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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리데기>겉표지
ⓒ 창비
1990년대, 북한은 고난의 시기를 경험한다. 식량이 부족해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살고 싶은 사람들은 국외로 탈출하려고 한다. 너나없이 힘들던 때였다.

'바리'가 살고 있는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이웃에 살던 누군가가 굶어죽었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을 힘겹게 견디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긴다. 식량난과 별도로 다른 문제가 생겨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외삼촌이 남쪽으로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 의미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남은 건 바리와 기르는 개 칠성이, 그리고 할머니와 넋이 나간 아버지다. 가뜩이나 어려운 시절에 이들은 쉬쉬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산다고 해서 살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리를 아껴주던 할머니가 죽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 떠났다가 소식이 끊긴다. 그야말로 기다렸다는 듯이 절망감은 계속해서 바리를 찾아온다. 그래도 바리는 희망을 향해, 아버지를 찾아 집을 나선다. 그러나 그 길은 영영 떠나는 길이 되고 만다.

바리는 기막힌 사건들을 겪으며 중국과 영국을 거치게 된다. 그곳에서 겪은 일들은 소설 몇 편을 써도 될 정도로 사연이 많다. 조금 살 만하다 싶으면 절망이라는 녀석이 바리를 찍어 눌렀기에 그리 된 것이다. 황석영의 신작 <바리데기>는 이렇듯, 절망적인 소설이다.

저자는 어찌해서 이렇게 '바리'라는 주인공을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모는 것일까?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바리데기' 설화와 맥이 닿아있다. 바리데기 설화는 알려졌다시피 생명수를 찾아 떠난 바리공주의 길 떠나기를 다루고 있는데, 기본적인 구조가 소설과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인지 <바리데기>에서 바리가 겪는 절망감도 낯설지는 않다. 바리공주가 겪었던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소설이 설화에 비해 그 정도가 깊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왜 그런 것인가? <바리데기>에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실체가 되어 '절망'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의 집안이 산산 조각나는 과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외삼촌의 행동은 어떨까? 살 길을 찾아 떠난 그 행동은, '남과 북'이라는 시대에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비해 많이 옅어졌다고는 하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바리가 외국에서 경험하는 것들은 어떨까? 인종문제와 심각한 문화 차이, 그리고 테러문제 등도 텔레비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들이다.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논리로 미사일을 날리는 것이나 극단적인 자살 테러, 인종이 다르다 하여 의심하는 것들은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심각한 것들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기에 설화에서 느꼈던 것과 다르게, 생생하게 와 닿는 것이다.

하지만 설화가 그렇듯, <바리데기>도 절망을 넘어선다. 물론 똑같은 것은 아니다. 설화가 전형적인 해피엔딩을 보여주고 있다면 <바리데기>는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까지를 보여준다.

왜 그런 것일까? 희망을 함부로 상상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독자들에게 나머지 몫을 맡길 것일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지만, 굳이 그것을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절망이 오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는 것일 테니까.

설화는 효심을 바탕으로 했지만, 저자는 그것을 바탕으로 이데올로기와 종교, 그리고 인종 갈등을 넘어서는 상징적인 여자 '바리'를 보여줬다. 절망 속에서 비틀거리지만, 기어코 앞으로 걸어 나가는 사람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 때문일까?

오늘,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소설의 하나로 <바리데기>를 손꼽기에 손색이 없다.

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창비(2007)


#황석영#바리데기#창비#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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