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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소나무와 달 (소청산장 부근)
눈과 소나무와 달 (소청산장 부근) ⓒ 제정길
길은 시작부터 가팔랐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은 가파른 산을 더 가파르게 느끼게 했고 랜턴으로 비춰지는 세상은 좁은 시야를 더 좁아 보이게 했다. 산은 고요하고 지나는 등산객 하나 없어, 네 중늙은이는 서로의 랜턴 빛에 의하여 존재를 교신하며 산행을 계속했다.

@BRI@소청대피소가 가까워졌다. 산을 오를수록 눈은 더욱 두터워지고, 등산로 가장자리 밟히지 않은 눈에서는 랜턴 불빛이 비칠 때마다 영롱한 무지개 색갈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마치 하늘의 별들이 만월에 의해 쫓겨 지상으로 내려와 눈 속에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내 평생 본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였다.

소청대피소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중청으로 향하였다. 새벽은 아직 멀었으나 달은 약간 기력을 잃은 듯 서녘으로 조금 더 기울었고, 산마루에는 낮게 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걸음을 재촉하여 중청에 닿으니 7시, 기온은 싸늘하고 바람은 차가웠다. 올려다 보이는 대청봉에 운무가 자욱해 일출이 걱정되었다.

대청봉은 추웠다. 어둠은 가셨으나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았고 희뿌연 운무와 바람 속에서 등산객 대여섯 명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운무속의 대청봉 2007.1.4. 07:40
운무속의 대청봉 2007.1.4. 07:40 ⓒ 광암 김재부
열 몇 번을 올라보는 대청이지만 늘 올라보면 그곳엔 작은 실망이 눈잣나무처럼 부복해 있었다. 대청은 그 자체가 미미하다. 기껏해야 배배 꼬여 땅 위를 벌벌 기는 키 작은 나무들과 한 무더기의 대청봉이라 새겨진 바위와 바람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한사코 대청을 기어오르는 이유는 대청이 갖는 위치, 1708m의 높이와 그 높이에서 조망 되는 여러 경관들, 아득히 바라보이는 동해의 푸른 물과 기암괴석이 용트림하는 이리저리 뻗은 능선들, 유리알 같은 계곡들을 발아래 거느렸기 때문이리라. 세상 어느 것이나 높이 선 자는 그 자체보다 더 위대해 보이는 법인가 보다.

자욱한 운무속에 뜨는 해는 간데 없고 지는 달만 휘황하다. (대청봉)
자욱한 운무속에 뜨는 해는 간데 없고 지는 달만 휘황하다. (대청봉) ⓒ 광암 김재부
오늘 일출 보기는 그른 모양이다. 동녘 하늘에 구름이 짙게 깔려있고 대청봉 주변으로 운무가 싸고돌아, 기다려 본다 해도 해 보기는 난망할 것 같았다. 허망했다. 천릿길을 달려 왔는데... 노력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지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하늘의 몫이란 걸 새삼 느꼈다. 위로를 하고자 함인지 돌아보니 서녘에 달이 떠 있었다. 짙은 운무 속에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달....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 아직 지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듯하였다.

뜨는 해는 보지 못하고 지는 달만 보며 대청봉을 퇴각하여 중청으로 돌아왔다. 대피소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씩 마시며 대청의 찬바람에 언 몸을 녹이며 진로를 협의하였다. 시간은 널널하니(널찍하다의 방언) 휘운각 쯤에서 아침을 먹고 점심은 설악동에 내려가서 먹기로 결정하였다.

휘운각 가는 길의 설경
휘운각 가는 길의 설경 ⓒ 제정길
산천경개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가며 쉬엄쉬엄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올라갈 땐 미처 몰랐는데 소청에서 중청 가는 길의 눈꽃이 절경이었다. 그 눈꽃 터널을 융단 같은 눈을 밟으며 지나가는 맛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비록 일출은 보지 못했으나 아쉬움을 달랠 만했다. 소청에서 휘운각으로 접어드는 길목쯤에서 갑자기 해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옅은 구름 속에서 해는 산마루를 솟아올라 달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냥 보내기가 미안하여 뒤늦게나마 배웅이라도 하려는 것인지.....그러나 해, 해 같지 않고 달처럼 보였다.

달처럼 뜬 해, 화투의 팔광을 연상시킨다
달처럼 뜬 해, 화투의 팔광을 연상시킨다 ⓒ 제정길

여명을 받아 깨어나는 설악산
여명을 받아 깨어나는 설악산 ⓒ 제정길
눈이 푸근히 쌓인 소청에서 양 폭까지 엉덩이 썰매를 타고 하산하는 사람도 더러 보였다. 나도 몇 번 즐겼으나 바지 가랑이 속으로 눈이 들어와 그만 두어야 했다. 휘운각 부근의 잘 생긴 눈꽃 나무아래에서 양갱으로 아침 요기를 때우고는 하산을 계속했다. 소공원에 도착하니 12시를 조금 지났다.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하고 차를 몰아 서울로 돌아왔다. 저녁 7시였다.

눈길에 부질없이 발자국만 남기다.
눈길에 부질없이 발자국만 남기다. ⓒ 광암 김재부
우리는 그곳에 무얼 보러 갔을까? 뜨는 해? 지는 달? 눈 덮인 산? 1708m라는 높이?

단언하건데 내가 보고 온 것은 다만 나의 발자국뿐이었다. 눈밭에 찍힌 내일이면 지워져버릴 나의 발자국. 새해가 되어 나이 한살 더 먹어 60대 중반으로 들어서는데, 내 발자국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우스갯속 며느리의 지청구를 들음이 백번 마땅하리라.

"얼마를 더 살려고 산에를 그렇게 다녀, 제 발 밖에 못 보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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