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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완연한 날, 태안 앞바다를 방문했습니다.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고 100일을 앞두고 그 동안 태안반도가 어떻게 변했는지, 태안의 봄은 어떻게 오고 있는지를 보고자 먼 길을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암담했습니다. 겉모습은 많이 좋아졌지만 바다는 마침내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죽은 것들을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봄을 맞이하면서 은근히 생명의 흔적들을 만날 설렘을 가지고 떠난 길이었는데 태안 바다는 죽음의 바다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리포, 천리포, 십리포 그렇게 해안가를 돌면서 생명의 흔적들을 담으려고 갯벌을 다녔지만 바위에 붙어 있는 자연산 굴과 작은 소라들의 흔적밖에는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갯벌에 형이상학적인 문자를 닮은 길을 만들던 소라나 고동들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이 지고 가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나이가 인류의 죄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처럼, 그들은 지금 인간들의 업보를 지고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돌에 붙은 자연산 굴은 누군가 딴 흔적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용도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샘플조사를 위해 딴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내다 팔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먹으려고 누군가 딴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자연산 굴을 따서 냄새를 맡아보고 먹어도 보았습니다. 바다의 향기가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 향기만으로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확증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자연산 굴 맛을 실컷 볼 좋은 기회인데'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갯벌을 걸으며 생명의 흔적들을 찾았습니다.

 

걷다 보니 점심도 걸렀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그랬을 것입니다. 지인과 통화를 하고 나서야 점심때가 훨씬 지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보면서 '배가 고프다 혹은 뭔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인간은 잔인합니다.

 

갯바위, 그 곳에는 가을에 피어날 해국들이 새순을 내고 있었습니다. 가을에 피는 꽃도 이른 봄부터 새순을 내고, 봄의 햇살과 여름의 햇살을 가득 담아야 가을에 꽃을 피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직 연록의 싹이 귀한 시절에 갯바위에서 푸릇푸릇 새순을 낸다는 것이 신비했습니다. 그리고 고마웠습니다.

 

해국은 가을이 되면 이렇게 바위 틈에서도 활짝 피어납니다. 겨울의 추위는 물론이요, 한여름의 목마름까지 다 견뎌내고 피어나는 대견스러운 꽃입니다. 물론 바위틈에서만 자라는 것은 아니고 갯바위 근처의 흙에서도 잘 자랍니다만 가장 예쁜 꽃을 피우는 것은 역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란 것들입니다.

 

제주도에 살 적에는 가을이면 해국을 담으려고 바다에 나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사진에 담기조차 힘든 벼랑에 피어있는 예쁜 해국을 보면서 많이 아쉬워도 했었지요. 사람들의 발길은 물론이고 눈길조차도 주기 힘든 곳에 피어있는 꽃이 왜 그리도 아름답게 보이는지, 가지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어떤 소유욕 같은 것이 더해져서 더 예쁘게 보였는지도 모르겠지만, 가파른 바위틈에 피어난 그들은 참으로 대견해 보였습니다. 

 

태안 앞바다에서 만난 해국의 새순을 보면서 저는 가을에 피어날 해국을 상상했습니다. 그들이 지난가을에 바라보았을 바다, 그리고 겨울 지나고 봄과 여름을 보내고 활짝 피어나 바라본 바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저립니다. 생명의 바다만 보아오다가 피어나 바라보는 바다가 죽음의 바다라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물론 자연 중에서 사람 말고 절망하거나 좌절하는 것은 없습니다. 덫에 걸린 짐승이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들도 죽음의 바다를 바라본다고 실망은 할지언정 좌절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죽음의 바다를 위로하려고 더 아름답게 피어나 웃을지언정, 슬픔에 젖어 꽃을 피우지 않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해국, 그는 가을에 피어나기 시작해서 한겨울에도 차마 꽃잎을 닫지 못하고 한 줌의 겨울 햇살만으로도 피었다 지기를 반복합니다. 물론 남녘땅 제주니까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한겨울에도 꽃이 보고 싶으면 해안가로 한걸음에 달려갑니다. 가보면 어김없이 그들이 피곤했지요.

 

그 해국이 이 봄에 죽음의 바다에서 새순을 내고 있습니다. 올 겨울에는 유난히도 사람들이 발길이 잦아서 많이 밟히고, 훼손되었습니다만 그럼에도 그들은 기어이 새순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봄의 햇살 가득 머금고,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타는 목마름의 갈증의 의미를 온몸에 체득한 후 가을이 오면 꽃을 피우겠지요.

 

봄꽃도 제대로 피어나지 않은 봄날에 계절의 끝자락을 붙잡고 피어나는 해국을 보고 있습니다. 지금 피어있는 새순만 보고는 희망이라는 그림이 얼른 그려지지 않아 어느 해 가을에 찍어두었던 해국의 사진들을 찬찬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은 화이트데이라네요. 우리 집은 상술로 만들어진 그런 날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덕분에 화이트데이라고 초콜릿을 사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받아야 하는 처지에서는 조금 서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화이트데이'다, '빼빼로데이'다, 갖은 기념일을 만들어 놓은 상술도 상술이지만 백일잔치다, 만난 지 100일 되었다며 커플링도 하는 이 세태에서 태안 100일은 몇몇에게나 기억이 될까 싶네요. 하얀 국화 한 송이를 바치지는 못하지만 국향을 담아 해국을 그 바다에 마음으로나마 바칩니다.

 

아주 오래 걸리겠지요. 직년에 바라보았던 그 바다를 다시 보는 일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나 가능한 일이겠지요. 사고가 터지기 전까지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던 어부 중에서는 다시 회복될 바다를 다시 보지 못하고 이 세상과 이별해야 하는 이들도 있겠지요.

 

그래도, 바위 틈에서 자리잡고 새 순을 내어준 해국이 있어 나는 위로를 받습니다. 가을, 그들이 피어날 즈음이면 죽음의 바다가 진행형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만나러 그 곳으로 갈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카페<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해국, #태안 1`0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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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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