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고향은 경부선 철로가 바로 집 앞을 지나가는 마을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차는 실컷 보고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증기 기관차가 다녔다. "칙칙폭폭 꽥~" 하며 증기 기관차가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면 그 검은 연기가 우리 집 마당으로 달려들어 나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월남전이 한창일 때는 파병을 떠나는 군인들을 수송하는 열차가 "맹호부대 용사들아~~~~"하며 우렁찬 군가를 부르며 지나갔고, 두 량짜리 고급 기차가 지나가면 대통령이 탄 기차라며 좋아했다. 기찻길은 엄마가 지정해 준 나의 접근금지구역 중의 하나였는데, 춘화를 따라 몰래 올랐다가 마당에서 올려다본 엄마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했었다.

그때는 몰랐었다. 엄마가 왜 철둑에도, 저수지 근처에도, 또 봇도랑에 저수지 물을 빼는 날에도 근처에 가지 말라고 했는지. 아이들은 선로 위에 못을 올려놓고 기차가 지나간 뒤 납작해진 못으로 썰매 손잡이를 만들기도 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위험한 행동을 못 하게 하려고, 선로에 못을 올려놓으면 기차 바퀴가 걸려 옆으로 굴러 떨어진다고 겁을 주었지만, 그깟 엄포에 겁먹을 아이들이 아니었다.

마당에서 땅뺏기를 하다가도, 학교 운동장에서 공기놀이를 하다가도, 기차가 지나가면 두 손을 크게 흔들며, 사람들은 저 기차를 타고 어디로 가는지 한없이 부러웠었다. 그러나 몸이 성치 못했기에 더욱 탈 기회가 없었던 기차를 타게 된 것은 스무 살 때였다. 대구 근교에 있는 섬유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하청을 받아 하는 가내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얼마 가지 않아 그 집이 문을 닫게 되었다.

다른 공장을 구할 때까지 잠시 쉬기로 하고 짐을 챙겨 집으로 왔는데 외가로 친척 뻘 되는 아지매가 찾아왔다. 서울에서 편물 공장을 하는 아들네에 가서 편물 기술을 배워보라고 했다. 기술만 배우면 그동안 받던 월급의 두 배는 거뜬히 벌 수 있다고. 안 그래도 하던 일에 회의를 느꼈던 나는 귀가 솔깃했다. 저 기차를 타고 가면 내 꿈의 종착역에 닿을 수 있겠지 하고 동경하던 미지의 세계가 그곳일 것만 같아 서울행을 결심했다.

바람이 유난히도 매서운 크리스마스 이브 날 저녁, 밤 9시 20분에 출발하는 용산행 완행열차를 타려면 윗마을에 있는 간이역으로 30분을 걸어 나가야 했다. 그러나 한쪽 다리에 힘이 없는 나는,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잘못 밟으면 넘어지기가 일쑤여서 무릎이 성할 날 없었는데,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그것도 캄캄한 밤길을 걷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각 끝에 아버지는 손수레를 끌고 나오셨다. 바닥에 헌 담요를 깔아 나를 태우고 아버지는 앞에서 끌고 엄마는 뒤에서 밀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은 마른 잎사귀를 몰고 다니며 울고 있었고, 까만 하늘에 총총 박힌 별들은 나를 배웅하려고 자꾸만 따라오고 있었다. 조일 듯 가까이에 서 있는 양쪽 산 저 너머에선 배고픈 늑대 울음소리도 메아리로 들려왔다.

"서울에는 깍쟁이도 많고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 카는데 어수룩한 니가 잘 할랑가 모리겠다. 함부로 혼자 댕기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데이."

그 먼 서울로 몸도 성치 않은 딸을 보내는 아버지는, 편치 않은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계셨다. 그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덜컹덜컹 손수레는 그렇게 엄마 아버지의 한숨까지 싣고 매서운 바람 속을 걸어 역 마당에 도착했다. 북풍을 맞은 세 사람의 얼굴은 벌겋게 얼어 있었다.

개찰을 하고 플랫폼으로 나갔다. 산모퉁이를 돌아온 기차가 "꽤액-" 기적을 울리며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차 문이 열리고 "잘 가거래이. 그라고 어렵더라도 잘 참고 하거래이" 못내 걱정을 놓지 못하는 엄마 아버지를 뒤로 하고, 나를 데리고 가기로 한 그 친척 아지매와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덜컹거리며 출발을 하자 엄마와 아버지는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고 아지매와 나는 빈 자리를 찾아 마주 앉았다. 처음 타보는 기차는 신기했다. 밤 기차라 그런지 대부분 사람은 잠을 자고 있었고, 초록 의자도, 천정에 매달린 선반도, 삶은 달걀과 구멍이 송송 뚫린 망에 든 사과도, 각종 과자와 음료를 손수레 싣고 다니는 판매원까지도, 아주 사소한 것들이지만 모두가 낯선 나는 두리번거리며 촌티를 내고 있었다.

기차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달음박질을 치고 이따금 밝은 불빛들은 왔다가 또 사라지곤 했다. 함께 가는 아지매는 어느 듯 잠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 눈은 초롱초롱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때, 옆 칸 문이 열리며 우락부락한 남자 세 명이 눈동자를 마구 희번덕거리며 들어왔다. 남자들은 대부분 자는 승객들 가운데서 혼자 탄 젊은 여자 승객을 골라 "어이! 아가씨 어데 가능교? 심심한데 우리하고 같이 안 갈랑교?" 하며 찝쩍대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아가씨가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내리자 "와? 싫나? 어차피 심심할 텐데 비싸게 놀 거 없잖아"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잠에 취한 아지매는 눈 뜰 생각을 안 하시고, 남자들은 그렇게 칸칸이 돌아다니며 일행이 없는 아가씨들을 괴롭히는 것 같았다.

무서웠다. 이 좁은 기차 안에서도 이런데, 그 넓은 서울에는 얼마나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괜히 따라나섰나 하는 후회도 밀려왔다. 남자들이 서서히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가슴이 벌렁거리며 두 방망이질을 쳤다.

그때 무릎 위에 어떤 물체가 덮어지는가 싶더니, 내 어깨를 확 잡아당기는 힘에 의하여 그 쪽으로 몸이 쏠리고 말았다. 순간적이라 정신이 없었다. 그 무서운 남자들이 해코지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엔 주위가 너무 고요했다. 실눈을 떠보니 옆에 앉은 남자가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그 남자들이 힐끗 한 번 쳐다보고는 다음 칸으로 넘어갔다, 옆에 앉은 남자가 연인으로 가장해 위기를 모면해 준 것이었다. "휴~" 하고 한숨은 돌렸지만 지금부터는 이 남자가 문제였다. 정말로 연인 사이가 된 것 마냥 덮은 옷 속에서 슬그머니 내 손을 잡으려 했다.

지금 같으면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어?" 하며 큰소리를 냅다 질렀겠지만, 그때 나는 너무 순진한 시골처녀라 무언의 반항만 계속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곤히 자는 아지매를 깨우기도 창피했었다.

새벽 4시, 용산 역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그 남자와의 신경전으로 진땀을 빼야 했던 내 생애 처음 타본 기차는, 결코 내가 꿈꾸었던 아름다운 낭만의 기차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터 잡은 서울에서 원하는 대로 편물 기술자가 되었고, 그 편물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니트 옷을 만드는 또 다른 기술을 배워, 사랑하는 가족과 제2의 고향인 서울에서 오늘도 열심히 살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도 응모합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