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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궁 동쪽에 있는 대정전을 중심으로 열 개의 정이 도열하듯 줄지어 있다.
▲ 대정전. 심양궁 동쪽에 있는 대정전을 중심으로 열 개의 정이 도열하듯 줄지어 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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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궁 서쪽이 황제의 처소와 외국 사신을 맞이하는 외교 행사의 공간이라면 동쪽은 군사의 광장이다. 옥으로 만든 기단위에 세워진 2층 대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좌익왕을 비롯한 정백정, 정남정 등 5개의 정(亭)이 있고 서쪽으로 우익왕과 정황정, 정홍정 등 5개의 정(亭)이 도열하듯 줄지어있다. 각각의 정(亭)에는 만주벌판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팔기군의 깃발이 꽃혀 있다.

대정전은 청나라 건국초기 힘의 상징이었다. 청나라가 이민족을 정벌할 때 출정식이 있었던 곳이다. '이기고 돌아오라'는 황제의 유시를 듣고 군사들이 동문을 향하여 쏟아져 나갈 때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고 대륙이 떨었다.

좌익왕 정에 끌려나온 윤집과 오달제는 초췌했다. 소현세자를 뒤따라오는 청나라 군사들과 함께 오느라 세자보다 5일 늦게 심양에 도착한 윤집과 오달제는 빛도 들어오지 않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오랜만에 햇빛을 바라보니 눈이 부셨다.

용서해줄 것이니 훼절하겠는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황제의 명으로 묻는다."
용골대가 커다란 눈동자를 굴렸다.

“그대들이 화친을 단절하자는 의논을 앞장서 외쳐 두 나라의 틈이 생기게 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중하다. 죽여야 하겠지만 특별히 인명이 지중하여 살려주고자 하니 너희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들어와서 살겠는가?”

"난리 이후에 처자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으니 천천히 들어보고 처신하겠다."

윤집에게는 아들이 셋 있었다. 한성이 함락된 이후 남양으로 갔으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른다. 남양이 청군의 수중에 떨어져 부사가 죽었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이다.

"너는 왜 대답이 없느냐?"
용골대가 오달제를 노려보며 눈알을 부라렸다.

"내가 참고 여기까지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과 노모를 다시 보려는 것이었다. 다시 고국에 돌아갈 수 없다면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속히 나를 죽여라."
오달제의 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저것이 황제가 살려주는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항거하다니 이제는 다시 용서할 수 없다."
용골대의 얼굴에 분노와 함께 싸늘한 미소가 흘렀다. 대빈객 박황과 겸필선 이명웅이 용골대에게 매달렸다. 소현세자는 황제가 친국하지 않는다는 전갈을 받고 참석하지 않았다.

"나이 젊은 사람이 임금과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만 간절하여 함부로 말한 것이니 아무쪼록 용서해 주시오."
용골대가 오달제의 태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박황이 오달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서서(徐庶)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는가? 그대의 노친에게 그대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게 하는 것이 비록 이역에 있다 하더라도 죽었다고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조조가 형주에서 패배하고 서서의 모친을 인질로 잡아 서서를 회유하던 '삼국지' 일화를 거론하며 오달제를 설득했다. 서서는 패업을 맹세했던 유비를 하직하고 노모를 찾아 조조에게로 갔다. 서서는 노모 때문에 절개를 꺾은 것이다.

눈앞에 어른거리는 노모의 얼굴

오달제의 눈앞에 70 노모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어머니'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주름진 손을 내밀 것만 같았다.

"어머니 때문에 절의를 지켜야 하나? 꺾어야 하나?"

갈등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달제도 인간이다.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은 불효라 생각되었다. 허나, 사나이 한 번 먹은 마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고 싶지 않았다. 오달제는 한성에서 끌려오는 길에 아내에게 글을 남겼었다.

정이 깊어 금슬도 좋았었지요.(琴瑟恩情重)
만난 지 두 해도 못되었는데(相逢未二朞)
이제사 멀리 이별하게 되니(今成萬里別)
백년해로 하잔 약속 헛되이 등졌구려(虛負百年期)
길은 멀어 글 띄우기 쉽지가 않고(地闊書難寄)
산이 높아 꿈길 역시 더디겠지요.(山長夢亦遲)
이 내 목숨은 점 칠 수가 없으니(吾生未可卜)
부디 당신 뱃속 아이를 보호해 주오.(須護腹中兒)

절의는 그의 신념이었다. 조국을 떠나올 때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노모의 모습이 눈앞을 가렸다. 오달제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것들이 죽기를 작정했구나. 이봐라, 이자들을 끌어내어 즉시 처형하라."
용골대의 명이 떨어졌다. 청나라 군사들이 달려들어 결박 지으려 했다.

"이보시오. 사나이 죽는 것은 두렵지 않소만 노모에게 편지 한 장은 남겨야 하지 않겠소."
지필묵을 받아든 오달제가 거침없이 써내려갔다.

외로운 신하 의리 바르니 부끄럽지 않고
성주의 깊으신 은혜 죽음 또한 가벼워라.
이생에서 가장 슬픈 일이 있다면
홀로 계신 어머님 두고 가는 거라오.

서문 밖으로 끌려 나간 윤집과 오달제는 처형되었다. 이 때 윤집 나이 서른하나, 오달제 스물여덟이었다. 아까운 동량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이다. 특히 오달제는 유복자가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훗날 우리들은 이들을 홍익환과 함께 삼학사라 기렸다.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훌륭한 희생, 존경받아 마땅하다. 허나 이들의 행적을 되짚어 보면 개운치 않은 역사적 사실이 숨어있다.

주화와 척화로 조정이 들끓던 1636년 11월 8일. 부교리 윤집은 상소를 올렸다.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1개월 전이다.

"명나라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부모의 원수입니다. 신자(臣子) 된 자로서 부모의 원수와 형제의 의를 맺고 부모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임진년(임진왜란)의 일은 조그마한 것까지도 모두 황제의 힘이니 우리나라가 살아서 숨 쉬는 한 은혜를 잊기 어렵습니다." <인조실록>

김상용의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 글씨. 안내판에는 ‘원래 대명일월 백세청풍이 있었으나 대명일월 네 글자는 일제시대에 집을 짓느라 훼손되었다.’라고 써있다.
▲ 백세청풍. 김상용의 집터에 남아있는 백세청풍 글씨. 안내판에는 ‘원래 대명일월 백세청풍이 있었으나 대명일월 네 글자는 일제시대에 집을 짓느라 훼손되었다.’라고 써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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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한과 마찬가지로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황제의 은혜가 골수에 사무쳐 있다. 재조지은(再造之恩), 존주양이(尊周攘夷), 대명일월(大明日月)은 사대부들의 정치철학이었고 신앙이었다. 명나라는 국가의 상위개념이었다. 이것이 조선의 비극이었다.

국가의 기본은 국리민복(國利民福)이다.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이 외교와 국방이다. 국가를 보존하기 위하여 전쟁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귀결점은 국가 이익이다. 외교와 국방은 국가의 하위개념이다.

당시대를 살았던 삼학사는 물론 조선 개국부터 현재까지 244년. 병자호란 이후 200여년. 조선 사대부들 머릿속에는 당파를 떠나 오로지 명나라만 있었다. 명나라가 세계의 전부였다.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갖추지 못했다. 눈을 뜨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은 것이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유일사상만을 강요했다.

역사는 오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위하여 존재한다. 당 시대의 사람들은 주연과 조연으로 등장할 뿐, 역사적인 관점에서 당시대를 바라볼 수 없다. 조선 사대부들 역시 그렇다. 그들이 그토록 숭상했던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 패망했다. 멸망한 명나라의 뒷모습을 붙잡고 대명일월 백세청풍을 꿈꾸었다. 청나라 역시 세세년년 가지 못하고 망했다.

풍향계와 풍속계의 성능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사대? 좋다. 열강의 틈바구니에 살아가는 약소국의 최선이 아닌 차선책이라면 주변을 감싸고 있는 세력의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 풍향계와 풍속계의 성능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한다. 동물적인 감각이 필요하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생존전략이다. 자존을 버린 자의 숙명이다. 오늘의 거울에 당시를 비추어 볼 때 당시 사대부들의 감각이 우수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삼학사가 희생된 배경에도 국내 정치상황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 남한산성에서 항전하던 정축년 1월 28일. 항복하기 2일전이다. 이때의 상황을 <산성일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김류, 홍서봉, 이홍주가 입시(入侍)하여 임금에게 김류가 쳥하되, 예조판셔 김상헌과 니조참판 뎡온, 젼(前)대사간 윤황의 아들 윤문거 밋 오달졔, 윤집, 김슈익, 김익희, 뎡뇌경, 니행우, 홍탁 등 열 명을 다 젹진에 보내게 쳥하니 대개 젹이 홍익한 밧긔 허하나니 업는 고로 화친을 허치 아니미오 여러 사람 취사하기 어려워 대되 쳥음과 김류, 최명길도 더브러 동심(同心)하고 쳥음의 말삼이 김뉴를 침노한 연괴러라." <산성일기>

영의정 김류와 좌의정 홍서봉, 우의정 이홍주가 임금을 청대하고 항복을 요구하는 청나라에 화친의 징표로 홍익한 하나만 내보내면 우리의 진심을 의심할 것이니 묶어서 보내자고  김류가 청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안을 김상헌과 최명길, 김류가 지지했다는 것이다.

청음 김상헌은 척화론으로 최명길과 각을 세웠지만 김류와도 앙숙이었다. 김류는 매사에 따지고 드는 김상헌이 눈에 가시였다. 이러한 기회에 정적을 제거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간의 젊은이들을 끼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결과는 김류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대사간 박항이 영의정 김류에게 따졌다.

"젹진의 보내기 비록 두어 사람이라도 책임을 면하려든 엇지 여러 사람의 니라리오. 오교리와 윤집이 샹소하여 힘써 쳑화하여시니 이 두 사람을 보내기 차마 못할 바로되 만히 보내기의셔 나흐리다." <산성일기>

홍익한 하나 가지고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두어 사람 보내면 될 일을 왜? 열 명이나 보내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윤집과 오달제는 임금과 하직하고 자진하여 산성을 나와 청나라 군영에 인계되었고 심양에 끌려와 처형되었다. 척화를 주장했던 영수급 우두머리는 빠지고 젊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이다.

윤집과 오달제가 처형된 훗날 유백증이 통박했다.

"척화를 주장한 사람이 당해야지 젊은 사람이 무슨 죄냐?"


태그:#소현세자, #백세청풍, #대명일월, #성리학, #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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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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