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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 심양 황성의 남문이다
▲ 남문. 심양 황성의 남문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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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일행은 용골대의 뒤를 따랐다. 남탑을 지나고 황궁이 가까워오자 거리는 제법 번화했다. 갖은 방물을 쌓아놓고 파는 전(廛)이 있는가 하면 지나는 행인들도 많았다. 거리에는 손이 묶인 포로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먼저 도착한 조선인 포로들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소현은 가슴이 미어졌다.

얼마쯤 갔을까? 눈앞에 숭례문보다도 훨씬 큰 대문이 떡 버티고 있었다. 남문이었다. 귀마루가 위로 말아 올라간 모습이 전형적인 청나라 건축물이었다. 문 앞에는 붓과 책을 파는 유리창이 많았다. 남문에서 오른쪽으로 꺾은 용골대는 얼마 가지 않아 멈췄다.

“세자와 대군께서 거처할 집을 짓고 있으니 당분간 여기에서 묵도록 하시오.”

동관이었다. 동관은 명나라를 드나들던 조선 사신들이 묵던 숙소였다. 땅거미가 짙을 무렵에 도착한 세자 일행은 부산스러워졌다. 고국에서 가져온 짐바리를 들이고 식량을 내리느라 한동안 북새통을 이루었다.

심양의 하늘 아래 잠 못 이루는 왕세자

소현은 모처럼 온기가 있는 방구들에 몸을 뉘였다. 한성을 떠난 지 얼마이던가? 60일만이었다. 1700여리 머나먼 길을 오는 동안 대부분 노숙이었다.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는 어떻게 하고 계실까? 낮에 봤던 조선 백성들은 어디로 끌려갔을까?”
몸을 뒤척이다 뜰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에 초열흘 밝은 달이 휘영청 걸려 있었다.

“저 달은 아바마마도 보실 수 있겠지? 빨리 돌아가고 싶다. 허나, 돌아갈 기약이 없구나.”
소현세자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저하,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무재 박종일이었다. 안으로 들어왔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얗게 밤을 샜다. 사흘 후, 용골대가 찾아왔다.

“세자께서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으니 황제 폐하께서 가까운 신하를 보내어 위로하는 것이 예법에 마땅할 것이나 아직 노독이 풀리지 않아 접대하는데 번거로울 것이라 생각되어 보내지 않으셨다 하오.”

“망극하옵니다.”
대빈객 박황이 사례했다.

“청나라와 조선은 이제 한 집안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조선인들이 왕래하는 것을 우리 군사들이 호송하지 않을 것이오. 허나, 민가에 폐를 끼치는 일은 용납할 수 없으니 스스로 알아서 단속을 잘 하도록 하시오.”

“잘 일러두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언제쯤 출발하게 되는 것이오? 세자가 조선을 떠난 이후에 귀국의 국왕이 세자의 안부를 몰라 걱정할 것이니 돌아가는 인편에 세자는 평안하다는 말을 꼭 전하시오.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는 황제의 명령이오.”

“받들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세자관에 관원이 너무 많소, 인원을  감축하시오

다음날, 용골대는 빈객 박노를 호부(戶部)로 불러들였다.

“세자를 시종하고 들어온 인원이 너무 많소. 시종 1백여 명과 말 10여필을 남기고 모두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인질로 잡혀온 주제에 시종인원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한성을 떠나올 때 193명. 오는 도중에 도정(都正) 신해는 죽고 역관 최응립은 병이 나서 돌아갔다. 선전관과 내관 등 돌아간 숫자가 꽤 되지만 추가된 인원도 있었다.

무과에 급제한 박사명과 최득남, 만포 출신 사과(司果) 김충선이 세자의 볼모 길에 자진하여 따라나서 금군의 직책을 받아 동행했다. 서흥 아전 김대업도 스스로 배종하기를 자청하여 서사의 직책으로 세자행렬에 합류했다. 총 인원이 한성을 출발할 때보다 많아졌던 것이다.

“왕세자는 다른 사람과 달라 그 정도의 인원은 꼭 필요합니다. 들어올 때 약정한 숫자가 있으니 결코 줄일 수 없습니다.”

“시강원은 무슨 놈의 시강원이오?”

“세자는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습니다.”

“혼자 공부하면 될 것 아니오?”

용골대는 마부대와 달리 우직한 무장이었다. 학문보다도 재물을 좋아하는 군인이었다.

“세자는 빈객과 주고받는 강독이 예법입니다.”

“또 예법 타령이오? 여기는 대 청국이니 청나라 예법을 따르도록 하시오.”

“학문에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을 바라는 바였소. 허나, 이 많은 사람을 먹이려면 양식과 말 먹이가 보통이 아니란 말이오. 또한, 귀국은 난리를 겪어 부모형제와 처자를 찾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오. 이는 황제의 자상한 배려이니 돌려보내도록 하시오.”

수많은 인원을 먹여 살리려니 걱정이었다

청나라는 세자를 시종한 관원들이 세자가 도착하면 소수 인원만 남고 돌아갈 줄 알았다. 이러한 예상을 깨고 200여명에 가까운 숫자가 주저앉겠다니 청나라에서는 부담스러웠다. 항복한 몽고 왕들은 30여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있었다.

“황제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여러 신하들과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오겠다던 인질은 왜 안 들어온 것이오?”

용골대가 조선 조정의 아픈 곳을 찔렀다. 삼전도에서 맺은 강화조약 셋째 조항에는 이런 것이 있다. ‘대신의 아들을 청나라에 보낼 것.’ 이 조항을 비켜가기 위하여 많은 대신들이 사직했고 조정에 나오려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조정 대신의 교체가 수시로 있는데 현직 관리의 자제로 할까요? 당시의 대신 자제로 할까요? 현직으로 한다면 그때마다 바꾸어야 하는 폐단이 있습니다.”

난감한 문제였다. 골똘히 생각하던 용골대가 입을 열었다.

“현직 관리의 자제로 하는 것이 좋겠소.”

“그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홍익한은 이미 처형되었고 윤집과 오달제에 대한 심문은 내일 있을 것이오. 세자는 참석하도록 하시오?”

홍익한의 처형 소식에 세자가 묵고 있던 동관은 경악했다. 한 가닥 희망을 걸었는데 홍익한이 처형되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이었다. 청나라의 칼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심양#소현세자#시강원#용골대#삼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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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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