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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귀퉁이에서 '례(禮)'라는 글씨가 보이는 천이 내려지고, 장문위가 한쪽에 내려서자 비무장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어느새 마주보고 있던 두 사람의 거리는 삼장 정도로 벌어졌고, 좌등은 들고 있던 창을 자신의 오른쪽 바닥에 꽂았다.

팍!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바닥에 창끝이 파고들며 창대가 파르르 떨렸다.

"천년 소림의 권각법(拳脚法)을 견식함에 있어 맨몸으로 부닥쳐 보고 싶군."

어찌 보면 오만하다고 할 정도의 자신감을 보이는 것 같았다. 허나 그것을 자만심의 표출이라든가 건방을 떨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좌등은 진정한 무인이었고, 그것은 무인으로서의 보일 수 있는 진정한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좋으실 대로… 본인 역시…."

광나한은 그가 두개로 나누어져 잇는 북두장을 하나로 연결시키고는 역시 바닥에 꽂았다. 과거 철담과의 대결에서 부러진 것을 그대로 깎아 다시 연결하도록 만든 것 같았는데 연결된 한쪽에는 과거와 같이 둥근 수정구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자 길이의 날카로워 보이는 폭이 좁은 도가 꽂혀 있었다. 장(仗)과 도(刀)의 효용을 동시에 가진 일종의 선장이 된 것이다. 아마 광나한이 어제 북두장이 변형되었다는 말은 저것을 두고 말한 것 같았다.

"그럼…."

광나한은 정중하게 좌등에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취했다. 무림선배에 대한 예의다. 좌등 역시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받는 순간 광나한의 신형은 마치 용수철에 튕기듯 좌등에게 쏘아갔다. 갑작스런 기습이라면 기습이었다. 허나 이미 비무가 시작된 상황에서 비겁하게 기습을 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파파파 팟팟!

광나한의 소매바람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질러댔다. 소림오권(少林五拳) 중 호권연골(虎拳練骨)이다. 백수의 제왕인 범(虎)과 같이 팔과 다리의 힘을 강건하게 단련하고, 허리를 견고하게 만들어 파괴력을 극대화시킨다는 무공.

무림인들 중에 소림오권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 동작 하나하나 이미 널리 알려졌고 흔히들 권법가라고 하면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 이것이었다. 또한 무림에 수많은 권법들이 생겨났지만 그 모든 것의 기초는 소림오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터.

아무리 권법과는 무관한 좌등이라지만 소림오권의 변화를 모르고 있을까? 그럴 리는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광나한이 소림오권을 들고 나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허나 그 이유는 삼초가 지나지 않아 금방 밝혀졌다.

"좋군!"

좌등이 감탄이 섞인 음성을 발했다. 광나한의 양팔은 범의 앞발처럼 강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고, 두 다리 역시 빠른 움직임과 더불어 안정적이었다. 소림오권을 펼쳐내는 인물들은 많지만, 또한 그럴듯하게 모방하는 자들도 많지만 광나한의 모습은 진정한 소림오권이 어떤 것인지, 진정한 소림의 무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모습 같았다.

양 팔로 치고 때리며 내리치는 모습이 전설 속의 백호(白虎)가 현신한 것 같았다. 좌등은 뻗어오는 광나한의 주먹을 막았지만 팔뚝이 시큰해지는 충격을 받은 이후로 되도록 광나한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사사사삭!

더구나 광나한이 방위를 짚어가며 좌등의 발등을 밟듯이 움직이자 좌등의 움직임은 어지러워졌고,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좌등은 권법가는 아니었다. 그는 간간히 어설픈 주먹질로 광나한의 공격을 잠시 지연시킬 뿐 공격다운 공격은 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광나한이 맹호신요(猛虎伸腰)의 자세로 좌등의 허리부터 하체를 공격해오자 좌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신형을 허공에 떠올렸다. 그러자 광나한이 이미 좌등의 움직임을 예측했던 듯 백호추산(白虎推山)의 모습으로 허공에 치솟아 오르며 여전히 좌등의 하체를 노렸다.

"흐음!"

좌등의 입에서 나직하지만 다급한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역시 권각에 있어서는 광나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며 뻗은 좌권이 무릎을 스쳐지나가고 결정적인 우권이 좌등의 복부에 박히려는 순간 허공에 떠있던 좌등의 오른발이 무릎 아래만 빠르게 움직여 광나한의 명치를 노리며 파고들었다.

"헛!"

광나한의 입에서도 짧은 탄성이 터졌다. 그것은 아주 탁월한 임기응변이어서 만약 광나한이 계속 공격한다면 좌등의 복부를 강타할 수 있겠지만 광나한 역시 급소를 파고드는 좌등의 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터였다.

광나한의 신형이 허공에서 뒤집어지면서 길게 바닥과 수평을 이루었다. 그러자 좌등이 모처럼의 기회를 잡은 듯 무지막지하게 두 발바닥으로 광나한의 가슴과 복부를 짓밟아 갔다. 좌등의 공격은 마치 시정잡배가 싸움을 하는 것과 같아서 절묘한 동작이나 현란한 발기술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기회가 나는 때마다 날카로운 반격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어설픈 동작이라 해도 위력만큼은 절대 무시할 것이 아니었다. 아마 저 발바닥에 찍힌다면 뼈가 부러져 나갈 터이고, 자칫 즉사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광나한의 상체가 더욱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떨어져 내리며 두 발이 허공으로 올려졌다.

타타타닥!

광나한의 발바닥이 찍어오는 좌등의 발바닥과 맹렬하게 부닥치며 차올리고 있었다. 발바닥과 발바닥이 마주치며 각목이 부닥치는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경우 아래에 있는 쪽은 확실히 불리하다.

떨어져 내리는 가속으로 인해 더 큰 압력을 받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광나한은 손을 바닥에 대고 비스듬히 물구나무를 선 자세로 좌등의 발바닥 공격을 막아내고 있을 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발놀림으로 오히려 미세한 틈을 타 좌등의 발목을 노리며 수차례나 공격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좌등이 아무런 득을 보지 못하고 발바닥이 마주치는 탄력으로 신형을 뒤로 돌리며 한바퀴 회전을 하며 물러나자 오히려 여전히 몸을 지면과 수평으로 날리며 연속적으로 좌등의 전신을 노리며 발길질을 해갔는데 그 공격은 너무나 빠르고 매서운 것이어서 좌등은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급히 오장이나 뒤로 주륵 물러나야 했다.

이것이 바로 한 번 몰아치면 막을 수가 없다는 소림의 항마연환신퇴(降魔連環神腿)였다. 좌등은 손을 비스듬히 엇갈리게 하며 팔꿈치와 팔목 아래로 채 피하지 못한 광나한의 발을 쳐내기 바빴다. 동시에 더 이상 물러나다가는 그어놓은 선 밖으로 내몰릴 것 같자, 몸을 옆으로 돌리며 오른발로 차올려 광나한의 등을 노리자 광나한이 몸을 뒤집어 옆으로 물러나면서 가까스로 첫 번째 십여 초를 넘게 교환했던 드잡이질은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역시 좌선배의 명성은 헛된 것이 아니었구려!"

감탄이었다. 그저 인사치례가 아니었다. 광나한은 권각법을 익히지 않은 좌등이 소림의 두 가지 권법과 각법을 무사히 막고 피하자 상대의 무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좌등이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지 않고 광나한의 신형이 다시 빠르게 다가들었다.

"이번에도 피할 수 있는지 보겠소."

기회를 줄 필요는 없었다. 좌등의 특기는 창술이다. 그의 손에 창을 잡게 한다면 정말 승부는 예측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승부다. 승부에서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어 기회를 줄 이유가 없다. 더구나 상대가 자신에게 준 기회였다.

상대가 진실한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든 상태에서 대결하는 것이 진정한 승부라는 케케묵은 도덕이나 윤리는 지나가는 개도 웃을 일이다. 나중에 갈려질 승부에서 승자와 패자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하는 자는 패자의 쓴 맛을 모르는 자의 헛소리다.

승부란 이겨야 하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승자가 되고 볼일이다. 승자는 모든 것을 얻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더구나 유리한 상황에서 상대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지 못하고 봐준다면 진정한 승부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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