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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의 도시 벌링턴에서. 6월 5일.
ⓒ 문종성
작은 마을 벌링턴에서 무려 5일 간이나 쉬었다. 상쾌한 녹색으로 물든 시골스런 전경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도록 따뜻하게 배려해 준 버몬트 교회 한인분들 덕분이었다.

떠나는 날, 자전거 가게에서 다시 한 번 점검을 마쳤다.

그 동안 챙겨주던 지연 누나가 마지막으로 배웅해 주려고 김밥을 싸서 찾아왔다. 가는 길까지 챙겨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가게에서 만난 한 노부인은 나를 보더니 다음 경유지인 몬트리올에 마침 일하는 남편이 있다며 남편의 연락처를 챙겨준다. 마음 씀씀이가 참으로 고맙다.

'최고 맛' 라면 끓여주고 여정에 쓰라고 경비까지

드디어 출발…하려다가 갑자기 지연 누나가 라면이나 먹고 가자고 한다. 친구 집이 근처라면서 말이다.

사실 지난 5일 동안 무려 네 가정에서 초대받아서 대접을 받는 동안 이 분들을 통해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섬김은 겸손한 자만이 행할 수 있는 용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낮추고, 먼저 상대방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섬김이다.

그런데 그렇게 대접을 받고 출발하는 날 또 연주 누나집에 가서 그야말로 혀에 살살 말려 들어가는 얼큰한 라면과 새콤한 딸기를 먹고 속을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한 번 꼭 초대하고 싶었는데 다른 집에 먼저 약속이 되어 있단 얘길 듣고 초대를 못했네요. 이렇게 마지막이라도 보게 돼서 다행이에요."

그러면서 애써 라면밖에 챙겨줄 것이 없어 미안하다며 여정에 보태쓰라고 경비를 쥐어준다. 고국을 떠나온 나에게는 정말 최고의 라면맛이었는데….

한국 사람들은 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다. 챙겨주고도 더 챙겨주지 못해 아쉽고 미안한 마음. 그저 그 마음들을 내가 받기만 한 채 끝내면 안 되겠다는 훈훈한 마음들이 라면국물의 김처럼 피어오른다. 언제든지 누군가를 사랑으로 품어줄 수 있도록 마음 문을 활짝 열어놓고 출발한다.

낮과 저녁 사이, 미국과 캐나다 사이

▲ 버몬트 주에서 한참 북쪽으로 달리다가 드디어 반가운 'CANADA'가 적힌 표지판을 발견한다.
ⓒ 문종성
한참을 달리다 보니 드디어 캐나다란 글이 쓰인 표지판이 나온다. '멀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에 좀 더 힘을 내어본다. 낮과 저녁의 모호한 경계에 이르는 시간에 국경에 도착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왔던 국도를 따라 국경검문소로 가려고 하니 길이 더 이상 길이 이어지지 않는다. 한 바퀴를 돌고 이번엔 우측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찾아냈다. 지난 번 고속도로 옆 바이크 루트 사건도 있고 해서 혹시나 자전거를 위한 길이 아닐까 들어가 본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길이 막혀 있었다. 좌측도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 표지판엔 국도 노선이 있는데 자전거로 빠져 나가는 길이 안 보인다. 중앙엔 고속도로만이 휑하니 뚫려 있어 차들이 운행할 뿐이다. 한참을 돌다가 안 되겠다 싶어 미국에서 가장 국경에 가까운 집에 가 물어보기로 했다.

"이 봐요. 안녕하세요?"

현관 앞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부자뻘로 보이는 두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 무슨 일이야?"
"다름 아니라 자전거로 국경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길을 못 찾겠어요.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하는 거죠?"
"음, 자전거? 그냥 고속도로로 타고 가면 돼."

젊은 친구가 답해준다. 그러면서 식사는 했냐고 물어본다. 확실히 미국인들은 자전거 여행자를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이 친구가 식사는 잘 챙기면서 다니는지 하는 의문인가 보다. 혹여 그게 립서비스라 해도 생각해 주는 게 어딘가?

"일단 들어와. 식사라도 하고 가라고."

그 친구,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퍽 힘겨워 보인다. 눈짐작으로도 얼추 150㎏은 넘어보이는 거대 체구를 가진 전형적인 비만인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풍요로운 중부지방에서 삶의 무게가 리듬감있게 출렁거린다. 씩씩거리는 그보다 보는 내가 더 숨막힐 정도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James). 움직이는데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 늙은 노인은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가 돌봐주는 환자라고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직업은 간병인인 것이다. 그는 캐나다에서 사는 캐나다인이지만 간병 때문에 현재 미국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임스, 이제 알았다구요"

샌드위치로 저녁 식사를 하다가 밖을 보니 비가 내린다.

"어? 비오네…."

조심스럽게 밖을 보니 제임스도 나의 시선을 따라 밖을 응시한다.

"비 와? 그럼 우리 집에서 자고 가."

별 일 아니라는 듯 넘겨버린다. 그러고는 서랍을 뒤지더니 지도를 꺼내온다.

"어디보자, 자네 몬트리올로 간다고 했나? 흠."

제임스는 얼마 동안 지도를 보고 연구하더니 내게 자신의 옆자리로 오라고 손짓하고는 어떻게 몬트리올에 갈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내 생각엔 자넨 말야, 104번 국도를 따라 그냥 쭉 가면 되겠군."
"그래요? 알았어요. 104번으로만 가면, 음, 여기 몬트리올로 바로 들어가는군요."

짧고 명쾌하게 끝날 거 같았던 그의 조언은 그러나 이후로도 장장 한 시간동안 이어졌다. 한 시간 동안!

"글쎄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하지? 하이웨이는 힘들겠지? 음,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진입을 해야 하나? 몬트리올 시내 지도가 어디 있을텐데. 여기 있다. 보자, 104번을 타고 가다가 132번으로 바꿔 가든지 아님 그냥 남쪽으로 선회해서 가든지. 근데 퀘벡은 안 갈 생각이야? 거기 경치 죽이는데. 내가 말야. 자동차로만 몬트리올을 다녀서 그런지 자전거로는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어."

기약없는 그의 만연체에 지쳐버렸지만 너무 열심히 도와주려는 그의 노력 때문이라도 '그만'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속 터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음…그러니까 어떻게 가는지 대충 알 걸 같아요. 이제 알았…."
"봐, 갈렙. 자넨 말야, 지금 이 길이 이쪽으로 빠지면서 다시 북쪽에서 만나거든? 알겠어?"
"제임스, 알아요. 그렇게 가면 될 것 같군요. 이제…."
"그런데 말야, 혹시 이 길로 가게 되면 강을 만나게 되고…."

제임스는 펼친 지도 위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길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어찌나 가쁜 숨을 헐떡거리는지 '다이어트 좀 해야겠어요'라는 말을 꼭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유일한 낙이자 삶의 의미가 될지도 모를 음식에 대해 딴지를 거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봤어? 이래봬도 내가 몬트리올에서 여기까지 차로 몇 년을 왔다갔다 했는데. 하하. 이런 건 뭐 그다지 어려운 게 아니라구."

헉! 윈도95

다시 비가 쏟아지는 밤, 난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 인터넷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 내 컴퓨터로 한 번 해 봐."

슬쩍 웃어보이는 그의 표정이 할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컴퓨터 전원을 켰다. 하지만 화면은 나무늘보의 움직임만큼이나 답답하다.

첫 화면이 나오는데, 어라….윈도95.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윈도95라니. 아니 이 친구는 이 고물상자를 가지고 제대로 인터넷을 활용이나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메일이 좀 늦게 보내져. 가끔 다운도 되고. 그래도 뭐 바꿀 생각은 없어. 난 인터넷과 거리가 멀거든. 뭐 없다고 해도 크게 불편한 걸 못 느껴서 말야."

제임스는 자신의 컴퓨터가 느리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내가 인터넷을 쓰고 싶다고 요청을 했을 때 선뜻 응해주었다. 이를테면 구차하게 말로서 이해시키기보다 확실하게 상황을 파악하게 한 뒤 자신의 의도를 피력하기 위한 일종의 복습법이었다.

"사실 내 컴퓨터가 보다시피 느려. 그러니까 밖에 나가면 기사들이 잠시 쉬었다 가는 휴게소가 있거든? 거기 가면 아마 무선인터넷이 될거야. 내 차로 그리로 가는 게 어때?"
"비도 오고 시간도 꽤 늦었는데 괜찮을까?"
"문제 없어. 차로 5분이면 되는데 뭘."

오, 주님, 지금 당신을 만나는 건 아니죠?

정말 문제없어 보이는 제임스 표정을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 했다. 제임스의 변치 않는 확고한 자신감을 신뢰한 채 인터넷을 하러 우중심야에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 확고한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는지 폭우가 쏟아지는데도 운전 중에 시속 70마일(약110㎞)을 넘나들었다.

'오 주님, 설마 지금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아니겠죠?'

두려움이 엄습했다. 저절로 눈이 질끈 감긴다. 과연 이 때만큼이나 절절하게 마음 속으로 기도가 나오는 때도 없는 것 같다. 10분에 갈 거리를 그는 70마일이라는 실로 아름다운 스릴을 즐기며 약속대로 5분 만에 가는 것이다.

▲ 버몬트 주의 특산물인 메이플(단풍) 시럽. 관광으로 왔다면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해 하나쯤은 구입하는 것을 잊지 말자.
ⓒ 문종성
그는 매사가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다. 첫 번째 가게에서 무선 인터넷을 사용할 수가 없어 다시 이동을 했다. 하지만 두 번째 가게에서도 인터넷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쯤되면 보통 사람들 같으면 볼멘소리를 하게 마련인데 제임스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다.

"그럼 다음 가게로 가볼까?"

세 번째 가게에서 드디어 인터넷이 터진다. 오히려 반가워하는 건 나보다 제임스다.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보내는 중에 제임스는 그새 대형 종이컵에 콜라를 가득 채우고 쵸코바를 입에 물고 있다. 그는 내가 인터넷을 하는 내내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에 초콜릿을 오물거리며 괜찮다고 말하는 그. 그에겐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아니라 간식을 먹는 시간이다.

'가르침'과 '가리킴' 사이

▲ 캐나다 국경을 향하는 중에 잠쉬 쉬다가. 날씨가 흐린 날이 라이딩하기엔 최적의 날씨조건이 된다.
ⓒ 문종성
바보는 방황하고, 현명한 사람은 여행한다. - 풀러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겨 떠나려고 준비 중인 내게 제임스가 와보라고 손짓한다.

"이리와 보게나, 갈렙. 자네 어떻게 몬트리올로 가는지 확실히 알겠어? 음, 내가 지도를 다시 자세하게 살펴보니까 여기에서 북쪽으로 쭉 가서 다시 서쪽으로 가는 길도 있긴 하지만 아예 대각선으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리고…."

으악! 또 시작된다. 제임스는 이제는 몬트리올 시내지도까지 들이대며 꼼꼼하게 종이에 루트를 차근차근 적어준다. 맵퀘스트라도 있으면 좀 더 편하게 가겠지만 목적지의 주소지를 잘 모르는 상황에서 몬트리올 중심까지만 가자는 생각이었다. 그 길까지 제임스가 자신의 경험을 십분살려 루트를 짜주고 있는 것이다.

"제임스. 음, 충분히 알 것 같아요."
"그래도 잘 봐. 나중에 혹시 헤매지 말고. 자넨 134번을 타고 가는 것도 고려해 보라구. 104번만 타고 가다간 길이 막힐 수도 있거든."

그렇게 또 20분 간 그의 잔소리 아닌 일장연설이 시작된다. 물론 그는 열정적이다. 그래서 그만하면 알 것 같다는 정중한 대답에도 끔찍하도록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그에게 슬슬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를 보며 누군가에게 알려주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 지도를 들고 마치 사자후를 토해내듯 열정적으로 루트를 제시한 제임스(James). 그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다이어트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 문종성
'가르침'과 '가리킴'의 사이. 사전적 의미로 '가르침'은 지식이나 기능, 이치 따위를 깨닫거나 익히게 하는 것이고, '가리킴'은 손가락 따위로 어떤 방향이나 대상을 집어서 보이거나 말하거나 알리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제임스는 결국 나에게 길을 가르쳐 준 것인가, 가리켜 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길은 어떤 의미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가리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은 분명 가르침의 길이다. 길은,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보는 풍경들, 그리고 듣는 이야기들을 통해 인생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반면 내가 얼마나 사랑받는 인격체인지도 가르쳐 준다.

'가르침'과 '가리킴'

가리키는 사람은 단지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가르치는 사람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가리키는 것은 머리에서 끝나는 전달이지만 가르치는 것은 가슴으로 내려가는 깨달음이다. 똑같은 여행서적이지만 가이드북은 가리키는 것이고, 여행기는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삶이 될 수 있을까? 지금까지는 아무 의심없이 그것은 그저 성인이나 스승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조금 욕심을 내어 보고 싶다. 내 서툰 걸음이 누군가의 가슴에 동기부여가 되는 작은 가르침이 되길….

그렇다 해도 나에게는 앞에서 가르치는 스승보다는 옆에서 가르쳐 주는 친구 같은 만남이 더 좋은 것 같다. 이제 그런 만남을 꿈꾸며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의 두 번째 나라 캐나다를 향해 달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현재 시카고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캐나다, #국경, #가르침, #가리킴,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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