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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몬트 주에 위치한 벌링턴(Burlington)에서 풍선 축제을 열었다. 5월 31일. 축제 입구에 띄워져 있는 풍선들. 입장료 성인 $11.
ⓒ 문종성
'풍선효과'라는 게 있다. 풍선의 한 곳을 누르면 다른 곳이 불거져 나오는 것처럼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또 다른 문제가 새로 생겨나는 현상을 말한다. 자전거 여행에도 예외 없이 이 법칙이 존재한다.

배고픔을 해결하면 날씨 때문에 힘들고, 날씨가 괜찮다 싶으면 물건을 잃어버린다. 어떨 때는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또 고장이 나기도 한다. 벌레에도 물리고, 생각지 못한 지출을 해야 할 때도 있다. 연락이 되지 않거나 말이 통하지 않을 때는 답답하기만 하다. 이도 저도 없으면 한 번쯤 가벼운 사고가 나기도 한다. 이처럼 자전거 여행은 여기저기 터지는 배수관처럼 쏟아지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그야말로 문제와의 싸움인 것이다.

그 중에서도 자전거를 타고 가다 가장 골치가 아픈 경우 중에 하나는 물론 자전거가 예고없이 고장 났을 때다. 삐걱거리면서 마찰음을 내는 리어 랙(rear rack) 상태가 좋지 않았고, 펑크까지 겹치는 바람에 아침부터 자전거 숍에 들러야했다.

주인 없는 자전거 숍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작은 타운에 자전거 숍이 어디 있을까 두리번거리다 신호등 건너편에 있는 주유소에 가서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때 신호 대기 중 막연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내 뒤에 자전거 숍이 여기 놔두고 도대체 어딜 가냐는 듯 건물에 입점해 있는 것이 아닌가? 살짝 풋웃음을 흘리며 문을 열 때까지 숍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보통 9시에서 10시에 문을 여는 것을 감안, 가게 앞 주차장에서 mp3로 음악을 들으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있었다.

"자전거여행 하세요?"
"네."

차에서 내린 어떤 사람이 나를 보더니 한 마디만 묻고는 다시 자전거 숍으로 향한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보는 것 같더니 다시 내게로 와 한 마디 덧붙였다.

"글쎄요. 아마 이 집주인이 올지 안 올지 모르겠군요."
"그래요? 기다리죠 뭐."

큰 문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가벼운 눈웃음을 짓고는 그 사람의 대답에 건성으로 답했다. 그렇게 십여분쯤 흘렀을까. 다시 한 사람이 똑같이 차에서 내려 나를 바라보고는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자전거 숍으로 향한다. 그리고는 돌아와서 한 마디한다.

"자전거 수리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네. 랙(짐받이)이 자꾸 흔들거리고 균형을 못 잡아서요."
"음, 그런데 여기 주인 몇 달 일정으로 장기 여행 갔다고 쓰여 있는데요? 제가 한 번 상태를 봐도 될까요?"

자전거 숍 입구에는 우리나라처럼 휴무나 사고에 대한 내용이 크게 적혀져 있는 게 아니라 '부재 중'이라는 말과 함께 간략한 사유가 명함 크기만 한 안내지에 붙어 있던 것이다. 자세하게 살펴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예단해서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꼴이라니…. 그것도 모르고 계속 기다리다가 만난 그 사람은 지나가다 우연히 짐을 가득 실은 자전거를 세우고 있는 나를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내린 것이었다.

"음, 이건 제가 고치기가 쉽지 않겠는걸요?"

손으로 이곳저곳을 만져보고 공구로 수리도 해보면서 여러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쉽게 고쳐질 것 같지가 않았다. 자신 있게 덤벼들었다가 머쓱해진 그는 전문가의 처방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제가 아는 자전거 숍이 있거든요. 근처에서 가장 큰 숍인데 무리 없이 수리가 될 거예요. 그쪽으로 가 보시죠. 자전거는 제 밴에 싣고요."

뉴잉글랜드 지역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지만 특히 버몬트 주에는 하루에도 몇 명의 라이더들을 만나게 된다. 라이더들과 마주칠 때는 서로 가볍게 손을 들어준다거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지애를 발휘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힘내'라는 뜻과 '우리'라는 뜻이 함께 공존해 있는 것임을 느낄 수 있다.

같은 방향일 때는 짧은 대화가 오고 가기도 한다. 간혹 길을 물어볼 때는 가지고 있는 지도를 건네준다든지 같이 라이딩을 하는 등의 적극적 도움을 주는 이들부터 자신이 습득하고 있는 정보를 최대한 이용해 자세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들까지 모두가 성의껏 답해준다. 길 위에서 만나는 자전거 여행자들은 짧은 시간이나마 모두가 조건 없는 친구가 되는 것이다.

숍에서 랙에 대한 수리를 마쳤다. 숍까지 안내해 준 그도 자전거 애호가라고 한다. 로드용 자전거 두 대를 밴에 싣고 다닐 정도니 같은 종족이 길에서 어리바리하는 걸 지나칠 수 없었나 보다. 그 역시 나에게 대가 없는 친절을 베푼 친구가 되어준 것이다.

▲ 친절을 베풀어준 열혈 라이더인 그의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그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자전거를 수리할 수 있었다.
ⓒ 문종성
친절이란 청각장애인이 들을 수 있고 시각장애인도 볼 수 있는 언어라고 한다. 버몬트 주에 들어오면서 계속되는 친절의 파노라마는 단순한 예의차원을 넘어선 상대방을 존중해 줄줄 아는 겸손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흔히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불리는 나라에서 온 내가 지금 그들의 친절공세에 무척이나 황홀해 하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의 면모는 경제지표나 외교 안보력으로도 그 평가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겠지만 거기에 덧붙여진 무형의 시민의식은 강대국이란 이미지보다도 풍요로운 나라라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런 까닭에 나는 미국이 왜 풍요로운 나라가 될 수밖에 없는지 그들의 작은 사고와 행동을 통해서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벌링턴에 도착하기 전 저녁식사를 대접해 주고, 자기 집 야드를 텐트공간으로 허락해 준 폴(Paul)의 딸 사이디(Sadie). 맑은 웃음과 상냥함이 매력적이다.
ⓒ 문종성

수리를 마치고 계산대로 갔다. 그런데 가격이 무료란다. 뉴저지에서 구입한 내 자전거가 트렉(Trek)인데 트렉 자전거에 한해서는 수리가 무료란다. 얼씨구나! 작은 혜택에도 기분이 좋다. 이후에는 미리 약속된 한인 가정을 방문했다. 중간중간 베이스캠프 형식으로 미리 연락하고 간 한인교회를 통해 소개받은 곳에서 목사님 가족과 집사님 가족과 함께 푸짐한 고기 반찬으로 그간 고생한 위를 달래준다.

자전거가 고장 나면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나 수리하고, 또 수리한 자전거로 땀 흘리며 숙소에 도착하다 보면 맛있는 음식으로 하루가 매조지되면서 자전거 여행길도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굴곡져 있지만 기쁨을 주는 하루에 그저 감사의 마음을 가져본다. 늘 내가 원하는 것보다 옳은 것이 이뤄지게 해달라는 소망을 품고서….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 바그너

벌링턴은 버몬트 주의 주도는 아니지만 교육, 경제 등 여러 방면에서 중심이 되는 도시다. 그린 산맥을 동쪽에 두고 있으며 섐플레인 호와 애디론댁 산맥(서쪽)을 향해 경사를 이루고 있는 언덕사면에 있는 이 도시는 관광객들에게 화려함이 아닌 평온함으로 어필하고 있다.

또한 벌링턴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낭만에 젖어 쉬어가는 곳으로는 그만이지만 이민와서 지내라고 하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북쪽으로는 차로 두 시간 거리에 토론토가 동남쪽으로는 비슷한 시간이 소요되는 보스턴과 더 멀리로는 뉴욕이 있긴 하지만 이곳에 지내는 사람들 얘기는 버몬트 주야말로 알려지지 않은 오지라고 한다.

▲ 벌링턴 시내 풍경.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한 잡상인이 물건을 팔고 있다.
ⓒ 문종성
▲ 경찰들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순찰을 돈다. 자전거는 캐논데일(Cannondale).
ⓒ 문종성
▲ 시내 외곽에서 한 여인이 피리를 불고 있다. 행인들의 발길이 뜸해 모금액이 적을 뿐더러 가락까지 구슬퍼 왠지 처량해 보인다.
ⓒ 문종성
▲ 활기차게 키타를 연주하는 남자는 비교적 후원이 잘 되는 편이다. 미국에서 길거리 공연을 하려면 관할 공공기관에 신고를 해야한다.
ⓒ 문종성
▲ 라이브 연주로 분위기를 내는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이 점심을 즐기고 있다. 벌링턴 시내에 줄지어 서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렴하고 맛있으면서도 양도 푸짐한 다양한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워보자.
ⓒ 문종성
▲ 레스토랑 내부 인테리어에는 판화조각으로 찍어낸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 문종성

모두를 아이로 만드는 벌링턴 풍선축제

IBM에서 근무하시는 버몬트 한인교회 황원종 집사님께서 가이드를 해 주셔서 벌링턴 시내를 구경한 것 말고는 이틀 동안 숙소에 틀어박혀 휴식만 취했다. 그러다 문득 축제에 함께 가자는 장은임 집사님의 권유로 벌룬 페스티벌(Balloon Festival)에 가게 되었다.

▲ 축제에 참여한 한 아이가 페이스페인팅을 받고 있다.
ⓒ 문종성
벌링턴에는 해마다 여러 축제가 열린다. 이 작은 마을에 그런 것도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중에서 오늘 열리는 축제가 바로 '풍선 축제'라고 한다. 전날 하늘에 온통 열기구가 띄워져 있는 장면을 우연히 보고서는 너무 신기해했는데 오늘은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기상 조건이 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

오늘의 축제를 다들 기다렸는지 지역의 어린이들은 다 모여든 것 같다. 인기있는 놀이기구와 장난감 가게, 그리고 각종 이벤트 현장에는 부모들의 손을 잡은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축제 장소에 설치되어 있는 놀이기구 및 장난감 가게, 게임존 등 모든 설비가 이동식이라고 하니 이것들을 준비하는 노력어린 손길들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록밴드의 공연이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 문종성
해가 저물자 시골 마을은 더욱 화려한 옷으로 장식되어진다. 락밴드의 열정적인 공연에는 천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모여 같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엄마, 나 기차 타고 싶어."
"넌 아직 어려서 안 된단다."

작은 꼬마 아이는 놀이동산의 기차가 타고 싶었지만 아쉬운 대로 엄마와 함께 미끄럼틀을 타야 했다. 그래도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가 보다. 그의 오빠는 나이 좀 먹었다고 말도 타 본다. 그러다 총으로 인형을 맞추는 게임에서 돌고래 인형을 받았는데 둘이 싸운다. 결국 한 게임 더 해서 또다른 돌고래 인형을 선물로 받아 하나씩 공평하게 나눠주니 그때 다시 형제간에 의가 회복된다.

▲ "내가 기관사다!" 아이들이 기차를 타면서 즐거워 하고 있다.
ⓒ 문종성
▲ 좀 더 어린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미끄럼틀을 탄다.
ⓒ 문종성
▲ 놀이기구의 하이라이트 바이킹이 빠질 수 없다.
ⓒ 문종성

드디어 시간이 되어 장내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풍선 축제가 시작되는 시간. 그런데 결국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빠지게 되었다. 비온 뒤 흐린 날씨인지라 열기구를 하늘에 띄우진 못한단다. 그래서 열기구 퍼레이드만 실시할 거라고 했다. 사람들이 사회자의 말에 따라 카운트 다운을 외치며 풍선 축제의 개막을 알린다. 카운트 다운이 끝나는 순간 대형 열기구들에 불이 켜지면서 관객들에게 익살스런 풍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계획이다.

▲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캐릭터 중에 하나인 강아지 풍선.
ⓒ 문종성
"자, 이제 드디어 기다리시던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 바로 풍선 퍼레이드 시간입니다. 여러분 저를 따라 열부터 하나씩 줄어가며 숫자를 세면 앞에 보이는 대형 풍선들이 일제히 불을 밝힐 겁니다. 그럼 큰 소리로 외쳐볼까요? 10, 9, 8, 7…3, 2, 1!"

모든 관중이 아이가 되어 일심일언으로 크게 외친다. 하지만 준비가 덜 됐는지 1차는 실패. 하지만 누구도 실망한 기색이 없다. 이런 레퍼토리야 언제나 볼 수 있는 퍼포먼스니까. 다시 기대감에 부풀어 환호하며 2차 카운트 다운과 함성을 울려봤지만 여전히 준비가 안 된 상황이다. 사회자는 이제 관중들을 낚는 낚시꾼이 된다.

'더 크게 카운트 다운을 외쳐라, 함성을 질러라,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정말 시작한다, 집중해라' 외치면서 계속해서 3차, 4차, 5차 연이어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를 유도했지만 열기구들은 여전히 점검 중이다. 드디어 6차. 사회자가 무슨 사인이라도 받았는지 이전과 다르게 확신에 찬 어조로 더 크게 관중들에게 어필한다. 10부터 세기 시작한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수록 긴장감은 고조되고 관중들은 뚫어지게 풍선을 쳐다본다.

드디어 풍선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열기구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하면서 그 광경을 목도한다. 웬만한 몇 층짜리 건물크기의 대형 풍선들에 불이 켜지자 밤하늘에 대형 등을 달아 놓은 듯 주변이 환히 밝혀진다. 비록 비온 뒤 흐린 날씨인지라 열기구를 하늘에 띄워 보내지는 못했지만 퍼레이드를 통해서 생경스런 풍선들의 향연을 보니 어느 정도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풍선처럼 부푼 가슴 안고 캐나다로!

▲ 꿀벌 모양의 풍선에 불이 켜지자 제법 귀여운 모습이 나온다. 하지만 높이는 약 5층 건물과 맞먹는 대형 풍선이다.
ⓒ 문종성
풍선처럼 부푼 가슴을 안고 떠나온 멀고 먼 여정길인데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는 풍선처럼 마음 속 남몰래 감춰둔 내 꿈도 잡히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까 두렵기만 하다. 정신없던 축제는 지나가고 남은 자리엔 풍선 조각처럼 터진 흔적만 남아있겠지. 그 흔적을 통해 부풀어있었던 지난날을 반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 '호수의 도시' 벌링턴에서.
ⓒ 문종성
나의 자전거 세계일주는 아직 공기주입 단계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여행이라는 풍선 속에 넣어야 할 숨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무거운 숨보다는 하늘에 오를 수 있도록 가벼운 숨으로 채워보고 싶다. 경쟁 속에서의 성공에 대해 집착하고 고민하는 지금의 인생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논증하려 들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망과 행복과 사랑 같은 부분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 오늘도 그런 삶을 꿈꾸며, 이제 국경을 넘어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두 번째 나라인 캐나다를 향해 달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파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벌룬 페스티벌'이었기 때문에 열기구라는 단어 대신 풍선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필자는 현재 시카고에 머물고 있습니다.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는 http://www.vision-trip.net 입니다.


태그:#자전거여행, #벌링턴, #풍선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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