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인민군이 낙동강을 넘었다는 최군의 말에서는 과장이 느껴졌다. 그의 말에는 증거나 근거가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인민군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다. 분명히 미군 지상군이 투입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황에 변동이 없는 것을 보면 인민군의 능력을 다시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일본제국도 무릎을 꿇렸던 미국이 아니던가? 정치세력의 잘잘못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인민군의 선전(善戰)에 민족적 긍지감이 일었다.

"공화국에는 탐관오리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즉각 추상같은 응징이 따르니까요."

최군은 인민공화국에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김성식은 최군의 전공이 법학이었음을 상기했다.

"재판의 공정성이나 객관성을 보장하는 장치는 어떠한가? 이를 테면 삼권분립이라든지 삼심제 같은 것은 마련되어 있나?"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필요한 것입니다. 그때그때 인민정권에 잘 봉사할 수 있는 판결이라면 그것이 최상의 것입니다."

기실 최군은 인민공화국의 법 제도에 대해 상세히 아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최군은 인민정권에 봉사할 수 있는 판결이면 무조건 최상이라는 식의 무모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성식은 자기 소감을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탐관오리가 일소되고 부정부패가 근절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 하지만 부정부패라는 것이 응징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걸세."
"그렇기에 정치 사회 조직을 치밀하게 해 놓은 것입니다."

"시스템으로 부정부패를 막는다?"
"그렇습니다."

최군의 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부정부패는 구성원들이 모두 높은 윤리·도덕의식을 지향한다면 자연 일소되는 것이었다. 공자·맹자의 이른바 왕도정치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그런 사회가 실제로 존재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사회주의에서는 부정부패를 일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고 최군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었다. 김성식은 사회주의의 법과 제도를 공부해 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아무튼 신념과 신뢰를 갖고 일할 수 있는 체제와 제도를 만났다니 다행이군."

돌아오는 길에 김성식은 자기에게는 신념과 능동성이 결여되어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서 민심이 시나브로 돌아서고 있었다. 인민군이 사흘 만에 서울을 함락시키자 지하에서 나와 영웅처럼 행세했던 사람들과 좌익인 체하며 투쟁경력을 뽐내던 어중이떠중이들의 황금시대는 분명히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공산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대충은 알아가고 있었다. 정치 체제란 대한민국이나 인민공화국이나 마찬가지로 인민을 지배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을 사람들은 깨달아 가고 있었다.

인민을 위한다는 정치가 실제로는 인민에게 각박했던 데다, 미군이 참전하고 폭격이 우심해지자 사람들은 세상이 다시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추리를 하게 된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공산주의자들은 초초해졌고 그럴수록 민중은 더욱 미련한 체하는 데 이골이 나 있었다.

아이들 노래도 조심시켜야 하는 세상

김성식은 마당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둘째 목이가 부르면 막내 봉이가 화답했다. 정숙은 아이들을 타일렀다.

"그 노래는 지금은 부르면 안 돼."

아이들은 정숙의 말을 못들은 체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엄마의 얼굴이 굳어지자 아이들도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는지 아빠에게 와 묻는다.

"아빠, 이 노래 부르면 안 되는 거지?"
"알면서 왜 불렀니?"
"왜 안 되는지를 몰라서."

김성식이 난감해 하자 정숙이 끼어들었다.

"순사가 잡아간다고 했잖아."

막내가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용진, 용진 어서 나가자. 한 손에 총을 들고…."

그러자 형이 즉각 막내의 노래를 제지시켰다.

"봉이야, 그 노래도 안 된댔어!"
"그럼 난 뭐 부르라고?"

막내는 형에게 대들며 울음을 터트렸다.

"봉이야, 이걸로 해. 형아가 불러 볼게."

그래도 목이는 두 살 더 먹은 형이라고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막연히나마 알고 있는 듯했다. 막내는 울음을 그치고 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장백산 굽이굽이 피어린 자국."
"난, 그건 모른단 말이야."

막내는 다시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밤하늘이 어두운 이유

저녁 무렵 조수현은 이두오를 찾아갔다. 배 향기가 지상에 내려와 흙 내음과 섞이는 시간이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밤하늘의 별이 총총해졌다. 그날따라 유난히 화려한 별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흥에 겨운 듯 이두오는 별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서양 사람들은 스타라고 하지만 우리는 별이라고 합니다. 스타와 별에는 뚜렷한 어감의 차이가 있습니다. 스타는 강렬히 반짝거리지만 별은 아스라합니다. 밤하늘에는 무수한 별이 있습니다. 물론 가까이 있는 별도 있고 멀리 있는 별도 있습니다. 당연히 가까이 있는 별은 말 그대로 '스타'처럼 반짝거리고 멀리 있는 별은 어감 그대로 '별'처럼 아스라합니다.

가까이 있는 별은 파란색을 냅니다. 반면 멀리 있는 별은 붉은색을 띱니다. 이것은 빛의 파장 때문입니다. 파란 빛은 파장이 길고 붉은 빛은 파장이 짧지요. 그렇다고 해서 서양인들은 가까운 파란 별만 보고 동양인들은 멀리 있는 붉은 별만 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것은 동·서양인의 기질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서양인들에게는 언제나 강한 것을 선택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반면 동양인들은 이면의 것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동·서양이 각각 '파란 스타'와 '붉은 별'로 갈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어느 별이든 별 하나가 내는 빛의 양은 어마어마합니다. 그리고 우주에는 그런 별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럼에도 왜 밤하늘은 어두울까요? 대부분의 별이 멀리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내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멀어질수록 별빛은 약해집니다. 다시 말해 '파란 스타'가 '붉은 별'이 되는 것이지요. 별의 밝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멀리 갈수록 별 하나하나의 빛은 약해지지만 별의 전체 개수는 반대로 많아집니다. 만약 우주가 균일하다고 가정한다면 밤하늘 별의 개수는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주공간은 거리에 상관없이 밝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밤하늘은 어둡습니다. 왜일까요?" 


#대한민국#인민공화국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