게 시달린 몸과 마음을 따끈한 온천물에 담그면 모든 것이 평화스러워진다.

왕실 온천에 임금과 세자와 왕자 등 남자들이 가는 경우는 특별하다. 피부병과 안질 치료다. 진단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그 시절의 창병과 종기는 성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조선에는 상국 사신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들은 칙사 대접을 원했고 공공연하게 여자를 요구했다. 천출여인들을 공여하던 조정은 급기야 수청단을 꾸렸다. 관기의 시초다. 그들을 통해서 성병이 만연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그 녀석이 하늘같이 높은 대궐 담장을 넘어 궐내에도 스며든 것이다.

임금행차 못지않은 온천행, 고을 수령들이 몰려나와 눈도장 찍기에 바빴다

왕실 여인들이 즐겨 찾는 온천을 안평이 찾아가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평양에 그의 애첩 박비가 있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출발할 때 연통을 넣어두면 박비가 해주에 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안평의 온천 행차에는 60여 명의 하인이 따르고 승려 6명이 역마를 타고 뒤따랐다. 임금의 대가(大駕) 행렬 못지 않은 대단한 규모다. 역마는 병조가 관할하는 국가 통신교통수단이다. 이러한 국가 시설을 안평이 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안평의 해주 행차는 김말생이 기획했다. 그가 연도의 수령들에게 통문을 띄웠다. 고양현과 임진현 수령은 물론 오가는 연도에서 떨어진 교하현과 적성현 수령까지 선물을 바리바리 싸가지고 찾아와 눈도장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안평은 그들을 활쏘기와 사냥에 동참시키며 등을 토닥여 주었다.

개성유수의 환대를 받은 안평이 해주에 도착했다. 해주는 황해감영이 있는 곳이다. 공무를 전폐한 황해도 관찰사 이축이 극진히 대접했다. 안평은 관찰사에게 안장 갖춘 말을 내려주고 판관 김양에게는 옷 1습을 주었다. 기생과 악대가 동원된 잔치가 벌어지자 옷을 선물 받은 판관 김양이 내려준 옷을 입고 들어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밤이 이슥해졌다. 박비가 기다리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서둘러 잔치를 파한 안평이 별당을 찾아갔다. 거기에는 박비가 꽃단장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곱다. 오랜만에 봐서가 아니다. 진심 곱다. 천하의 한량 안평이 빠질만 하다. 박비와 해후한 안평은 운우의 정을 나누며 밤이 깊어갔다.

혜원 신윤복이 그린 사대부들의 잔치 청금상련(聽琴賞連). 고목나무가 드리워진 후원에 연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피어있다. 늘어뜨린 갓끈과 허리에 두른 요대로 보아 왕족이나 당상관 이상 사대부들의 은밀한 잔치다. 의관이 파탈한 것이 예절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자유분방함이 풍긴다. 혜원은 후한의 풍류재상 공북해의 ‘좌석에는 손님 가득하고 항아리에는 술이 비지 않으니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는 말을 화제(畵題)로 차용했다.
▲ 청금상련 혜원 신윤복이 그린 사대부들의 잔치 청금상련(聽琴賞連). 고목나무가 드리워진 후원에 연못이 있고 못에는 연꽃이 피어있다. 늘어뜨린 갓끈과 허리에 두른 요대로 보아 왕족이나 당상관 이상 사대부들의 은밀한 잔치다. 의관이 파탈한 것이 예절이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자유분방함이 풍긴다. 혜원은 후한의 풍류재상 공북해의 ‘좌석에는 손님 가득하고 항아리에는 술이 비지 않으니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라는 말을 화제(畵題)로 차용했다.
ⓒ 간송미술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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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로가 해주를 찾아왔다. 그는 공직에 있는 몸으로 안평을 수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사람들의 눈에 띄여 공론화 되면 대간의 탄핵을 받을 수 있다.

"한성을 비우고 이렇게 나와 계셔도 괜찮겠습니까?"
"수양 형이 전하 혼인문제에 골몰하고 있는데 무에 걱정이 되겠나?"

안평은 수양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맏형이 세상을 떠난 집안의 맏형대행으로서 조카의 혼인문제를 진정으로 고민하기를 기대했다.

"아무래도 저들의 행태가 수상합니다. 특히 수양대군이 관심 없어 하던 전하에 대해 가례를 천 하는가 하면 뜬금없이 봉장을 올리는 것으로 보아 무슨 함정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뜬 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정확한 증험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 하라."

안평이 짜증을 냈다. 박비와 보내야 할 시간이 아쉽다는 것이다.

"소인이 정보를 얻고자 명례궁에 들어갔다가 수양대군에게 혼쭐만 나고 돌아왔습니다."
"자네에게 그런 용감성이 있었나? 놀라운 걸."
"황송하옵니다."
"명운은 하늘이 정할 터. 걱정할 것 없다. 자, 근심일랑 치우고 술이나 받게."

안평이 술잔을 내밀었다.

"술잔을 받기 전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좋은 소리면 하고 나쁜 소리면 하지마라."
"희소식입니다."
"그래?"

안평의 호기심이 귀를 쫑긋하게 했다.

임금님이 내려준 말을 타고 싶습니다

"지난밤 꿈에, 나리를 뵙고 최근의 정치정세에 대하여 의논을 드리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문밖에 나와 말을 탔는데 내승마였습니다."
"내승마(內乘馬)라고 했나?"
"네, 내승마입니다."
"임금이 타던 말을 하사받고 싶은 소원이 현몽했나 보군."
"소인에게 언제 그런 호사가 있겠습니까?"
"기다려보게, 그런 날이 올 걸세."
"황공하옵니다."

이현로의 얼굴에 황홀한 꿈이 지나갔다.

"그래, 내승마를 타고 어떻게 했나?"
"길을 가는데 큰물이 나 내(川)가 넘쳐났습니다. 말을 탄 4, 5인이 앞에서 인도하여 내를 건너는데 물이 깊어서 안장과 다래(韂)까지 물이 차올랐으나 무사히 건넜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서대(犀帶)를 바치겠다.' 하여 내가 이를 받아서 착용하고자 하니 허리에 요대(腰帶)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나리께서 뒤에 따라오시므로 내가 나리께 드리니 나리께서 말을 재촉하여 달려와 이를 받았습니다."
"범상치 않은 꿈이군,"

안평이 깊은 사념에 잠겼다.

"나으리! 대위가 어찌 쉽겠습니까만 상제가 이끌어 주시면 어렵지도 않을 것 같습니다."
"대위(大位)라 했나?"
"네, 그렇습니다. 나으리!"
"대위란 멀리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 있을 수도 있고 가까이 있지만 멀리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눈앞이라?"

안평이 이현로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네, 나으리!"
"바로 눈앞에 있어도 서두르다가는 발톱에 할퀴울 수 있다."
"발톱이 안 보입니다."
"내 눈에는 보이는데 자내 눈에는 안 보인다?"
"네, 그렇습니다."
"내 눈보다 자네 눈이 더 좋은가보군. 하하하!"

안평이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밤은 즐거운 밤이야."

안평과 이현로는 밤이 지새는 줄 모르고 마셨다.

임금의 자리
▲ 어좌 임금의 자리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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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한명회가 명례궁을 찾았다.

"따끈따끈한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무슨 소식인데?"
"해주에 간 안평대군이 평양기생 치마폭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답니다."
"남자라면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수양은 의외로 담담했다.

"좋은 말도 싸가지 없게 하는 놈이 있는데 이현로가 그렇습니다."
"그 자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러느냐?"

수양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명회를 바라보았다.

"아, 글쎄 대위가 눈앞에 있다고 안평에게 아부를 떨었다 합니다."
"대위라 했나?"
"네, 분명 옥좌라 했답니다."
"어좌가 무슨 장난감 의자인줄 아나? 이런 고얀 놈이 있나?"

수양의 얼굴이 울그락프르락 험악해졌다. 한명회의 정보 수집력은 대단했다. 개성과 평양에 첩보원을 깔아놓고 안평의 일거수일투족을 실시간 접수했다. 심지어 황해도 관찰사가 펼친 잔치에 무슨 안주가 올라왔고 관찰사와 나눈 대화는 물론 평양기생 박비와 나눈 베겟머리 속삭임까지 한명회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한방도 똑똑히 들어라. 태조께서 이 나라를 세운지 60년. 방계로 흐를 위기를 태종대왕은 손에 피를 묻히며 극복했다. 허나, 오늘 현재 또 다른 고비에 서있다. 그 누구라도 대위를 넘보는 자가 있다면 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한방은 확실히 기억해 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땅거미가 짙어갈 무렵 한명회는 명례궁을 나섰다. 군기시를 돌아 광통교를 건너던 한명회가 다리 위에 멈추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메마른 건천에 물은 없었으나 모래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지나는 행인이 있으면 누구라도 붙잡고 '천하의 호랑이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승천하려는 용이 내 손에 있소이다'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아쉬웠다.

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에 달 가듯 달에 구름 가듯 보름달이 구름 속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보름달처럼 환한 웃음이 그려졌다. '달밤에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할까봐 손으로 입을 가렸으나 웃음은 살아있었다. 자신의 연출에 따라 움직여준 수양도 고마웠고 한 치의 오차 없이 행동해 준 안평은 더더욱 예뻐 보여 한명회의 얼굴에 그려진 웃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태그:#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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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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