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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과 밥을 제외하고, 위 왼쪽부터 배추쌈, 김치, 산초잎 무침, 벼메뚜기 볶음, 물김치, 무말랭이와 고춧잎 무침, 다래순 무침, 콩나물 무침, 취나물 무침
ⓒ 정판수
어제(11일) 저녁 밥상을 받아 가장 먼저 국 쪽으로 눈을 주니 쑥국이었다. 한 입 떠 넣으니 맛도 맛이지만 알싸한 쑥 향기가 입 안 가득 맴돌았다.

무심결에 벌써 쑥이 나왔나 하여 아내에게, "야 쑥국 맛있네. 언제 뜯었어?" 하니, 작년 봄에 뜯은 거라고 했다.

@BRI@'요즘이 아니고 작년 봄?' 하기야 분명 그저께 마을 밭을 죄 둘러보았을 때 아직 우리 달내마을에서는 겨울 해가 길어선지 쑥과 달롱개(달내)는 보이지 않는 대신 겨우 나생이(냉이)만 보였다. 그러니 일부러 쑥국을 해먹으려면 백화점 식품매장에 가 시설 재배한 것을 사오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밥상에 오른 반찬 중 철과 어울리지 않는 게 쑥국만 아니었다. 다래순 무침, 제피(산초) 잎사귀 무침, 취나물 무침, 무말랭이와 고춧잎을 버무린 무침도 보였다. 한 마디로 밥상은 '묵나물 모둠'이었다. 나물을 워낙 좋아하는 식성 때문에 아내가 배려한 것이리라.

'묵나물'이란 낱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해 봄에 뜯어 (삶은 뒤) 바싹 말려 두었다가 이듬해에 먹는 산나물'로 돼 있다. 그러나 그 어원은 아무래도 '오래 두고 묵혀 먹는 나물'이란 데서 나온 것 같다.

▲ 무말랭이와 고춧잎 무침(왼쪽), 산초잎 무침(오른쪽)
ⓒ 정판수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봄날 산과 들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나물을 뜯어 반찬으로 해먹었다. 고기가 귀한 예전에야 봄나물만큼 향기롭고 맛있는 게 어디 있었을까?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나물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 지나면 물리게 마련, 그래서 오래도록 먹기 위해 꾀를 낸 게 바로 묵나물이었다.

묵나물을 만들 나물은 따로 있지 않고 산나물이면 다 되었다. 한 가지 종류만 뜯어 말려도 되고, 둘 이상 섞어 말려도 됐다. 이 나물 저 나물을 뜯어다 삶은 물에 살짝 데쳐 말리면 그걸로 다 됐다. 그러기에 일손도 별로 가지 않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우리 어머니들의 삶의 지혜에서 자연스럽게 묵나물이 만들어진 것이다.

▲ 취나물 무침
ⓒ 정판수
그런데 묵나물은 '묵은'의 의미가 들어 있어 햇나물보다 좀 덜 사랑받는 것 같다. 그러나 묵나물은 햇나물에 비해 맛과 향이 떨어지지 않는다. 특히 햇나물이 나오기 이전, 즉 나물이 귀한 이즈음의 묵나물은 그 맛이 유별나게 느껴진다. 시설 재배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 말 중에 '묵은'이란 말이 붙는 낱말이 여럿 있다. '묵은 김치', '묵은 된장', '묵은 세배(섣달 그믐날 저녁에 그해를 보내는 인사로 웃어른에게 하는 절)' 등. 이들은 대체로 좋은 뜻을 담고 있지만, '묵은 사람' 할 때는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나는 '새 사람'이라기보다는 '묵은 사람'이다. 의식은 새 사람이 되려고 하나 나이 때문에 묵은 사람으로 평가받기에. 그래도 관계치 않으련다.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젊은 사람보다 변화하려고 하는 묵은 사람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에.

▲ 왼쪽 다래순 말린 것, 오른쪽 다래순 무침
ⓒ 정판수
문득 '장은 묵은 장맛이 좋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이 속담 속에는 오래된 장이 새 장보다 나은 점만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친구도 오래된 친구가 좋다는 뜻도 포함한다. 묵은 나물 묵나물을 먹으니 묵은 친구들이 생각한다. 그 친구들을 설날이 되기 전에 진짜 망년회를 겸해서 만나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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