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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암
봉정암 ⓒ 제정길
오후 3시 30분에 봉정암에 닿았다. 해발 1224m의 고도에 위치한 작은 암자는 눈 속에 파묻혀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다. 봄 가을에는 3000명도 더 찾는다는 절 경내는 텅 빈 듯이 고요하다. 다만 일하는 젊은이 한 명이 눈치는 가래로 산사의 적막을 한 삽 한 삽 절 마당 아래로 퍼내고 있었다. 종무소에 가서 4명분의 잠자리를 예약하고는(1인당 만원이란다) 석가사리탑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적멸보궁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내 눈에는 눈 속에서 망연히 조시는 듯 보였다.

@BRI@저녁 공양은 6시였다. 미역국에 김치 그리고 밥이 전부였다. 절에서의 식사는 처음이라 여러 면에서 어색했다. 너무도 단출한 음식수도 그렇고 먹는 방법도 그랬다. 미역국 그릇에 밥 넣고 김치 넣고 훌훌 말아서 먹는 게 다였다. 그래도 다들 잘 먹었다. 동행한 친구들은 말할 것 없고, 같이 식사하는 보살님, 등산객 2명도 한 그릇씩 후딱 해치우고 더 달라고 하였다.

나만 절에 갖다놓은 새색시 꼴이었다. 더구나 밥 말아 먹은 그릇에 물을 받아 마시고 헹구어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있다가 고춧가루에 깨소금에 미역 건더기까지 남아있는 그릇에 물을 받아 마시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수행이지만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고통이 되었다. 하나의 사물도 관점에 따라서 의미가 다름을 새삼 깨달아야 했다.

눈속에 졸고 계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눈속에 졸고 계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탑 ⓒ 제정길

봉정암에서 바라보는 설경
봉정암에서 바라보는 설경 ⓒ 제정길
절에서의 시간은 무료하고 막막했다. 시간은 법당 추녀에 걸린 풍경처럼 아주 느리고 나지막하게 울려 퍼지며 눈 덮인 나무숲위로 배회하였다. 공양을 끝내고 요사채로 돌아와 자리에 누우니 7시도 채 안되었다. 오랜만의 장거리 산행에 몸은 물에 젖은 솜처럼 고단하였으나 정신은 오히려 말똥말똥해져 잠은 쉬이 들 것 같지 않았다. 해우소도 갈 겸 절 마당에 나와 보니 어느새 날씨가 개어 산등성이 너머로 보름달이 말끔히 떠올라 있었다. 산속에서 보는 보름달은 유난히 크고 맑았다.

달무리를 하며 절 마당에 놀러 나온 만월
달무리를 하며 절 마당에 놀러 나온 만월 ⓒ 제정길
9시가 되자 요사채의 불은 나갔다. 조용하던 산사에 그나마 통통거리며 돌아가던 발전기 소리마저 그치자 산사는 말 그대로 절간 같았다. 이리저리 겹쳐 누운 옆 등산객의 코고는 소리, 잠 못 이루어 뒤척이는 소리, 가는 한숨 소리만 낮게 울릴 뿐. 멀리 나무에서 눈 떨어지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잠은 오지 않고 산 아래에 두고 온 번뇌만 어느새 그곳까지 따라와 있었다.

바위도 부처를 닮아 가는가? (봉정암 부근)
바위도 부처를 닮아 가는가? (봉정암 부근) ⓒ 제정길
새벽 3시에 불은 다시 들어오고 산사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동행들은 예불 참석에 바쁘고 나는 다시 누웠으나 자는 것도 깨어있는 것도 아닌 상태로 멍하니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간밤에 전혀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았다.

내내 뒤척이다가 5시40분에 배낭을 꾸려 산행을 나섰다. 대청봉에서의 일출이 7시 40분경이라니 지금 출발하면 넉넉하게 일출을 볼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발걸음은 힘찼다. 하늘은 맑게 개었고 날씨는 좋았다. 서편 하늘에서는 아직 총기를 잃지 않은 만월이 별 몇을 거느리고 호기롭게 지상을 순찰하고 있었다. 은색의 눈 위에 은색의 달빛이 내려앉아 산은 환상 그 자체였다. <3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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