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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방 십리에 검차를 주욱 늘어놓으니 말 탄 거란 놈들이 달려오다가는 생 꼬치가 되어 죽을 판이라. 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어지러울 때 검차 안쪽에서 활을 당겨 족족 쏘아 맞춰 죽이니 거란놈들이 혼구멍이 나 쫓겨 나갔지.

그러나 우리 십만 대군을 어찌 다 검차로 둘러싸겠소? 죽죽 늘어선 검차 대열 옆으로 빈 구멍이 있는데 거란 놈들이 그것을 알아차린 거라. 거란놈들이 오기만 하면 쫓겨 가니 상장군은 본영에서 한가로이 바둑만 두고 계셨는데 갑자기 말 탄 거란 놈들이 들이닥치니 갑옷 한 자락 못 걸치고 사로잡혀 버렸네!”

“어이구 그렇게 어이없이 당했단 말이오?”

병사들이 술렁이자 전령은 물 한 사발을 들이켜고 입가를 옷자락으로 슥 훔친 후 말을 계속했다.

“본영에서 대장기가 폭삭 넘어가고 함성소리와 함께 거란놈들의 기가 우뚝 섰지! 우리 군사들이 그것을 보고 놀라 검차를 버리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니 사방에서 말 탄 거란놈들이 활을 쏘며 들이닥치더라고! 거란놈들이 우리 군사들을 말로 짓밟고 화살을 쏘고 칼창으로 찍고 죽여 대는데 생지옥이 따로 없었네. 그렇게 십만 병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니 참으로 분통이 터질 지경이네.”

전령은 그 와중에서 흩어진 병사들 중 한명이었다. 령장 이랑이 이끄는 1천여 병사들은 거란군이 물러갈 때까지 통주 주변에 매복해 있다고 이랑이 전령을 보내 흥화진에 곽산성 함락 소식까지 전하게 된 것이었다.

“이랑장군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지. 이랑장군이 어떤 분이냐 하면….”

전령의 넋두리가 계속해서 이어지자 지겨워진 유도거와 김달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른자리를 찾아서 갑주를 벗어 펴고 칼과 창을 베고 누웠다.

“나나 자네나 여기까지 와서 참 고생이구먼.”

김달치의 말에 유도거는 껄껄 웃었다. 한때 수도 개경을 지키는 위령장이었던 유도거와 김달치의 운명은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뒤바뀌었다. 강조를 없애려고 했던 김치양의 아래에 있었던 그들은 김치양이 참수되자 병졸로 지위가 격하되어 흥화진으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강조를 원망하진 않고 단지 운이 없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따름이었다. 어차피 흥화진을 비롯한 강동6주는 고려의 군인이라면 한번쯤은 가야할 곳이기도 했다.

“교대할 때가 되었수.”

한밤중이 되자 병사하나가 유도거와 김달치를 깨웠다. 둘은 벌떡 일어나 깔고 누웠던 갑주를 입고 활과 칼, 창을 챙겼다.

“거 바깥바람도 쌀쌀한데 막사로 들어가서 자지….”

병사가 혀를 끌끌 찼지만 유도거와 김달치는 이를 더 편해했다. 그들이 자는 곳은 거란군이 야습이라도 한다면 그 누구보다 먼저 즉시 뛰어 올라갈 수 있는 위치였다. 그들은 철저히 무인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이었다.

“제길 자고 일어났더니 바람이 차네.”

유도거가 몸을 움츠리자 김달치가 퉁을 주었다.

“여기 온 이후에는 무예를 연마하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더니 몸이 약해진 게로군.”
“허 이 사람아! 그건 자네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잡담을 나누던 유도거와 김달치가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뒤로 누군가 몰래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가오는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보통 병사들이라면 그런 식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유도거는 칼을 슬그머니 뽑아들었고 김달치는 언제든지 앞으로 내어지를 수 있게 창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도거와 달치냐?”

목소리를 들은 유도거와 김달치는 깜짝 놀라 무기를 거두었다. 그 목소리는 바로 흥화진을 지키는 병사들을 총괄하는 도순검사 양규의 목소리였다.

덧붙이는 글 | 1. 두레마을 공방전
2. 남부여의 노래
3. 흥화진의 별
4. 탄금대
5. 사랑, 진주를 찾아서
6. 우금치의 귀신
7. 쿠데타


태그:#결전, #연재소설, #최항기,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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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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