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내가 '시골 땅'을 밟기는 쉽지 않았다. 서울하고도 중심가라고 하는 동네 출신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시골에 연고라고는 없는 분들이었다. 친척도 아는 분도 없었으니 시골에 갈 일이 있었으랴.

지금처럼 살기가 괜찮고 길이 잘 뚫렸다면, 마음만 먹으면 훌쩍 차라도 몰고 바람 쐬러 다녀올 수 있으련만, 시골로 향하는 운행수단이라고는 열차밖에 없던 60∼70년대에 시골에 바람 쐬러 간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1960년대 말에는 TV가 있는 집이 거의 드물었다. 아직 산업화가 제대로 진행되기 전이니, 명절이면 선물 보따리를 메고 고향으로 향하던 지옥열차 이야기가 나온 것도 한참 후의 일이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열차가 한가했던 것은 아니었다. 열차편이라는 게 자주 있던 것도 아니고, 그나마 대부분은 완행열차를 타고 다니던 때여서 열차 안은 무척 복작거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시골에 사고무친인 줄로만 알았던 내게 방학 때가 되자 어머니가 시골에 같이 다녀오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시골? 웬 시골? 엄마 우리도 시골에 친척이 있어?"

동네 이외에는 멀리 나가본 적도 없고, 방학 중에 동네 애들하고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로 낮시간을 허비하다가, 밤이면 어머니나 치대던 내게 시골에 가자는 말씀은 귀가 번쩍 뜨이는 이야기였다.

"어. 엄마 아는 언니가 충남 예산에 사는데 놀러 오라는 연락이 왔어. 내일모레 가자."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그렇지 않아도 콧구멍만 한 집과 미로 같이 좁은 골목길에서 노는 것이 지겨웠는데 시골이라니…. 이틀 밤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지루한 기차여행

어머니가 이야기하고 사흘째 되던 날. 엄마와 나는 장항선을 탔다. 처음 타보는 열차라 신기했다. 방학이라 그런지 평일인데도 열차 안은 만원이었고,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겨우 비집어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는데, 어머니와 내가 번갈아 가며 앉았다.

선로 이음매를 넘을 때마다 '딸깍딸깍' 소리를 내고, 겨울이라 차창 밖으로 보이는 스산한 시골의 풍경과 역마다 낮게 내려앉은 역사, 사람들의 두런거리는 소리에 나는 흥분이 되어 처음에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한참을 가며 어머니가 열차 안에서 사준 볏짚으로 엮은 두름에 얹힌 삶은 달걀도 그렇게 맛이 있었다.

그런데 호기심은 잠시, 아침에 탄 열차가 점심때가 되어도 목적지인 예산에 다 왔다는 방송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내리면 또 타고, 열차 안은 처음 탈 때나 똑같이 만원이었다. 불편하고 지겨워졌다.

"엄마. 아직 멀었어?"

이렇게 물어볼 때마다 엄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돼."

아침에 출발한 기차는 거의 컴컴할 때 다 되어서야 우리를 예산역에 내려놓았다. 예산역에 내리면 끝인 줄 알았는데, 거의 삼십 분 이상을 기다려 버스를 타야 했고,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다 되어 목적지 정류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 내려서도 가로등 하나 없는 외진 산골 길을, 인광이 가끔 번뜩이는 묘지 앞도 지나며 밤늦게나 어머니 언니라는 분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피곤하고 먼 여정이었다. 나는 지쳐 떨어져, 나무로 불 땐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등이 거의 익어가는 줄도 모른 채 곤하게 잤다. 아침에 내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개울에서 썰매 타고, 밤에 아궁이에 불 때며 고구마 구워 먹고, 마침 또래 애가 있어 술래잡기하고 그렇게 일주일인가 열흘을 보냈다.

말이 서울이지, 서울에서는 배고프게 지냈으나 시골은 먹을 것 천지였다. 감자도 그렇고 고구마도 그렇고, 끼니도 꼬박꼬박 먹었다. 가끔 어머니의 언니 되신다는 아주머니가 벽장에서 꺼내주시는 조청으로 버무린 한과는 훔쳐 먹고 싶을 만큼 달콤했다.

꿈 같은 시간이 흘러가고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처음에는 심심하고 낯설더니 또래의 애들과 어울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다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이 섭섭했다. 오히려 더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통로를 막은 고구마 가마니

어쨌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어머니의 언니뻘 되신다는 그분은 동구 밖까지 우리를 배웅하셨다. 손수레에 고구마 한 가마니를 싣고 아들 되는 분이 차부까지 우리와 함께 갔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버스가 왔고 그분은 낑낑대며 버스에 고구마를 실어주셨다.

예산역에서 내려 어머니와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구마 한 가마니를 밀다시피 하며 역사로 들어갔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열차가 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어머니가 고구마를 짐으로 부치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고구마 가마니를 열차 안으로 같이 들어올리자고 했고, 어려서 힘이 없는 나는 젖 먹던 힘을 다해 어머니와 고구마 가마니를 들어올리는데 이게 여의치가 않았다.

그러자 기차를 타려고 옆에 서 있던 어느 청년이 거들어 같이 들어올려 주었다. 그분은 "아니 이걸 부치시지 왜 들고 타시느라고 그러세요?"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겸연쩍게 웃으실 뿐이었다.

말이 고구마 한 가마니지 기차에 들어올리자 고구마는 통로를 완전히 점령해버렸다. 사람들이 오르고 내릴 때마다, 통로를 지날 때마다 고구마 가마니를 밟다시피 하며 투덜거렸다.

"아니 이걸 짐으로 부치지 왜 들고 타가지고서는 이리 복잡하게 만들어?"

지나는 사람마다 불평을 하고 주위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거들 때마다 내 얼굴은 화끈거렸다. 예산에서 서울로 오는 열 시간도 훨씬 넘었던 것 같던 시간, 나는 좌불안석이었다. 예산으로 갈 때보다 서울로 향하는 기차는 더욱 더디고 지겨웠다.

그래도 어머니는 막무가내였다. 누가 그러거나 말거나 짐짓 딴청을 피우며 '너는 짖어라, 나는 대꾸 안 한다'는 식으로 무시하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의 기차여행 환상 같은 건 예산으로 갈 때나 서울로 올라올 때나 잊힌 지 오래였다. 그저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고구마 가마니보다 더 무거웠을 어머니의 삶의 무게

긴 기차여행이 끝나고 서부역에 내렸다. 창피하고 지겨운 기차여행이었다. 다시는 기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미웠고, 사람들의 불평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것이 자존심 상했다. 도대체 엄마는 나에게 왜 그리 창피를 주었던 것일까.

웬만큼 힘써서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고구마 가마니를 기차에서 내려 질질 끌고 역사를 빠져나오자 어머니는 손수레를 불렀다. 그 시절 서울역사 앞에는 짐을 싣는 손수레가 있었고, 소가 아닌 사람이 끄는 우마차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마차는 손수레보다는 많은 짐을 싣기 위해 사람들이 이용하던 수단이었다.

손수레에 고구마를 싣자, 엄마와 나는 그제야 고구마 한 가마니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서부역에서 동대문까지 우리는 손수레의 뒤를 쫓아 터덜거리며 걸었다. 밤늦게서야 집에 도착해 나는 씻을 겨를도 없이 지쳐 잠에 곯아떨어졌다.

나중에서야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짐 부치는 값이라도 줄여 볼 요량으로 고구마 가마니를 들고 탄 모양이었다. 고구마는 언니라는 분이 끼니 걱정에 날 새는 줄 모르는 엄마에게 그냥 선물로 준 것이었다. 무겁더라도 가져가면 다 식량이라고…

그렇게 어려운 터에 한 푼이라도 아끼자고, 어머니는 그 불평을 들어가며 열차 통로에 고구마 가마니를 부려놓은 것이었다. 덕분에 그해 나머지 겨울 우리 식구는 배고프지 않고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다.

아주 예전에는 보통열차였고, 나중에 비둘기호라고 불렸던 그 열차는 이제 다니지 않는다. 세월이 간 것처럼 어머니도 이제 살아계시지 않는다. 그 후에 청평으로 혹은 밤새워 강릉까지 기타를 치며 놀던 우리를 실어 나르던 그 열차는 이제 없어져 버렸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해 겨울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예산까지 나를 데리고 가셨던 긴 기차여행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가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살았던 삶은 그 고구마 한 가마니보다 더 무겁고 힘든 역정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