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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감자탕 집에 갔더니 아줌마 종업원들이 쪼르륵 앉아 한 드라마에 눈길이 꽂혀있다. 손님이 오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한 교수가 요즘 죽겠다고 한다. 아내와 딸이 드라마에 빠져있기 때문이란다. 그 드라마를 보면서 '저 놈 죽일 놈'이라고 하는데 그 '죽일 놈'의 직업이 문제였다. 교수 왈 "하필이면 그 녀석 직업이 왜 교수냐고 참내". 여하튼 한쪽에는 삼매경을, 다른 쪽에는 불쾌함을 주는 이 드라마가 김수현의 SBS <내 남자의 여자>다.

시사 주간지의 한 기자가 전화를 해왔는데, 이번 특집이 김수현의 불륜 드라마란다. 그동안 김수현의 불륜 드라마가 많았으니 묶어서 특집으로 다루려고 한단다. 그러나 김수현이 불륜을 정면으로 다룬 적은 거의 없다. 불륜을 중간 중간에 하나의 이야기 틀거리로 사용하기는 했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불륜을 정면으로 다룬 <내 남자의 여자>는 기대감과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도대체 봇물처럼 쏟아지는 다른 불륜 드라마와 어떻게 차별화시킬 것인가.

마침내 열린 뚜껑은 의외로 간단한 결론을 안겨주었다. '김수현 드라마'로의 회귀였다. <부모님 전상서>나 <홍소장의 가을>에서 보여주었던 '탈' 김수현 표 드라마의 특징은 <사랑과 야망>과 <눈꽃>을 거쳐 <내 남자의 여자>에서 사라졌다. 김수현 드라마의 '하이드'가 부활한 것이다.

한 방송에서 김수현을 비판했더니, 프로그램 작가는 방송 후폭풍에 대해 염려했다. 여러 대중문화 전문기자를 만나봤지만, 모두 김수현을 극찬했다.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매체를 자임하는 매체에서도 그녀는 하나의 전통이자 신화였다. 평론가들조차 김수현을 비판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철저하게 김수현 드라마는 약자의 편에서 공격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수현 드라마에는 밝은 지킬 박사 안에 숨겨진 하이드가 있다.

우선, <내 남자의 여자>의 시청률을 끌어올린 것은 김상중과 김희애의 에로틱한 불륜 장면이 아니라 폭력성, 대화적 선정성, 가학성이 분출되는 장면이었다. 이러한 장면은 약자의 한풀이로 정당화되므로 드라마 몰입감은 증가한다. 여기에서 약자는 여자이고, 강자는 남성이다. 남자는 항상 갈등과 분란의 제공자다. 남성은 욕망의 존재가 아니며, 무성적 존재이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질서를 잡아주어야 한다. 김수현 드라마에 대가족과 역설적으로 가부장적 남성이 빈번한 이유다. 여주인공들은 모두 남성의 사랑에 집착한다. 조강지처든 팜므 파탈(femme fatale 남성을 유혹해 죽음이나 고통 등 극한의 상황으로 치닫게 만드는 '숙명의 여인'을 뜻하는 사회심리학 용어)의 악녀도 마찬가지라 같은 한 몸이다. 결국 조강지처론 강화에 한 몫 한다.

또한 여주인공들은 매우 깊은 나르시시즘에 빠져있다. 상대의 관점은 항상 부차적이다. 자기의 감정과 느낌이 중요해 모두 자기애로 합리화한다. 자기 방어 선수들의 '대화전(戰)'은 설마 저런 이야기까지 하려나 싶은 말들을 가차 없이 쏟아낸다.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듯 모든 상황은 항상 극단적이다. 극단화는 TV에서 시청률 확보에 효과적인 수단이다. 피해의식뿐 아니라 동일시를 갖는다면 엄청난 카타르시르를 느낀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불편함을 넘어 혐오감을 준다. 찬반이 극명한 이유다.

김수현 드라마의 결론은 항상 갈등의 해결보다 봉합이다. 겉으론 휴머니즘이지만, 속에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지독한 냉소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애적 사고와 대화법은 갈등을 해결할 수 없다. 대충 화해라며 갑자기 종결되는 이유다. 이는 무엇보다 김수현의 드라마 속 인물들이 현실에서 구성된 캐릭터가 아니라 작가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추고 싶은 본능들이 부딪치는 선정성은 최고지만, 결론은 항상 유야무야되는 것이 김수현 드라마의 특징이다. 이 때문에 자기애적 감정 순화에만 효과가 있고, 현실 대인 관계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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