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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쉬는 시간, 한 아이를 만나러 가는 내 발걸음이 바빴다. 십 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아이 말고도 두 명의 아이를 더 만나야했기 때문이었다. 내 손에는 한 묶음의 원고가 들려 있었다. 백일장대회 예선을 통과한 열두 편의 시작품이었다. 물론 그 중에는 그 아이의 작품도 들어 있었다. 조금은 풋내가 나면서도 풍부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내 세계

내 세계엔 나뭇잎은 하늘색
하늘은 연두색 눈빛은 보라색

오감의 현실과는 모든 게 다
정반대지만 너무나

영롱한 몽롱한 5계절 24달
아사달과 아픔 따위는 없는 곳

여기는 내 세계

하늘에 날린 아드레날린
하나도 화 날릴 없는

이곳은 자연과 나
육감의 교감으로 오감 따위는

초월해버린 기적의 땅
여기는 내 세계

아직 남은 얘기들은 내 머리에
오직 내 머리 속에서만 존재하는

여기는 내 세계


나와 한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아이 중에 이런 깜찍한 예비시인이 있었다니! 시를 쓴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심사 도중에 섣불리 아이를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와의 상봉을 며칠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는데, 함께 심사를 본 모 선생께서 불쑥 내던지듯 한 말이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고 말았다.

"이런 시를 쓸 아이가 아닌데요."
"이 애를 아세요?"
"그럼요. 수업에 들어가니까요. 아무래도 인터넷에서 베낀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러니까 그날 나는 나와 한 울타리 안에 살고 있는 시적 재능이 뛰어난 한 어린 문사(文士)를 만나러 간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아니, 그럴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 아이를 만나자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시가 참 좋더구나. 평소에도 시를 자주 쓰고 그러니?"
"……."
"이 시가 마음에 들어서 네게 상을 주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겠니? 만약 네가 직접 쓴 시가 아니라면 네 마음이 찔리지 않겠어? 어떻게 할까? 상 줄까 말까?"
"주지 마세요."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그 한 마디로 인해 나의 기대는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는 아이를 교실로 들어 보낸 뒤 두 번째 아이를 찾아갔다. 녀석이 쓴 시는 한 눈에 봐도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한 유명 시인의 시를 패러디하면 이런 시가 나올 법도 하다.

우리가 돈다발이라면

우리가 돈다발이라면
어디서나 대량으로 생산되는
위조지폐는 되지 말자
세상이 바람 불고 춥고 어둡다 해도
사람이 사는 마을
가장 낮은 곳으로
빳빳한 돈다발이 되어 흩날리자
우리가 돈다발이라면
가난한 이의 창문가에는
산타가 되고
그이의 깊고 넓은 빚더미 위에 얹혀 지는
수표가 되자.


녀석은 나를 보자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격으로 눈이 휘둥그레져서는 자기 이름이 적힌 종이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너 참 시를 재밌게 잘 쓴다. 근데 너 혹시 패러디라는 말 아니?"
"예. 알아요."
"그게 뭔데?"
"그게 그러니까 알기 아는데 말하기가…."
"어떤 유명한 작가의 원작시를 좀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어 쓴 것을 패러디라고 하잖아. 맞지?"
"예. 맞아요."

"그럼 넌 누구 시를 패러디 한 거야? 아니면 누가 패러디해놓은 것을 베낀 거야?"
"예? 그러니까…."
"괜찮아. 너 혼내려고 온 것이 아니니까 솔직히 말해 봐. 패러디 한 거야, 아니면 패러디한 것을 훔친 거야?"
"훔친 겁니다."

녀석의 시는 처음부터 미심쩍어서 그랬는지 허망한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한 편의 시에 대한 기대마저 허물어지자 나는 심한 허탈감을 느꼈다. 그래도 아이는 한사코 인터넷에서 베낀 것은 아니라고 변명을 했다. 이런 식이었다.

"너 장도리로 못을 박아봤니?"
"아니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시를 쓴 거야?"
"아버지가 도와주셨어요."
"그럼 아버지가 장도리로 못을 박다가 손을 내리치신 거야?"
"아니요."

"아니라니? 아버지와 너 둘 중 하나는 장도리로 못을 박았어야 이런 시가 나올 거 아니야?"
"아버지하고 상의해서 그냥 썼어요."
"시를 상의해서 쓰다니? 그것도 경험도 하지 않은 일을?"
"그래도 인터넷에서 베낀 것은 아니에요."

아버지와 상의하여 그냥 썼든, 인터넷에서 베껴 썼든, 제목도 그럴듯한 <자화상>이란 시는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체험도 없이, 그것도 아버지와 합작으로 만들어낸 생명 없는 시에 시인의 이름을 붙여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그랬으리라. 나는 세 번째 아이와 헤어져 지상에서 가장 천천한 걸음걸이로 터벅터벅 힘없이 교무실을 향해 돌아오다가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마치 망자의 혼을 달래기라도 하듯, 주인 없는 세 편의 가엾은 시를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자화상

길쭉한 못
박다보니 휘어져 장도리로 빼냅니다.
문득 나도 이런 휘어버린 못 같은
사람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방향을 잘못 잡아 휘어버린 못
나도 인생의 방향을
잘못 잡지는 않았는지 생각이 듭니다.

나의 잘못을 아는 건지
못을 향하던 망치가
방향을 틀어
내 손을 향합니다.

지난 날 나의 잘못도
휘어버린 못을 빼내는 장도리 같이
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디 바라노니, 점수에 눈 먼 아이들이여, 혹은 어른들이여, 바로 나 자신이여! '방향을 잘못 잡아 휘어버린 못'처럼 '나도 인생의 방향을/잘못 잡지는 않았는지' 굽어 살펴보시라. 그리고 이제라도 '지난 날 나의 잘못도/휘어버린 못을 빼내는 장도리 같이/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시라. 부디 꼭 그렇게 살아가시라.

#창작시#패러디#인터넷#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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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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