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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곳이 다 있어!"

 

혼자 있음에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외쳐버렸다. 그리고 이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거침없이 토해내자 그 울림은 바람은 타고 돌들을 휘감아 다시 잔물결이 되어 내게로 파고가 밀쳐왔다.

 

'아니, 정말로 이렇게 멋진 곳이 있다니!'

 

거듭 감탄해 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백 만개의 돌들로 겹겹이 쌓여진 바위산과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사막길. 오랜 세월 동안 풍화작용을 받아 이루어진 기이한 장면들. 가이드 북에도 언급되지 않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면에 그저 탄성소리만이 감정을 대신할 뿐이다.

 

지난 밤 '칼 테러' 사건 충격의 잔상을 털어내려 새벽부터 맹렬히 페달을 밟았다. 티후아나에서 멕시칼리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인 오직 2번 도로를 탈 수밖에 없다. 물론 돌아가는 국도가 있긴 하지만 중간에 2번 고속도로와 합류하게 되고 만다. 자전거를 타고 고속도로를 갈 수 없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 지금 톨게이트 앞에서 그런 상황에 부딪혀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황급히 지도를 꺼내 들었다. 지도를 보니 마찬가지다. 고속도로로 빠지는 톨게이트 지역에서는 아예 둘러 돌아갈 길조차 없었다. 톨게이트에서 가서 상황을 파악해보니 역시나 단호한 어조로 자전거는 안 된단다.

 

'그럼 그렇지.'

 

위험한 고속도로이니만큼 상황을 봐 달랄 수도 그렇다고 이대로 뒤돌아갈 수도 없는 일. 그런데 자전거로 다니는 사람에 대해 적용된 특별 규정이 있을까 궁금했다. 고속도로긴 하지만 길이 없잖은가. 혹시나 해서 담당 직원에게 물어보았다.

 

"자전거로 여길 지나 갈 수 없다는 건 알겠는데, 그럼 어떻게 멕시칼리까지 가야 하나요?"

 

때마침 순찰 중이던 경찰이 오더니 직원이 내 얘기를 하면서 둘 사이에 나에 대한 논의가 오고 갔다. 그리고 나서 경찰이 말했다.

 

"이 봐. 그냥 지나가."

"네? 자전거로요? 여기 고속도로를요?"

"그래, 맞아. 별 문제 없어. 그러니까 그냥 지나가."

 

자전거로 고속도로를 가도 된다? 하긴 전혀 낯선 광경은 아니다. 더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애리조나 주와 알래스카 주에서도 자전거로 얼마든지 고속도로를 달릴 수 있는 교통법이 있기 때문에 크게 낯설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방금 전까지 진입불가라고 철옹성처럼 말문을 막아버린 그들에게서 허락이 떨어진 건 의외였다. 혹시나 말 바뀔라 잽싸게 톨게이트를 빠져 나왔다. 자전거라 세상 어떤 톨게이트라도 통행료는 내지 않아도 된다. 비리 경찰이 없는 곳이라면 말이다.

 

어제 하루 종일 무거운 자전거를 밀며 올라왔기에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다. 톨게이트를 빠져 나가자마자 급하게 도로가 꺾여있더니 그 곳을 지나치자 마치 바위만물상이라도 되는 듯 엄청난 돌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단번에 압도시키기에 충분한 장엄한 광경이었다.

 

 

여기 이름은 루모로사(Rumorosa). 이런 곳이 왜 유명해지지 않았을까? 그랜드 캐년보다 결코 못하다고 볼 수도 없는데. 미안하지만 붉은 바위산과 큰 바위 몇 개 가지고 그럴 듯한 전설을 붙여 관광지로 만들어버린 콜로라도의 자랑 '신의 정원'은 그저 소꼽장난이란 생각이 든다.

 

너무나 독특하고 매력적인 광경에 매료되어 내리막길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급브레이크를 밟아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이 유명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은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글쎄, 훨씬 더 작은 규모와 더 초라한 배경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콜로라도 '신의 정원'과 '루모로사'의 네임벨류의 간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내재적 매력보다는 국력과 홍보의 차이가 아닐까.

 

걷잡을 수 없는 감동의 도가니였던 루모로사에서 오랫동안 바위산 감상을 한 후 고속도로 길 가에 차를 세워 팔고 있던 멕시코 대중 음식인 브리또(burrito)와 음료 하나로 허기를 달랬다. 그리고 그 후로도 계속되는 돌과 모래의 기이한 이중창에 브레이크 조절에만 신경을 쓰며 내려오는 내내 바위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정도로 여행자에게 무명인 이곳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30여분 간을 신나게 바위산을 배경으로 한 내리막길을 타고 다운힐을 즐겼으니 이제 다시 페달을 밟으며 다리 근육이 뻑뻑해질 만큼 힘을 줄 차례. 너른 길로 진입하다보니 도로 한 복판에서는 교통 경찰 대신 군인들이 무장하며 차량을 통제하고 있는게 보였다. 무서운 사람을 보면 일단 먼저 가서 친해지는 게 상책.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웃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군인 특유의 거만한 반응이 튕겨져 나왔다. 어차피 지나가는 인연에게 정을 붙일 수는 없기에 사진만 한 컷. 이곳은 미국으로는 마약 밀수와 국경월담이, 멕시코로는 반입 불가 물품 밀수가 횡행하기 때문에 보다 더 체계적인 군인들이 총을 들고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무료한 사막을 계속 달리다 길 옆 허름한 가게에 들어갔다. 갈증과 허기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더위에 잠시 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가게는 한산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의 물품들만이 진열되어 있었다. 괴기소설의 귀곡성에서럼 음울한 먼지가 수북히 쌓인 선반하며 정신없이 날라다니는 파리떼를 보니 도저히 음식을 먹을 엄두가 생기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포장된 빵과 콜라를 구입했다.

 

독과점이라 그런지 콜라 한 캔에 1달러 혹은 10페소란다. 일반 시장 가격보다 훨씬 비싸다. 그래도 사막 한가운데 가게가 있다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니 불만은 없다. 목마른 사슴에게 시원한 마약인 콜라로 혈기를 찾게 하니 충분한 프리미엄을 누릴 명분은 된 것이다. 

 

빵은 하나 3페소인데 10페소를 냈더니 거스름 돈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가게 주인이 워낙 선한 인상인데다가 조금 전에 시원한 물로 세수를 했으니 물값이라 생각하고 트집 잡진 않았다.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짜릿한 탄산의 매혹에 빠지고 달디단 빵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니 얼마 안 있어 아랫배가 묵직해져 왔다. 

 

 

사막에서 또 언제 다음 가게를 찾을지 몰라 화장실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 화장실 참 난감하기 그지없다. 우선 양변기에 날개가 없다. 게다가 응가를 내려보내야 할 물도 없거니와 버튼도 빠져 있다. 결정적으로 양동이에 물을 담아 부어도 응가가 내려가기는 커녕 오히려 역류하며 넘친다.

 

오마이 갓! 이미 변기 안에는 다른 사람들의 불소화흔적인 퇴비의 동격이 제대로 삭아있었다. 겉모습은 분명 수세식인데 양변기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한 마디로 고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남여 화장실 중 그나마 상태가 좋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단 양변기에 날개가 없는 만큼 상당히 조심해야 했다. 그리고 PT 5번 체조인 기마자세를 유지하며 엉덩이가 양변기에 스칠듯 말듯 깃털보다 가벼운 몸으로 앉아 일을 봐야 했다. 만약 이대로 주저앉으면 끝이다! 고통으로 뻑뻑해진 허벅지가 파르르 떨려왔다. 응가도 꽃잎 떨어지듯 사뿐히 조절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괄약근을 잘못 놀렸다간 튄다! 힘껏 하체에 중심이동을 갖다 놓고 상체를 최대한 굽힌 후 가는다란 신음 소리를 냈다. 해변의 섹시여인보다도 더 정신을 혼미케 하는 참 오래도 묵힌 대변의 화생방 냄새를 맡아가며 겨우 응가 배출 성공. 휴……. 큰 일을 성취한 듯 감개무량해진 고개를 들어 샛노래진 하늘을 보며 감사했다.

 

큰 기침 한 번 하고 화장실에서의 용변을 마친 후 돌아와서 확인해 보니 화장실 이용료가 5페소다. 흠칫 놀라며 가게 주인의 얼굴을 봤다. 그런데 받지 않는단다. 사실 그런 화장실 이용에 요금을 문다면 그거야말로 진정 악질 장사꾼이 아니겠는가. 멕시코가 그렇다. 법보다는 그냥 상황에 따라 운영되는 듯. 2번 고속도로를 지나는데 처음엔 안 된다더니 바로 말 바꿔 그냥 지나가라는 등.

 

한풀 꺾인 더위라지만 그래도 사막은 사막인지라 마지막 끗발이라고 생각한 건지 그 위용 한 번 야멸치게 드러낸다. 한껏 가벼워진 몸 때문에 그런지 페달의 회전 속도가 빨라졌다. 그런데 이 길로 가는 중에 또 한 번 입이 벌어질 만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마치 황천길처럼 보이는 곳, 아무것도 없이 그저 삭막하고 황량한 모래만이 뻗어있는 땅이었다. 나는 도로를 이탈해 단숨에 이 길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석게도 물도 없이!

 

이 광경 역시 눈부시도록 빼어났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느껴지는 무의 경이로움.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수 있는 생명의 숨결조차 느낄 수 없는 곳. 그저 땅바닥을 휩쓸고 지나간 바람만이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시위하는 듯한 적막한 광야. 아마 시야가 끝나는 저 지평선으로 달려가면 또하나의 생명이 흔적도 없이 바람에 실려 나갈지도 모르겠다. '무(無)의 현현'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채 오래도록 지평선 끝을 바라봤다.

 

알래스카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자신들이 더 이상 일할 능력이 되지 않을 때에는 먼 눈길로 스스로 걸어들어 간다고 한다. 구성원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그들에게 자존심은 곧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작년 그 북극의 매서운 얼음 광야를 보고 나서 하얀 공포에 질려버렸었는데 다시 일 년 만에 정반대의 사막의 뜨거운 모래 광야를 보고 있는 것이다. 

종착역질환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목적이 없는 공간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애초에 그런 곳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발을 내딛을 필요가 없으니 그저 하나의 이그조티카(Exotica)현상으로 치부하며 평생 외면하고 살 것인가? 하지만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세상을 내 의지대로만 방향을 설정하고 부딪히기에는 너무 많은 변수와 한계가 존재한다. 언제가는 자신도 모르게 혹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혹독한 광야로 내몰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도 사람들은 어떻게든 종착역을 찾으려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왕좌왕 당황할 필요는 없다. 

일견 무모해 보이는 탐험의 역사에서 '도전하라!'고 외치는 선봉장이 무턱대고 성마른 채 모험을 감행하지는 않는다. 그 역시 목적이 없을 것만 같은 곳에서도 목표를 찾아내고 의지를 길러내며 끝내 뜻한 바를 성취하고서는 인생의 또다른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고야 말테니까.

 

어떤 이에게는 목적이 없는 거친 자연이 다른이에게는 인생을 걸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도전지로 탈바꿈한다. 왜? 그 자연과 살을 맞대며 한 걸음 한 걸음 일리있는 의미를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다. 결과만 주시하며 달려가는 종착역보다도 과정을 찬찬히 뜯어보는 간이역을 통해 찾아드는 삶의 희로애락에서 더 훈훈한 인생의 여정을 음미하는 것 아니겠는가.

 

몇 장의 사진만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광대한 분위기이기에 나는 눈동자로 이것들을 흡수하려고 했다. 가슴에 오래도록 남겨두고 싶은 광경이었으므로. 충분히 감상을 한 후 도로로 다시 나왔다. 물이 없어 더 이상의 구경은 무리라고 판단되어서였다. 마른 웅덩이에 마지막 숨을 헐떡거리는 물고기마냥 타는 목마름은 단순한 갈증이 아니라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사막의 강한 햇빛과 수분의 고갈로 인해 잠시 현기증이 난다. 이미 미 서부의 사막을 자전거로 지나왔기에 전과확대의 원칙을 살려야 할 시점에서 망각이라는 인간의 편한 불감증에는 매도 약이 되지 못한다. 오래도록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물을 준비하는 것은 잘한 일이 아니라 단호하게 옳은 일인 것이다.

 

 

모라토리움(Moratorium) 인간에게 삶의 회로를 바꾸어 놓을 만한 것 중에는 여행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사막이나 고산, 정글과 같은 거친 환경에서 오히려 잠잠히 감응하는 것은 또다른 자아를 만나는 기묘한 체험이 된다. 루모로사와 바로 앞에 이어진 사막도로가 그랬다. 앞으로 닥쳐올 인생의 광야와 진짜 광야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것인가 나에게 돌아오는 의문에 찬 속삭임을 바람결에 담아 듣고서는 다시금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세계일주, #자전거, #문종성, #멕시코, #루모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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