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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자 모양의 해변이 이채로운 '여자들의 섬'.
▲ 눈부신 꼬꼬 해변 'ㄱ'자 모양의 해변이 이채로운 '여자들의 섬'.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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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따사로운 날, 책이나 읽고, 야구 사이트 들락날락 거리고, 늘어지게 하품 한 번 하고, 배고프면 냉장고에서 아무거나 꺼내 먹는 여행의 휴식로망을 만끽하고 있는 내게 걷잡을 수 없는 행운이 밀려들었다. 한낱 천한 자전거 여행자에게 멕시코 현지 변호사가 손을 내밀 줄이야. 

"여인들의 섬(Isla Mujueres)에 가지 않을래?"
"제가 지금 여기까지 자전거로 달려오느라 피곤도 하고, 오늘은 지인들에게 메일도 보낼 겸 인터넷 좀 해야 하고, 여행기 정리도 해야 하고, 빨래할 것도 많고, 에 또… 복잡하긴 한데, 사실 그깟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당장 가시죠!"

멕시코 국기가 바닷바람에 펄럭인다.
▲ 쾌속 질주 멕시코 국기가 바닷바람에 펄럭인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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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 무헤레스섬에서는 여행자들의 훌륭한 자가 이동수단이 된다.
▲ 골프 캐디카 이슬라 무헤레스섬에서는 여행자들의 훌륭한 자가 이동수단이 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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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터졌다. 한인 후손 집에 머무르고 있는 와중에 그분의 친척이 와서 내게 세계 최고의 휴양지 동행을 제의한 것이다. 하긴 한창 에너지를 과다 분출해야 할 시기에 새까맣게 탄 얼굴에 퍼져있는 청춘이 안쓰럽기도 했겠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행자가 찾는다는 국제휴양도시 칸쿤. 거 얼마나 된다고 집구석에 늘어져서 바다구경도 안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1달러에 부들부들 떠는 자전거 여행자에겐 그저 먼 산.

그래서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기회.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재빨리 외출준비를 했다. 그가 직접 운전대를 잡으니 마치 고급인력 부리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마음을 다 잡았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순간을 즐기자! '샤방샤방', 스무 살 여인네 청초한 눈빛마냥 내 가슴을 세차게 흔들어 놓는 카리브 해의 순전한 자태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전라도 촌놈 향수 달래줄 구수한 개펄의 냄새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투명한 푸른 향기가 눈에 한 가득 잡혔다.

어부의 당당한 기개가 느껴진다.
▲ 월척 어부의 당당한 기개가 느껴진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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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 무헤레스 섬은 칸쿤에서 페리로 약 20분 정도 떨어진 섬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칸쿤만 생각하고 오는데 칸쿤은 이미 전망 좋은 자리에 호텔이 열을 지어 서 있어 그 깊고 그윽한 카리브 해의 풍광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더구나 해변의 소유권마저 호텔들이 사 버린지라 바다 한 번 보려거든 호텔에서 하룻밤을 지내든지 식사를 하든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본주의의 슬픈 자화상이다.

하지만 이슬라 무헤레스는 아직 천연 그대로의 감동을 지니고 있다. 산호초의 날개가 펼쳐진 바다 속은 어쩜 이리도 고운 빛깔을 머금을 수 있는지 새삼 놀라울 따름이다. 스노스쿨링을 하면 꼭 인어공주를 만날 것만 같다. 뱃사공이 되어 노를 저으면 신선놀음이 될 것 같다. 콜라 한 잔 시키고 비치 의자에 누워 있으면 베벌리힐즈 동네가 부럽지 않다. 환상을 심어주는 곳, 여기가 여인들의 섬이다.

여인들의 섬은 여인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다. 1517년,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란 사람이 이 섬에 들어왔을 때 익스첼이라는 작은 마야 여인 조각상들을 발견한 것이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 보통 마야인들과는 달리 이들의 문명이 깊은 산 속이 아닌 바다 건너 섬까지 뻗어있는 것은 눈여겨 볼만하다. 하지만 마야 유적으로 처음 알려진 이 섬이 천혜의 환경을 등에 업고 유적지가 아닌 관광지로 탈바꿈 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카리브 해의 마스코트.
▲ 펠리컨 카리브 해의 마스코트.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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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를 던져주자 갈매기들이 벌떼처럼 몰려온다.
▲ 생동감 먹이를 던져주자 갈매기들이 벌떼처럼 몰려온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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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km의 비교적 짧은 길이의 섬 전체를 둘러보는 데는 반나절이면 족하다. 자전거를 타거나, 이곳만의 특화된 골프 캐디카를 타고 직접 몰고 다니면서 소소한 마야 문명을 둘러보는 것도 섬을 여행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또 열정을 쏟아내고 싶은 밤이 되면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이 모여있는 댄스클럽에 가서 몸을 흔들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으면 어디서나 데킬라 한 잔 주문하고, 섬이 지겨워질 때쯤엔 배타고 낚시를 나가는 것으로 휴식을 즐기면 된다. 이렇게 마음껏 카리브 해의 하늘과 바람과 파도를 몸으로 읽어가며 시간을 잊으면 된다.

하지만 이 섬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바로 꼬꼬 비치(Playa Coco)에서의 시간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가 펼쳐진 이곳은 특이하게도 'ㄱ'자 형태의 겹파도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열 길 물속이 다 비칠 정도로 투명한 옥빛을 자랑한다. 적당히 높은 파도와 살랑거리는 바람에 물에 뛰어들지 않는 사람 없고, 슬며시 섹시함을 부추기는 태양은 남정네나 여인네의 건강한 피부 관리를 위한 선텐욕구를 자극한다. 이럴 때 배나온 솔로남은 보고도 못 본 척, 외로워도 쿨 한 척 바다에 발만 담갔다가 이내 홀연히 저쪽 해변으로 황망히 사라진다. 

자유롭게 물살을 가르는 아이.
▲ 이토록 맑은 해변에서 자유롭게 물살을 가르는 아이.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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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 모래성 쌓아요. 해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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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보드라운 모래가 살갗을 간질이는 해변에 홀로 거닌다는 것이 실수였다. 이것은 실로 자기학대나 다름없다. 그곳에서조차 모두가 쌍쌍이다. 신은 서로 사랑하라고 남자와 여자를 따로 만들어 주셨건만 나에게는 고독을 선택할 권리만 주셨나 보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 잡아봐라~' 드라마라도 한 편 찍어야 하는데 심각하게 우울해 진다.

상대적 박탈감을 통해 현자들이 말했던 인생무상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는다. 여기저기 어디를 봐도 다들 행복해 보이는 연인들뿐이다. 여기 내 옆에 펠리컨들도 엄연히 제 짝이 있는데 난 펠리컨보다도 못하나 싶다. 이래서 아름다운 곳은 가장 슬픈 곳이 된다. '솔로남', 이러다 마음의 병만 얻고 돌아가는 건 아닌지.

같이 간 변호사는 나를 달랠 수가 없었다. 업무차 왔기 때문에 나 혼자만의 자유시간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섬에 머문 4시간이 참 길었다. 어느 덧 이슬라 무헤레스에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늘씬한 미녀를 보며 생각했다. 나중에 남부럽잖게 내 색시랑 꼭 다시 와 진정한 닭살커플의 만행을 보여 줘야겠다고. 그러다 몸짱 미남을 보며 또 생각했다. 아니다, 내 색시랑은 절대 이곳에 와서는 안 되겠다고. 절대 알게 해서도 안 되겠다고.

이스라엘에서 여행 온 두 청년. 칵테일이나 맥주 한 병이면 비치 의자를 전세낼 수 있다.
▲ 짜릿한 맥주 한 병과 달콤한 휴식 이스라엘에서 여행 온 두 청년. 칵테일이나 맥주 한 병이면 비치 의자를 전세낼 수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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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라 무헤레스 섬의 매력은 솔로남을 좌절시키고도 남음에 있다. 외로움을 느끼는 약한 남자보다 고독을 선택한 강한 남자에게만 시간을 잊은 환상적인 매력으로 다가오는 곳. 이렇게 좋은 곳을 혼자만 온 거냐며 스스로 자문해 보지만, 혼자였기에 온 몸으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던 여인네들의 섬이 또다시 한 장의 추억으로 남게 된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멕시코,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칸쿤, #라이딩인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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