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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정도 / 사도

..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인 것이다 ..  <권중희-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돌베개,1993) 18쪽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처럼 '-적'을 붙여 버릇하는 우리들입니다. "현실에 걸맞느냐 걸맞지 않느냐"라든지 "현실에 맞느냐 안 맞느냐"라든지 "현실성이 있느냐 없느냐"처럼 추스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라든지 "현실을 따르느냐 마느냐"라든지 "이룰 수 있는 일이냐 아니냐"라든지 "이루어질 수 있느냐 없느냐"처럼 가다듬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그예 익숙한 대로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익숙하면서 올바른 말투를 찾지 못하고, 익숙한 가운데 고운 글투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올바른 말투에 익숙해지도록 새길을 갈고닦지 못합니다. 고운 글투에 익숙해지도록 새롭게 마음먹지 못합니다.

 ┌ 정도(正道) : 올바른 길. 또는 정당한 도리
 │   - 정치의 정도 / 언론의 정도 / 정도를 걷다 / 역사의 정도가 있지 않습니까
 ├ 사도(邪道)
 │  (1) 올바르지 못한 길이나 사악한 도리
 │   - 사도에 빠지다 / 정도(正道)를 부지하고 사도를 배척한 뜻
 │  (2) = 사교(邪敎)
 │   - 지배자들에 의해 사도라 배척되었으나
 │
 ├ 정도냐 사도냐가 문제인 것이다
 │→ 바른길이냐 굽은길이냐가 문제이다
 │→ 옳은길이나 그른길이냐가 문제이다
 │→ 참길이냐 거짓길이냐가 문제이다
 └ …

국어사전에 '-道' 뒷가지는 안 실렸습니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쓰이는 뒷가지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을 가리킬 때에 '人道-車道'처럼 쓰고, 보기글처럼 어떤 뜻을 품고 나아갈 바를 가리킬 때 쓰입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면 '사람길'이라 하면 되지만 '사람길'처럼 말하거나 글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을 놓고는 '찻길'이라 일컫는 사람은 꽤 많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전거가 다니는 길이라면 '자전거길'입니다. 버스가 다니는 길이라면 '버스길'이 될 테지요. 공무원이든 기자이든 지식인이든 으레 '자전거 전용도로(專用道路)'나 '버스 전용도로'처럼 길게 말을 늘여붙이지만, '자전거길'이나 '버스길'이라고 하면 넉넉합니다.

생각해 보면, 배가 다니는 길이기에 '바닷길'이고, 비행기가 다니는 길이라서 '하늘길'입니다. 길이 넓어 '큰길'이거나 '한길'이요, 골목골목 나 있어 '골목길'이고, 빨리 질러 갈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로 마음을 열거나 틀 수 있기에 '말길'이고, 종이에 적는 글로 나누는 마음이라 한다면 '글길'을 열거나 튼다고 할 만합니다.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길일 때에는 '마음길'일 테고, 생각과 생각이 어우러지는 길이라 하면 '생각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사람이든 자동차이든 자전거이든 비행기이든 배이든 철도이든 다니는 곳을 놓고 '-길'이라는 낱말을 뒷가지로 삼으면 넉넉합니다. 전철은 '전철길'이고, 지하철은 '지하철길'이며 철도는 '철길'입니다. 그러고 보니, 일하러 오가는 길은 '출근길-퇴근길-출퇴근길'이라 하고, 학교를 다니는 길은 '학교길'이라 합니다. '출근로'나 '학교로'라 하는 일은 없습니다. 다만, '통학로'라는 말을 쓰면서 '-路'를 붙잡는 사람은 제법 있습니다.

 ┌ 바른길 / 옳은길 / 참길
 └ 굽은길 / 그른길 / 거짓길

이 보기글에서는 '바른-'이나 '옳은-'이나 '참-'을 앞가지로 삼고 '-길'을 뒷가지로 삼아 봅니다. '굽은-'이나 '그른-'이나 '거짓-'을 앞가지로 삼으며 '-길'을 뒷가지로 삼아 봅니다. '정도'와 '사도'라는 한자말만 지으란 법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깜냥껏 '바른길'과 '굽은길'이라는 토박이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참길'과 '거짓길'이라는 낱말을 새로 빚을 수 있고, '좋은길'과 '궂은길'이라는 낱말 또한 얼마든지 새로이 일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아듣기에 좋으면서, 우리 말살림을 북돋운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서로서로 나누기에 넉넉하면서, 우리 글살림을 키운다면 그지없이 반갑겠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정도'나 '사도' 같은 낱말을 쓰려 한다면, 한글로 적어 놓아도 알아보기 어렵지만, 한자를 밝혀 놓는다고 알아보기에 좋을까요. 한자를 밝힌다고 하면,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흐뭇할 만한 말이면서, 우리 이웃한테도 흐뭇하며 아름다울 말을 슬기롭게 찾아나서고 보듬고 껴안아야지 싶습니다.

ㄴ. 삭도

.. 정작 제주도는 환경단체와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라산 관광 활성화를 명분으로 윗세오름에서 정상까지 삭도를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  <김경애-이곳만은 지키자, 그 후 12년>(수류산방,2007) 249쪽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不拘)하고"는 "전문가들이 반대하는 데에도"나 "전문가들이 반대하고 있지만"이나 "전문가들이 반대하는 목소리를 듣지 않고"나 "전문가들이 반대하는 목소리에는 귀를 닫고"로 다듬습니다. "한라산 관광 활성화(活性化)를 명분(名分)으로"는 "한라산 관광을 키운다고 내세우며"나 "한라산 관광에 도움이 된다고 하면서"나 "한라산 관광을 북돋아야 한다면서"로 손봅니다. '정상(頂上)'은 '꼭대기'로 손질하고, '포기(抛棄)하지'는 '버리지'나 '그만두지'나 '멈추지'로 손질하며, '설치(設置)하겠다'는 '놓겠다'나 '닦겠다'나 '마련하겠다'로 손질해 줍니다.

 ┌ 삭도(索道)
 │  (1) = 밧줄. '밧줄'로 순화
 │  (2) [건설] = 가공 삭도. '하늘 찻길'로 순화
 │   - 공중을 달리는 삭도의 탄차 소리가 유달리 청각을 건드린다
 ├ 가공삭도(架空索道) : [건설] 공중에 설치한 강철 선에 운반차를 매달아 사람
 │     이나 물건 따위를 나르는 장치
 │
 ├ 삭도를 설치겠다는
 │→ 하늘찻길을 놓겠다는
 │→ 케이블카를 마련하겠다는
 └ …

제주섬 한라산에 놓겠다고 하는 '하늘찻길'을 놓고 '삭도'라고도 가리키지만, '케이블카(cable car)'라고도 일컬으며, '로프웨이(ropeway)'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케이블카'이든 '삭도'이든 우리한테 걸맞지 않은 낱말이니 '하늘찻길'로 고쳐서 쓰도록 새 낱말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새 낱말을 제대로 살피면서 올바로 쓰는 사람을 만나기란 몹시 힘듭니다. 제주섬 공무원이든 개발업자이든, 이 같은 낱말을 살피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들 스스로 국어사전이나마 한 번쯤 뒤적여 보지 않습니다.

제주섬 한라산 '삭도-케이블카-로프웨이' 소식을 다루는 기자도 매한가지입니다. 이 같은 낱말을 그대로 기사로 다루어도 되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니, 돌아볼 틈이 없겠지요. 더욱이, 공무원이나 개발업자가 쓰는 낱말을 그대로 써야 한다고 생각할 테지요. 그러면, 적어도 묶음표를 치고 '삭도(하늘찻길)'라든지 '케이블카(하늘찻길)'이라고는 적어 놓아야 할 텐데, 이렇게 기사를 쓰는 기자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신문기자와 방송기자들은 기사쓰기를 하면서 국어사전을 몇 번이나 뒤적여 보고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삭도'이든 '케이블카'이든 우리가 쓰기에 바람직하지 않다지만, '케이블카'는 '버스'나 '택시'처럼 고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늘찻길'이 아직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 사이에 스며들기 어렵다면 '케이블카'를 그대로 쓸 때가 한결 낫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삭도'는 어떠할까요. '삭도'라는 낱말도 '케이블카'처럼 그대로 써도 괜찮은가요. 사람들한테 '삭도'라고 말할 때하고 '케이블카'라고 말할 때, 어느 때 알아듣기에 나을는지요.

 ┌ 밧줄길 / 쇠밧줄길 / 하늘찻길
 └ 삭도 / 케이블카 / 로프웨이

'케이블카'와 같은 뜻으로 쓰고 있는 '로프웨이'란 한 마디로 '줄(로프) + 길(웨이)'입니다. 우리 말로는 '줄길'입니다. 영어로 적어 놓아서 그렇지, 남다르다 할 만한 뜻이 안 담긴 낱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은 '쉬운 우리 말로 적은 이름'은 낯설거나 어설프거나 어줍잖다고 받아들이면서, '쉬운 영어로 적은 이름'이든 '어려운 영어로 붙인 이름'이든 영어로 적어 놓으면 그럭저럭 쓸 만하거나 꽤나 쓰임직하다고 받아들이고 맙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아끼는 사랑길을 걷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글을 갈고닦는 믿음길을 가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일으키는 나눔길을 펼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글을 살찌우는 고운길로 접어들지 못합니다. 하루하루 벼랑길로 치닫고, 나날이 내리막길로 굴러떨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태그:#외마디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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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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