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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이후 중국 근대사에 대한 종래의 일반적 이미지는 굴욕과 무능이다. 근대 중국을 구렁텅이에 빠뜨린 서양인 및 일본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도 중국 근대사를 기본적으로 그런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중국인들은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근래의 중국 지식인들은 19세기 이후 역사를 꼭 패배의 역사로만 바라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찾아내는 패기와 적극성까지 보이고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법이 다소 자기만족적 측면을 띠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현대 중국의 활력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또 그것이 일정 정도는 진실에 근접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지식인사회의 최근 분위기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 같은 중국 내 흐름을 잘 보여주는 의미 있는 특강이 10월 16일 오후 4시부터 약 2시간 동안 서울대학교 인문대학건물 304호 교수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대학 동양사학과의 주관으로 열린 ‘근대 중국의 역사발전의 특징과 전환’이라는 강의에서 전 중국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장 장하이펑은 1840년 아편전쟁 이후의 역사를 ‘침체와 상승이 공존하는 U자형 역사’로 해석하여 한국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중국의 국립학술기관인 사회과학원에서 부소장(1988~1993년) 및 소장(1994~2004년)을 오랫동안 역임한 장하이펑은 현재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한국의 국회) 대의원과 국가청사편찬위원을 맡고 있는 거물급 역사학자다.

여기서 국가청사편찬위원회에 관해 덧붙이자면, 이 기구는 청나라(1644~1912년)의 역사를 중화인민공화국의 시각에서 공식적으로 편찬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다시 말하면, 또 하나의 정사(正史)를 편찬하고 있는 기관인 셈이다. 

이 날 강의에서 장하이펑은 “과거에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중국 근대사를 굴욕의 역사로만 인식하였지만, 실제로 중국 근대사는 침체와 상승을 함께 거쳤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침체와 상승의 공존 속에서 중국 근대사는 U자형 곡선을 보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여기서 ‘침체와 상승의 공존’ 부분은 <근대사 신론>의 저자인 리스위에라는 학자의 이론을 빌린 것이고, ‘U자형 곡선’ 부분은 장하이펑 자신의 이론인 것으로 생각된다.

1993년 산토우대학출판사 발행 <근대사 신론>에서 리스위에는 “중국 근대사에는 침체 외에도 상승의 과정이 있었다”면서 “이 두 과정이 상호 모순 속에서 공존하였다”는 해석을 내놓은 적이 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중국 근대사에서는 ‘독립국에서 반(半)식민지·식민지로 변화하는 과정’(침체)과 ‘봉건사회에서 반봉건·자본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상승)이 공존했다는 것이다. 또 그는 중국 근대사의 침체기 속에도 상승의 요인이 항상 내재하고 있었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리스위에의 이론을 빌려 장하이펑은 “중국이 아편전쟁 이후로 반식민지·반봉건의 심연에 빠지긴 했지만, 그 심연에도 밑바닥이란 게 있었으며 그 밑바닥이 바로 침체와 상승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침체의 밑바닥에 해당하는 부분은 신축조약 체결로부터 북양군벌 통치시기, 다시 말하면 1900년대에서 1920년대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그는 이 기간이 중국 근대사의 밑바닥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필자의 말로 하면, 바로 이 기간에 중국 근대사는 갈 데까지 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밑바닥이 동시에 상승의 기점이기도 했다고 해석했다. 상승의 기운은 크게 경제적·사상적 측면에서 나타났다.

먼저, 경제적 측면. 1860, 70년대의 양무운동 시기에 들어온 서구식 자본주의가 1900~1920년 시기에 점차 뿌리를 내려 이 시기에 민족부르주아계급과 노동계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개혁파와 혁명파가 경제적 기초를 갖는 바탕이 되었다.

다음으로 사상적 측면. 밑바닥에 떨어진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신문화운동과 5·4운동이 발생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도 함께 수용되었다.

위와 같이 경제적·사상적 측면들에서 역전의 발판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중반까지는 여전히 침체의 기운이 압도적이었다고 장하이펑은 인정했다.

그럼, 근대 중국이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온 시점은 언제일까? 1927~28년의 북벌 완성이 바로 그 반전의 계기였다고 장하이펑은 말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북벌 완성은 중국 사회가 침체의 밑바닥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후 중국 사회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서양과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으며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오늘날의 개혁·개방시대로까지 계속해서 상승 무드를 타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그의 강의를 정리하면, 1840년 이후의 80여 년 동안은 침체기였지만, 1927년 이후의 80년 동안 상승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중국은 이 상승무드를 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반전의 0-1 상태만 생각하지 말고 후반전의 2-1 역전도 생각하자는 것이 장하이펑의 주장인 셈이다.

흰 머리 희끗희끗한 70세 가까운 학자의 혀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고 패기 있는 역사해석은 이를 지켜보는 청중들에게 묘한 기분을 전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이 많은 중국 학자도 저토록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역사를 해석하고 있으니, 보다 더 젊은 학자들은 어떠할까 하는 생각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의 서양 학자들은 중국 근대사를 어둡고 우중충하게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중국인들에게 나약한 마음을 심어주는 데에 기여했지만, 최근의 중국 학자들은 자신들의 불행했던 과거 역사 속에서 오히려 긍정적 측면 즉 승리의 면면들을 찾아내면서 중국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물론 이러한 측면이 중국인들의 자기만족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치부해버릴 수도 있겠지만, 이 같은 현상은 그동안 가려졌던 중국 근대사의 새로운 측면들을 부각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중국 사회의 새로운 활력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대상이다.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밝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진취적이고 낙관적인 미래를 개척하는 데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중국이 바로 그러한 것 같다.

개혁·개방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국인들이 중국 근대사의 어두운 면뿐만 아니라 밝은 면까지 적극적으로 찾아내면서 도리어 자신들의 승리를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앞으로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자국의 미래를 개척하는 자세를 보일 것이라는 전망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태그:#중국 근대사, #장하이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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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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