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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기본적으로 인간 욕망의 억제 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권력·재물·이성 등에 대한 개인의 욕구가 아무 제약 없이 무한정 방출될 경우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사회 유지 자체를 불가능하게 할 수 있기에, 국가는 각종 제도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제한하고 또 레드라인을 벗어난 개인에 대해서는 형법적 처벌까지 가하고 있다.

관점과 기준에 따라, 국가의 욕망 제어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전제 위에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전제 위에서 국가의 개입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도교주의적 방식이고, 후자는 유교주의적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자연을 이상으로 하는 도교는 인간의 욕망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기에 국가의 개입을 가급적 최소화시키려 한다. 그래서 도교에서는 ‘인민이 국가의 존재를 의식할 필요가 없는 상태’의 최선의 상태로 인식하고 있다.

반면, 예법질서를 이상으로 하는 유교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기에 국가의 개입 폭을 널리 인정하고 있다. 도교가 ‘보이지 않는 국가’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면, 유교는 ‘보이는 국가’를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 한국의 국가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국민의 욕망을 제어하고 있을까? 한국의 국가권력이 어떤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려면, 국가보안법이라는 ‘희귀한 존재’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희귀한 존재’라고 한 것은, 국가보안법에서 규제되는 인간의 욕망이 다른 법률에서 규제되는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제어되는 욕망 중에서 중요한 것으로는 결사(제3조 반국가단체구성죄)와 이동(제6조 잠입·탈출죄)과 표현(제7조 찬양·고무죄) 등의 자유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에서 규제하는 행위들이 대단한 중범죄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실제로 국가보안법이 제약하는 행위들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욕망에 속하는 것들이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의 목적을 추진하고, 가고 싶은 데에 마음대로 가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에 속하는 것들이다. 국가보안법에서 규제하는 욕망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형법처럼 남을 죽이고픈 욕망(살인), 남의 것을 몰래 빼앗고픈 욕망(절도), 재물을 빼앗기 위해 남을 때리고픈 욕망(강도)을 억제하는 법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보안법은 형법처럼 ‘인간이 품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품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욕망’을 제어하는 법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은 ‘국가가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을 제어하는 법이다. 결사의 자유, 이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은 본래 국가권력이 억제해서는 안 될 인간의 욕망에 속한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이 인간의 본질적 욕망들을 제어하고 있다는 점만을 근거로 해서는 한국의 국가권력이 유교주의적이냐 도교주의적이냐를 판단하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유교나 도교나 모두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일정 정도의 제한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와 도교의 차이점은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인정되는 국가 개입의 정도가 최대한이냐 최소한이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인간의 본질적 욕망에 대한 국가보안법의 개입 정도는 어떠할까? 최대한일까 아니면 최소한일까? 그 점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국가보안법의 처벌 수준.

현행 국가보안법은 인간의 기본 욕망을 억제하는 법률치고는 그 처벌이 너무 과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행 국가보안법에서는 보통 징역 2년 이상 혹은 징역 10년 이하의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사형이나 무기형까지 과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역이나 모반행위 같은 적극적 수준의 행위도 아니고 단체구성·단체가입·잠입·탈출·찬양·고무 등의 소극적 수준에 머문 행위에 대해 최고 사형이나 장기의 유기징역을 과한다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처벌할 이유가 있다면 벌금 부과 정도에 머물 수 있는 행위에 대해서까지 사형이나 무기형을 과할 필요가 있을까?

반사회적 욕망(살인·절도·강도 등)에 대해 무거운 처벌이 가해진다면 그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욕망에 대해 너무 무거운 형벌을 가하는 것은 균형 잡힌 태도가 아닐 것이다. 

둘째, 국가보안법 규정의 구체성 여부.

국가보안법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억제하는 법률치고는 그 규정이 너무 추상적이다. 국가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억제할 때에는 한없이 조심스럽고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뚜렷한 증거가 없으면 섣불리 행동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본래 규제해서는 안 될 것을 국가 유지를 위해 부득이하게 규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의 구성요건을 보면, “반국가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제3조) 혹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제7조) 등등 한없이 추상적이고 모호하기만 하다.

이 규정만 갖고는, 무엇이 반국가단체이고 어느 정도가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이는 결국 법관이나 경찰·검찰에게 그에 관한 판단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헌법에서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권능을 분명히 국회에 주었는데 국가보안법에서는 그 권능을 사실상 법관이나 경찰·검찰에게 맡기고 있으니, 법리적으로 따진다면 이는 위헌적인 법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본래 제어해선 안 될 행위에 대해 부득이하게 제약을 가하는 것이라면 그 처벌도 적정하고 그 규정도 구체적이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그러한 요건들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일(처벌의 과중함)일 뿐만 아니라, 진짜 빈대가 맞는지 여부도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하게 불을 지르는 일(규정의 추상성)과 무엇이 다를까?

인간의 본질적 욕망에 대해 이처럼 ‘거칠고 몰지각한’ 제어방식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은, 한국의 국가권력이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 방식이 아직도 유교주의적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한국의 국가권력이 인간의 욕망에 대한 과도한 억압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본래 사회질서를 저해하는 것이므로 국가권력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인간의 욕망에 최대한 개입할 수 있다’는 사고가 전제되지 않고는 국가보안법 같은 법률을 시행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국가보안법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부정하는 유교주의적 사고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도교주의적인 무위자연의 방식을 무조건 취하자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무조건 긍정한다면 사회 자체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결사·이동·표현의 자유 같은 인간의 본질적 욕망을 일단 긍정하는 전제 위에서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질서를 침해한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경우에 적정 수준의 형벌을 가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적 영역에서는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국가권력의 담당자들이 애꿎은 국민들에게만 욕망을 억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모순된 태도일 것이다. 그리고 국가권력은 자신이 필요한 때에는 얼마든지 잠입·탈출을 하면서 국민에게만 무조건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은 모순된 태도일 것이다. 모순을 범하지 않는 권력이 오래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 


태그:#국가보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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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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