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아주 단순해 보이면서도 연꽃과 같이 순결한, 한편으로는 고고하면서도 어찌 보면 뭇사람들을 발밑에 내려다보는 오만과 도도함도 엿보이는 듯했다. 한 여인의 모습에서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

우슬은 사방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며 목례를 보냈다. 인사를 하려면 연배나 무림의 배분 상 일일이 앞에 가 예를 올리는 것이 예의였지만 아주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간단한 목례만으로도 좌중은 황급히 답례하고 있었다. 더구나 추교학은 마른 침을 삼키며 넋을 잃고 있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본 추태감은 언짢아지면서도 고개를 끄떡였다. 아들이 정신을 잃을 만한 여자아이임을 인정해야 했다.

"아………!"

더구나 자리로 걸음을 옮기며 살짝 떠올린 미소는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나직하지만 탄성이 흘러나오고 의식적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녀의 시선이 함곡 일행으로 향하더니 의자에 몸을 걸쳤다.

'우슬……!'

그녀를 바라보는 설중행의 얼굴에 당혹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자신의 정혼자(定婚者)라고 했다. 누가 정했는지 모르지만…. 아니 보주일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자신의 배필로 정해진 여자였다. 같이 온 귀산노인이 우슬이 했다고 전한 말이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

-- 하필이면 멍청스런 사람이 자신의 배필이냐고……. 너를 가리킨 말이었어.

자신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여인이다. 바라만 보아도 그저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런 여인이다. 아닐 것이다. 우슬은 잘못 알고 있을 것이다. 보주 역시 자신의 부친이 아닐 것이고…. 저기… 언제나 자신에게 그윽한 눈길을 주던 회운사태도 자신의 모친은 아닐 것이다. 그럴 리 없다. 절대로 그럴 리 없다. 그들이 자신의 부모라면 왜 지금까지 내팽개쳐 두었단 말인가?

귀산노인과 우슬이 좌등의 옆에 가 자리에 앉은 다음에도 좌중의 시선은 우슬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결국 장문위가 다시 중앙으로 나서며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좌중의 시선은 꿈에서 깨어난 듯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장문위 쪽으로 돌려졌다.

"흐음…. 이제…."

장문위가 잠시 말을 끌며 좌중을 쭉 둘러보았다. 그것은 흐트러진 좌중의 시선을 자신에게 집중시키기 위함이었고,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불초 소생 장문위가 인사드리오."

그는 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사방으로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무림 말학인 소생이 이렇듯 많은 분들 앞에서…. 더구나 흠모와 존경의 염으로 좌총관어른과 수석교두인 광나한 교두님의 숭무지례를 주관하게 되어 영광스럽고, 한편으로는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말수가 적은 장문위였지만 일단 말을 하기 시작하자 예의 바르고 법도에 어긋남이 없으면서도 청산유수다. 좌중의 인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보주의 대제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럴수록 불안한 것은 옥기룡과 추교학이었다. 만약 자신들이 저 자리에 섰다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과 함께 자신이 저 자리에 서 있지 못함을 아쉬워했다. 좌중 모두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이런 자리와 기회는 흔치 않았다.

"이런 대사(大事)를 맡기에 부족한 소생이지만 일단 맡겨진 일이라 최선을 다해 불상사가 없도록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잔소리가 없고 매끄럽다.

"일단 숭무지례를 시작하기에 앞서 참관인이 되신 두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중의어른과 성곤어른이십니다."

장문위가 시선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자 중의와 성곤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중의를 확실히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 대다수인지라 시선은 성곤보다 중의 쪽에 쏠리는 편이었다.

"오늘 숭무지례의 승부 결정은 두 분께서 내리실 것입니다. 또한 좌총관 어른과 광나한 수석교두 역시 모두 동의한 사항입니다. 두 분과 이미 상의한 이번 숭무지례의 규칙 몇 가지를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쟁쟁한 인물들 앞에서도 장문위는 한 점 위축되는 기색 없이 차분하면서도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승부를 결정하는 데는 제한이 없습니다. 병기는 각자의 독문병기를 사용하고 설사 만일의 경우 한쪽이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한쪽이 졌음을 인정하는 경우 더 이상 손을 쓰면 안 되며, 비겁한 암습은 절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비겁한 암습을 할 경우 참관인 두 분은 물론 소생도 나서 저지할 것입니다."

병기에 눈이 없다지만 지금까지의 숭무지례는 대개 목숨까지 걸고 승부하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승부를 보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승부는 이 선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선을 벗어난 경우에는 공격하지 않기로 두 분이 약조하셨습니다. 단, 이 선을 세 번 나가게 되면 그 쪽이 패한 것으로 결정하였습니다. 모쪼록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고 후배들과 무림동도 여러분의 안계를 넓혀주는 좋은 비무가 되길 기대하겠습니다."

가로세로 십장 정도의 선을 그어 사각형을 만들어 놓은 것이 그 이유였던 모양이었다. 그런 규칙이라면 상대의 결정적인 공격을 최소한 두 번 정도 회피할 수 있다는 뜻. 이 또한 변수가 될 수 있었다. 말을 마치고 좌중을 향해 포권을 취하자 추산관 태감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쨕쨕쨕----!

그러자 주위 모두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장문위는 다시 한 번 포권을 취하며 답례를 했고, 곧이어 좌등과 광나한을 바라보며 정중히 안으로 들어오라는 동작을 보였다. 그 신호에 맞추어 좌등과 광나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더 추가할 사항은 없으신지요?"

장문위가 두 사람에게 각각 가볍게 예를 취하며 물었다. 좌등과 광나한의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더 이상 뭐가 필요할 것인가? 무인에게 있어 비무란 본래 조건이 없는 것이다. 굳이 선을 그어 비무장을 만든 것 또한 불필요한 일이었으나 참관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고려한 것.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좌등의 왼쪽어깨 언저리는 약간 부풀어 올라있어 안에 붕대를 감고 있음을 알만 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광나한의 시선에 얼핏 득의의 미소가 스쳤다. 이미 왼쪽어깨에 이상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들은 터였다.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될 일을…' 하고 겸양했지만 이로써 자신이 승리할 확률은 더욱 높아진 터였다.

"그렇다면…, 이제 시작하도록 하시지요. 한 가지 양해 말씀 드릴 것은 두 분 모두 시간의 제약이 없는 것을 원하셨지만 이것은 보 내의 숭무지례인 만큼 시간을 제한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무장 네 모퉁이에 한 시진 정도 탈 수 있는 촛불을 켜놓을 것이고, 촛불이 모두 타 들어가 늘어진 천과 연결된 줄을 태워 천이 모두 떨어져 내리면 끝내기로 하겠습니다. 시작은 네 모퉁이의 촛불이 모두 점화되는 순간입니다."

말과 함께 장문위는 품속에서 화섭자를 꺼내드는가 싶더니 신형을 허공에 빠르게 띄어 올렸다. 그리고 비무장이라고 선을 그어놓은 네 모퉁이 중 한쪽을 향해 날아갔는데 이미 네 곳에는 천장 가까이 황촉불이 작은 대위에 올려져 있었다.

파짓---!

몸을 날려 화섭자를 긋는 순간 황촉 불에는 불이 켜졌고, 그에 매달려 있던 붉은 천이 주르륵 아래로 내려쳐 졌다. 그 천에는 '숭(崇)'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고, 채 바닥까지 내려오지는 않았다. 아마 촛불이 모두 타고나면 대에 묶은 줄이 타들어가 천이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내심을 서늘하게 만들고 탄성이 나오게 한 것은 장문위의 몸놀림이었다. 아주 유연한 동작으로 그리 빠르지 않게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다른 쪽 귀퉁이를 향했는데 그 모습이 정말 예사롭지가 않았다. 네 개의 귀퉁이에 불을 붙이는 동작이 마치 한 동작과 같았다.

#우슬#광나한#좌중#장문위#천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와 저 인생의 후반기를 풍미하게 될지도 모를 무협작품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지는 만인의 것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