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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별과 붉은별

 

김성식은 학교로부터 재임용이 보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옆 동네에 사는 철학과 교수가 직접 와 전해준 것이었다. 말이 듣기 좋게 보류지 그것은 파면이나 다름없었다.

 

"사회과학 계통 선생님들은 사관(史觀)의 문제도 있고 해서..."

 

철학과 교수는 미안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이명선의 말을 전했다. 자기도 무진 애를 써 보았지만 의용군 지원 건 이후 갑자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명선은 그에게 협박의 말을 전하러 철학과 교수를 보낸 것 같았다.

 

"직장에서 파면된 사람에 대한 모종의 조치가 있을지도 모르니 각별히 자중해야 할 것이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자중이라고요?"

"....."

 

철학과 교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말 사돈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성식은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철학과 교수가 일어나며 말했다.

 

"요즘 신문에 수원과 대전과 영동에서 국군과 미군이 무고한 사람을 대거 학살했다는 점을 유달리 강조하고 있는데, 아마 이쪽에서도 그런 일을 하려고 미리 터를 닦아 놓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것 역시 협박성 발언으로 들렸다.

 

윤리와 소유 개념도 바꾸는 전쟁

 

김성식은 점심을 굶은 채 집을 나섰다. 이제 학교에서도 밀려났는데 집에서 빈둥거리기만 하는 일이 좋을 리도 없을 것이고 누님 댁 식구들의 안부도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시간을 걸어 명륜동에 이르렀다.

 

조카 홍규가 혼자 집을 보고 있다가 예절 바르게 인사하며 그를 맞이했다. 하지만 조카의 얼굴에는 영양 부족의 표시가 역력했다.

 

"무얼 먹고 지내냐? 더러 굶기도 하지?"

"엄마가 나물장사를 하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자전거를 팔아서 그럭저럭 지내왔으나 앞으로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고생하시는 엄마 덕에 나물은 먹고 지냅니다."

 

불과 열 살 안팎의 아이치고는 똑똑하고 심지가 있어 보였다. 날이 더운데다 허기가 밀려와 마루에 누워 있는데, 홍규가 솥에 담긴 무엇인가를 들고 왔다. 배추 시래기를 삶아 된장에 무친 것이었다.

 

"삼촌, 밥은 없지만 이거라도 조금 드시겠어요?"

"너나 먹어라. 나까지 먹으면 모자라지 않겠니?"

 

"마침 팔고 남은 시래기가 있어서, 내일 것까지 제가 삶아 놓은 겁니다."

"정말이냐?"

"그럼요."

 

홍규는 부엌으로 가더니 시래기가 가득 담긴 큰 양은그릇을 들고 와 보였다. 김성식은 한 그릇 폭이나 되는 양을 급히 비웠다. 그가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가 말했다.

 

"외삼촌 네도 양식이 없나요?"

"응. 모자란다."

 

"대학교수도 소용이 없군요?"

"누구나 마찬가지지."

"아니에요. 당원이나 인민군 간부네 집들은 먹고 남을 만치 배급을 타 와요."

 

김성식은 어제 밭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낯선 사람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함부로 호박을 따고 있었다. 주인이 다가갔는데도 그들은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내 밭은 아니지만 굶어 죽을 지경이어서 하는 수 없이 들어왔어요."

 

얼굴을 보니 누렇게들 부어 있었다. 이런 사람들 앞에서 밭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밭이나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따 가시오."

 

김성식은 전쟁이란 윤리와 소유 개념에도 변화를 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에 돌아오니 민청 사무실로 나오라는 통보가 와 있었다. 김성식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직장에서 파면된 자에게 모종의 조치가 있을 거라는 철학과 교수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단 가지 않고 버티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방에 누워 있었다.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숙이 대문으로 나갔다. 그는 대문간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민청에서 보낸 전령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주인 양반이 안 들어오셨어요."

"주인이 없으면 대신 누구라도 얼른 나와야 해요."

 

그는 일단 마음이 놓였다. 아무나 오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닐 터였다.

 

얼마 후 민청에 갔다 온 정숙은 투덜거리며 방으로 들어왔다.

 

"박광태가 앉아 있더라고요. 우리 집 개를 내 놓으래요. 그리고 그런 일 같으면 곧장 말할 일이지, 이 더위에 사람은 왜 오라 가라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개를 내 주는 것도 난감한 일이었다. 부월이는 3년씩이나 함께 지낸 식구 같은 개였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맞받아서 한 번씩 짖어대던 용감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침내 전쟁은 집 안의 동물까지도 옥죄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령이 와서 개를 끌고 갔다. 김성식은 안 가겠다고 버티는 개와, 울상을 하며 개를 따르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착잡하면서도 화가 치솟았다. 물론 개는 군용으로 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산주의의 하수인들과 바닥빨갱이들의 하루 저녁 술안주 감이 될 것이 분명했다.

 

반동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 문제

 

김성식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기는 죄 지은 일도 없고 또 딱히 누가 자기를 잡으러 오지도 않는데, 공연히 겁을 먹고 사람을 의심하며 비슬비슬 피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반동으로 몰리는 기준이 없다는 데에 그의 불안 요인이 있었다. 모든 것이 분명치 않고 그때그때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달라지므로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권력자보다는 오히려 하수인들의 감정에 따라 보통 사람들의 생사가 좌우되고 있었다.

 

불안을 자아내는 온갖 소문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실제로 잡혀 가 소식이 끊긴 사람도 많았고 총살당한 사람도 있었다. 문제는 기준이 애매하다는 데에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설치던 사람도 아직 멀쩡한가 하면 유달리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 사람도 잡혀가 경을 치거나 죽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인공 치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연줄이었다. 인민공화국은 연줄이 없는 사람은 목숨을 무조건적으로 백지 위임해야 되는 사회였다.

 

그의 제자였다가 작년에 월북한 후 이번 서울 해방에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온 최군이 있었다. 공산당의 간부이니 일본이나 미국 방송도 들을 터여서 그에게 가면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만약의 사태에 그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 들었다. 그러나 돈암동까지 가기가 불안하여 미루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약수암 샛길로 하여 정릉 고개를 넘었다. 아무래도 큰 길은 위험할 것 같아서였다. 신흥사를 지나 돈암학교 앞길을 내려오는 그는 거리가 쥐 죽은 듯이 바뀌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혹시 공습경보라도 내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고 불과 두 달도 안 되어 돈암동은 죽음의 거리처럼 스산해져 있었다.

 

"인민군이 낙동강 도하작전에 성공했습니다. 동으로 포항을 확보하고 경주와 울산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제 부산도 풍전등화입니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


#반동#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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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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