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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차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 주는 나리님과 자포님. 겨우 만난 일행과 다시 이별하려니 가슴이 찡하다
1호차를 배웅하며 손을 흔들어 주는 나리님과 자포님. 겨우 만난 일행과 다시 이별하려니 가슴이 찡하다 ⓒ 오창학
손을 흔들어 주는 나리님과 자포님. 겨우 만난 일행과 다시 이별하려니 가슴이 찡하다. 오전 9시 출발 예정이었으나 근 10시가 다 되어서야 투루판의 숙소를 뜬다. 어젯밤 늦게 해후한 2호차 일행을 남겨둔 채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뗀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2호차 팀은 우루무치에 들렀다가 하미에서 차를 찾아 합류할 계획이건만 왜 이렇게 방정맞은 생각이 드는 것일까.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나리님과 자포님을 뒤로 하는데 그만 가슴이 뻐근하다. 눈두덩도 불콰해진다. 만나겠지, 다시 만나겠지.

투루판에서 투커쑨 가는 길. 이곳을 건너면 타클라마칸으로 넘어서는 산맥에 닿는다
투루판에서 투커쑨 가는 길. 이곳을 건너면 타클라마칸으로 넘어서는 산맥에 닿는다 ⓒ 오창학
투루판을 벗어나자마자 길이 어설퍼진다. 우루무치 쪽을 향하다 꺾어져야 하는데 급한 마음에 투커쑨(托克遜) 가는 샛길로 들었더니 이 모양이다. 마을 어귀의 나무 그늘에 내놓은 침대 위에선 위구르 꼬마 형제 둘이 카드놀이에 열중이다.

일그러진 포장길에서 털럭거리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겨우 한 시간 남짓 달리니 타클라마칸으로 들어서야 하는 진입로의 산들이 보인다. 마이너스 고도에서 해발 1700m까지 단숨에 오르는 길이다. 산세가 만들 수 있는 모든 빛깔과 형용이 다 모인 산길. 붉게 지글거리는 흙덩이산을 도는가 싶으면 눈앞에선 검게 그을린 뾰족 산이 나타나고 그 너머엔 가슴처럼 봉곳봉곳한 돌덩이 산들이 굽이친다.

'돌아올 수' 있는 '사막 타클라마칸'

타클라마칸으로 들어가는 산맥 주변 풍경. 다양한 빛깔과 형용이 어우러진 길
타클라마칸으로 들어가는 산맥 주변 풍경. 다양한 빛깔과 형용이 어우러진 길 ⓒ 오창학
산을 오를 땐 무척 가팔랐는데 타클라마칸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곳은 완만한 내리막이다. 그만큼 투루판의 지대가 낮았고 이곳 사막은 높게 펼쳐져 있다는 말이렷다. 투커쑨에서 314도로로 접어든 후 내쳐 달려 오후 한 시엔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사막 사이로 훤하게 뻗은 1급 도로여서 평균속도 120km를 꾸준히 유지한다.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Taklamakan). '타클라마칸'은 투르크어로 '돌아올 수 없는 땅'을 뜻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유사(流沙), 즉 '흐르는 모래'라 불렀다. 바람에 따라 끝없이 움직이는 사구 때문일 것이다.

동서 2000km, 남북 600km로 한반도 면적의 두 배에 달하며 카라부란(Kara Buran)으로 불리는 살인적인 모래폭풍이 휘감아 도는 이곳은 과연 경외의 땅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1908년 이곳을 탐험했던 영국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이 "아라비아 사막은 타클라마칸에 비하면 길들여진 것"이라 말했을까.

그러나 막상 타클라마칸 사막에 들어선 지금 여간 낙심이 아니다. 망망대해를 연상케 하는 사막과 천지를 녹일 듯 작열하는 태양은 여전하지만 그 모래 위로 뻗은 일직선 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한 사막은 그저 차창에 스치는 풍경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저 사막으로 내려서지 않는다면 타클라마칸의 고난과 위험은 단지 과거에 머물 뿐. 그렇다고 지금 도로를 벗어나 사막으로 들어설 수도 없다. 카슈가르까지는 최대한 달릴 수 있는 만큼 달려야 한다. 원치 않아도 사막을 극복해야 하는 순간은 언제든 있을 것이다.

타클라마칸 최대의 고난, '배설하기'

오늘날 타클라마칸에서 겪어야 할 최대의 고난과 모험은 생리욕구의 해결이다. 차에 오른 후 서너 시간째 먹지도, 싸지도, 움직이지도 못한 채 달리고 있다. 지평선까지 펼쳐진 사막에서 용변의 수줍음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아예 사막으로 들어갈 길조차 철조망으로 막혀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위치 선정이 중요하다.

사막에서 오줌누기. 사막의 강풍으로 인한 와류현상으로 봉변을 보지 않으려면 차체를 방호벽 삼거나 안전한 하천 터널을 이용해야 한다. 오늘날 타클라마칸에서 겪는 가장 큰 고난은 배설하기다
사막에서 오줌누기. 사막의 강풍으로 인한 와류현상으로 봉변을 보지 않으려면 차체를 방호벽 삼거나 안전한 하천 터널을 이용해야 한다. 오늘날 타클라마칸에서 겪는 가장 큰 고난은 배설하기다 ⓒ 오창학
지금 눈앞에 최적의 위치가 보인다. 급하게 차를 갓길로 붙여 세운다. 따로 하천이 없는 사막인지라 적은 비도 급작스레 범람을 유발할 수 있기에 도로 밑 곳곳에 수로를 내었다. 그 아래라면 주변의 시선과 철조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무엇보다도 큰 축복은 바람을 막을 수 있다는 것. 아, 오줌을 눌 때 불어닥치는 사막의 강풍. 그 뜻하지 않은 액체의 와류. 그 뒤의 일은 차마 생각하기도 싫다.

비록 먼저 이 길을 갔던 사람들의 선 굵은 배설흔적을 인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도로 밑 하천 터널은 '그 뜻하지 않은 와류 현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백구에 탑승한 네 명 중 유일한 여자인 아내에게 그 푸근한 안식처가 할당되고 남자들은 되는대로 차체를 방호벽 삼아 일을 치른다. 사막에서 얻는 귀중한 평안의 시간.

14시 30분. 허석(和碩)으로 들어가 점심을 먹는다. 투루판으로부터 280km를 달려왔다. 나름대로 순조로운 운행이다. 그래서 보스톤 호(博斯騰湖)에서 야영하려던 계획은 접었다. 몽고어로 '서 있다'는 뜻인 이 호수는 사막에 있는 거대한 바다 같은 곳이다. 만약 도로 사정이 여의치 않아 여정이 늦어지게 되면 무리하게 야간운전을 하지 않고 보스톤 호에서 잘 생각이었는데 이 정도라면 쿠차에서 자는 게 가능할 것 같다.

세월은 그렇게 흐르더이다

점심을 위해 들어간 도시의 식당에서 돋보기로 메뉴판을 읽는 교수님. 삼십 대 후반의 청년이 어느 새 이런 연세가 되셨다
점심을 위해 들어간 도시의 식당에서 돋보기로 메뉴판을 읽는 교수님. 삼십 대 후반의 청년이 어느 새 이런 연세가 되셨다 ⓒ 오창학
이 작은 도시는 아무래도 유전 때문에 급조된 도시 같은데 대부분 한족 위주다. 식당 역시 한족 식당에 들었는데 도시의 작은 규모치고는 시설이 좋다. 그런데 음식을 시키려니 에릭님의 부재가 몸으로 다가온다. 중국 전문가답게 우릴 위해 알아서 모든 음식을 선정해 주셨는데 이젠 철봉씨에게 재료와 조리 방법을 물어가며 우리가 직접 메뉴판을 더듬을 수밖에 없다. 교수님께 우선 메뉴판을 드렸는데 잔뜩 찌푸리며 들여다보시다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신다.

"푸하하하!"

우린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만다. 돋보기(돋보기 안경이 아니라 진짜 확대경)를 꺼내 메뉴판을 읽으시는 것이다. 웃음이 나긴 나는데 한 편으론 코끝이 시큰하다. 아아, 그 젊고 기운차던 교수님도 어느덧 이런 때가…. 15년 전 교수님을 처음 뵙던 때만 해도 30대 후반의 젊은이였던 분이 어느새 확대경 없이는 메뉴판도 읽지 못하는 연세가 되셨다.

그래 내가 깜빡하고 있던 부분이다. 이런 거친 여행에 주저 없이 동참하시고 줄곧 꿋꿋하게 동행하셨기에 늘 마흔 이전의 교수님 모습으로만, 그리고 나와 같은 상태일 것으로만 여겼다. '조금 더 신경을 써 드려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무심할 것 같아 두렵다. 운전시키고, 아무 음식이나 드시도록 강요하고, 내 의견이 맞다고 우기고…. 그래도 교수님 제 맘 아시죠. 교수님 존경하는 거. 다만 여기가 사막이어서인 거.

허석을 나서서 다시 열심히 달린다. 이제 쿠얼러를 지난다. 공작하가 흐르는 석유개발의 전초기지. 6·25전쟁에 참전한 '인민해방군'들을 대거 이주시켜 건설한 도시가 바로 여기다. 그들을 기념해 시내 중심가에 한 손엔 괭이를, 다른 한 손엔 총을 든 동상이 있다는데 오늘은 그냥 지나칠 뿐이다.

백구, 주목받다

쿠차를 200Km 앞 둔 지점. 경찰의 도로 정리로 모두 발이 묶였다. 기다림에 지친 탓인지 사람들이 온통 백구 주변으로 몰려와 구경에 열을 올린다. 와우~ 한국에선 단종된 차가 여기 와서 최신 차량으로 대접받는다. 바로 옆에 일제 사륜구동들이 즐비한데도
쿠차를 200Km 앞 둔 지점. 경찰의 도로 정리로 모두 발이 묶였다. 기다림에 지친 탓인지 사람들이 온통 백구 주변으로 몰려와 구경에 열을 올린다. 와우~ 한국에선 단종된 차가 여기 와서 최신 차량으로 대접받는다. 바로 옆에 일제 사륜구동들이 즐비한데도 ⓒ 오창학
쿠얼러를 지난 지 한참. 오후 6시. 쿠차를 200km 앞둔 지점에서 경찰(公安)이 차를 제지한다. 면허증을 제시하려 하니 검문 때문이 아니고 반대편 차량 통행 때문에 그런 것이니 차를 갓길 공터로 빼란다. 공터엔 우리뿐 아니라 버스며 승용차며 같은 처지의 사람이 버글버글하다.

더운 날씨에 차 안에 있지 못하고 다 나와 있는 통에 빙수 장사만 신났다. 혹시 저 경찰과 가게 주인이 짠 것은 아닐까? 어이없는 상상이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로만 여겨지진 않는다. 여긴 중국이니까.

시간이 지나자 자꾸만 사람들이 백구 주변으로 몰려든다. 우리 차 구경하는 모습이야 이제껏 흔한 풍경이었지만 여기선 정도가 심하다. 오랜 기다림 때문에 무료했던 탓일까? 한 무리가 우리 차를 구경하고 지나가면 더 큰 무리가 몰려든다. 차 안에 머리를 넣어 기웃거려도 보고 에어컨 송풍구 앞에 손을 대어 보기도 하며 난리다.

"어디서 왔나?"
"한국"
"앞에 글씨보고 내 알아봤다. 한국차 좋다."
"고맙다."

"어디서 왔나?"
"한국"
"어데 가나?"
"실크로드(絲綢之路)"
"한국차 좋다."
"고맙다."

대략 대화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떤 이는 백구 좌우에 정차해 있는 도요타 랜드크루저 EFI 4500을 가리키며 표정을 찡그린 채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곤 백구를 탕탕 치며 엄지손가락을 바짝 치켜세운다. 하하, 별일이다. 한국에서는 단종되어 버린 차가 7500만 원짜리 일제 신형차보다 후한 대접이라니. 사막을 건넌 당당한 위용 때문인가? 차체에 붙은 스티커와 지붕에 얹은 루프 텐트가 사람들의 시선을 자극해서? 하긴 나 역시 무쏘의 외형에 반한 사람이 아닌가.

톈진에서부터 철봉씨는 이 차에 타는 걸 신나 했다. 중국엔 이런 차 없다고, 좋아 보인다고. 그리고 여기까지 달려오는 내내 백구의 성능과 상태에 흡족해한다. 참고로 철봉씨는 면허가 없다.

잠시 후 차량 통제의 비밀이 밝혀졌다. 일군의 무리가 비상등을 켜고 빽빽 거리며 지나간다. 국빈은 아닌 것 같고 누군가 힘 좀 쓰는 사람 같은데 굳이 두 개 차선을 막으며 저 차들을 통과시켜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저 몇 대의 차량을 편안하게 보내기 위해서 이 많은 사람들이 40분 넘게 뙤약볕 아래 길가에 서 있어야 했는가? 오살할 놈들. 위대한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다!

가난한 날의 행복

길가 세차장. 가난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길가 세차장. 가난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 오창학
오후 8시. 룬타이를 지나고 쿠차가 목전에 있다. 이제 한숨을 돌리며 도로 옆 세차장에서 백구를 씻어낸다. 어제 아이딩 호 들어가며 뒤집어쓴 먼지 덕에 목 속까지 매캐하다. 광동에서 농사를 짓다가 벌이를 찾아 이주해 왔다는 가족이 운영하는 이 세차장은 물 담는 드럼통과 고압세차펌프가 설비의 전부이다. 나머진 아버지, 어머니, 누나의 노동력으로 해결한다. 하긴 세차장에 물 분사기와 인력 외에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래서인지 도로엔 세차장이 가게보다 많다.

벌거벗은 두어 살짜리 막내아들이 세차장을 쏘다니며 가족과 손님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가족들이 모두 같이 일할 수 있어서일까? 이들의 표정이 밝아 보기 좋다. 가난을 예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끌린다. 교수님이 수박 한 통을 사 오셔서 같이 나누었다.

타클라마칸의 경고

운전을 하던 아내가 비명을 지른다. 새가 운전석을 향해 날아들었다는 것이다. 흐르는 공기 때문인지 창문을 비껴 올라 루프텐트 쪽에 부딪힌 것 같다는데 손이 떨려 운전을 못 하겠다며 차를 세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운전자가 소리를 지르며 놀라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가벼운 구박과 함께 운전을 교대했다.

그런데 웬걸 10분이나 지났을까.

"퍽"
"으앗"

기어이 운전석 앞유리를 피로 칠했다. 토마토가 부딪친 것 같은 흔적. 아내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한다. 급히 차를 세우고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낸다. 이상하게도 여기 사막의 새들은 도로 좌우를 횡으로 낮게 난다. 기어이 한 마리가 앞유리에 부딪힌 것인데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그러니 아까 아내의 마음은 오죽했으랴.

쿠차 진입 직전 모래 안개에 휩싸였다. 가시거리 50m도 되지 않는 안개의 주범은 바람이 휘저어 대는 모래알갱이들이다
쿠차 진입 직전 모래 안개에 휩싸였다. 가시거리 50m도 되지 않는 안개의 주범은 바람이 휘저어 대는 모래알갱이들이다 ⓒ 오창학
타클라마칸 진입 첫날. 너무도 순탄했던 오늘 하루. 그 때문일까 날이 기울고 쿠차에 막 진입하려는 찰라 세상이 부옇게 안개로 덮였다. 그러나 안개가 아니라 바람이 휘저어 대는 모래 알갱이들이다. 사막을 우습게 보지 말라는, 너희 길은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처럼 보인다. 비록 훤칠한 포장도로로 덮여있지만 이곳은 타클라마칸인 것이다.

반가운 쿠차에 이르다

쿠차. 시간의 벽을 넘어 장군 고선지나 승려 혜초, 혹은 기생 나리슈카를 골목 어디에선가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다
쿠차. 시간의 벽을 넘어 장군 고선지나 승려 혜초, 혹은 기생 나리슈카를 골목 어디에선가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다 ⓒ 오창학
오후 9시 40분. 드디어 쿠차에 닿았다. 650km. 꼬박 12시간 만이다. 방풍림 때문일까? 신기하게도 모래 안개가 걷혔다. 대기는 아직도 훤하다. 베이징과 여긴 두 시간 시차가 있지만 중국 전체가 하나의 시간으로만 통일되어 있는 탓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반가운 쿠차. 기원전 1세기경부터 흉노와 한의 각축장이었던 쿠차는 구자(龜玆)국이라 불리며 대상무역으로 번영을 구가한 오아시스 북도 최대의 도시국가였다.

"서문 밖 길 좌우에 각각 높이 90여 척의 입불상이 있다. 절은 100여 곳, 승려는 5000여 명, 사람들은 공덕 쌓기를 다투어 한다."

현장은 7세기 쿠차의 풍경을 이렇게 읊었다. 당시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이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2만의 인구로 구성되었던 반면 쿠차는 10만의 인구였으니 그 규모를 알만 하다. 특히나 당 대에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고선지 장군이 서역정벌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곳인지라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런 연고 때문일까. 처음 보는 사람과 건물임이 분명할진데 아주 오래 떨어져 있던 낯익은 동네에 다시 온 느낌이다. 어디선가 기생 라리슈카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나타날 것 같다. 어스름한 골목 한 편에선 천축에서 돌아오는 혜초가 걷고 있을 것 같은 느낌. 쿠차의 첫 느낌은 몽환처럼 다가온다.

쿠차 야시장. 빤미옌과 양꼬치가 일품이다. 아내는 이 와중에도 우리 여행자금 전액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숙소든 식당이든 카드가 통용되는 곳이 적고 ATM 역시 되는 곳이 많지 않아 여정에 필요한 경비를 다 지고 다녀야 하는 탓. 이 많은 돈을 차나 숙소에 두기도 위험하니 이렇게 들고 다닐 밖에
쿠차 야시장. 빤미옌과 양꼬치가 일품이다. 아내는 이 와중에도 우리 여행자금 전액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 숙소든 식당이든 카드가 통용되는 곳이 적고 ATM 역시 되는 곳이 많지 않아 여정에 필요한 경비를 다 지고 다녀야 하는 탓. 이 많은 돈을 차나 숙소에 두기도 위험하니 이렇게 들고 다닐 밖에 ⓒ 오창학
짐을 풀고 시 중심가에 나섰다. 10시가 넘은 어둠의 공간에 야시장의 조명과 활기가 자리 잡는다. 노점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모래를 양념 삼아 양꼬치와 빤미옌을 시켜 먹는다. 양꼬치는 소금 기름장에 버무린 양 자투리 부위를 꼬치당 예닐곱 개씩 기름 부위와 섞어 꿴 후 후추를 뿌려가며 숯불에 굽는데 의외로 맛이 좋다. 톈진을 비롯한 곳곳에서 양고기 꼬치를 먹어봤지만 이곳의 꼬치는 유독 크고 육질이 좋은 것 같다.

스파게티와 짬뽕의 중간음식이라 할 빤미옌(拌面)도 신장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위구르 사람들은 '라타오즈'라 부르는데 맛이 제법 먹을 만하다. 게다가 양천엽과 삶은 땅콩이 특식으로 곁들여진 만찬이라 게눈 감추듯 먹고 있는데 교수님은 당최 종류가 맘에 들질 않는 표정이시다. 하긴 바람 부는 한 데서 모래가 수북한 면과 고기를 맛있다고 먹는 우리 부부가 이상하지. 낮 사이 교수님께 그토록 잘해 드리자 다짐했건만 또 내 생각만 했다.

미어지는 배를 추스르며 뒤뚱거리면서도 또 수박 수레 앞에 멈춰 선다.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단맛과 싼 가격 때문에 과일 중독자가 되었다. 교수님도 과일이라면 매우 흡족해 하신다. 안전한 도착과 몽환적인 쿠차의 밤이 주는 아늑함, 그리고 부른 배가 주는 행복에 젖어 하루를 접는다.

투루판-쿠차 여정


오늘 하루 이동 거리 650Km. 12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도 길이 좋았던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투루판에서 카슈가르까지의 옛 오아시스 북로에 해당하는 길은 전부 포장이 된 상태며 일부구간은 고속도로화 되어 있다. 길에 별도의 휴게시설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아시스를 지나쳐 갈 때 마을에 진입하거나 길가의 노점상을 이용할 수 있다.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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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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