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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정 통일부 장관
ⓒ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신년사를 놓고 새해부터 시끄럽다. 북한의 빈곤문제를 3000억 달러 수출국으로서 세계경제 10위권의 국가로서, 또 같은 민족으로서 우리가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2일 오전 이 장관의 신년사가 공개됐을 때 통일부 기자실이 약간 술렁였던 것은 사실이다. 지난해 7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뒤 끊겼던 쌀과 비료의 지원을 재개하겠다는 암시로 생각되었다. 남북관계가 몇 달 동안 단절되면서 내내 계속되던 '기사가뭄'이 이제는 해소되려나 하는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신년사 공개 직후 장관실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바로 깨졌다. 신년사의 내용에 대해 여러 기자들이 꼬치꼬치 캐물었으나 이 장관의 발언은 결국 원론 수준이었다. 3일에 나온 통일부의 보도해명자료처럼 "한반도 평화를 위해서는 북핵문제와 함께 빈곤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 장관은 "북한이 핵실험까지 간 여러 가지 배경을 본다면 빈곤 문제도 하나의 원인"이라는 발언을 했다. 민감하게 들릴만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이 결국 안보문제와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과 직접 협상하고 이 과정에서 몸값을 올리기 위한 '수단'이라는 맥락으로 이해시켰다.

기자들이 질문 공세가 계속되자 이 장관은 "아이고 연초부터 너무 세게들 하시지 말고~" 하면서 서둘러 간담회를 끝냈다.

결국 이 장관의 신년사는 알맹이가 없었다. 그러나 몇 가지 표현상의 문제 때문에 보수 진영에서 이를 물고 늘어질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예견됐다.

<조선>과 <동아>는 3일자 1면 기사와 사설로 이 장관의 발언을 공격했다. 한나라당은 북한 빈곤에 대한 남한 책임론은 파격적인 대북지원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가 있다고 들고 일어났다. 정형근 의원은 박재규 전 통일부 장관이 지난해 10월 방북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다고 확인되지 않은 주장을 했다.

여야사이에 공방전이 벌어졌고 처음 신년사를 소개하지 않았던 일부 언론들도 '이재정 장관 발언 논란' 식으로 기사를 냈다. 이것이 기자가 본 이재정 발언 파문의 전말이다. 그러나 이런 공방전을 보고 있는 기자의 마음은 영 개운치 않다. 실체가 없이 벌어지는 그림자 연극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6자회담과 쌀·비료 지원

우선 의문이 드는 것은 정부가 쌀과 비료 지원을 재개할 실질적인 의지나 계획이 있느냐는 것이다. 만약 의지가 있었다면 지난해 11월1일 북한이 6자 회담에 참가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이미 운을 떼고 분위기 조성 작업을 해야 했다. 북한이 지난해 7월 미사일을 발사한 뒤 쌀과 비료 지원을 중단하면서 정부는 "6자회담이 다시 시작되면 이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그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외교안보 분야의 한 전직 당국자는 "퇴임을 앞두고 있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이 그 때 총대를 메야했다"며 "남북대화 채널을 복원하기 위해 쌀과 비료지원 재개가 필요한데 이것은 하지 않고 퇴임 며칠 전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방문한 것은 일종의 쇼"라고 혹평했다. 그는 "이미 시기가 많이 늦었다"고 덧붙였다.

다른 문제도 있다. 정부는 유엔의 대북 제재 결의안을 가장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며 그 구체적 사례가 쌀과 비료지원 중단이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유엔의 대북 제재는 유엔 회원국이자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라는 설명도 했다. 쌀과 비료 지원 중단을 유엔 제재와 묶어 놓았다. 이런 논리 속에서는 유엔 제재가 계속되는 한 쌀과 비료 지원 재개는 힘들다.

또 논리적 일관성도 없다. 어떤 때는 북한에 대한 쌀과 비료 지원은 아무 조건이 없는 인도적 차원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끊었느냐?"는 질문에는 상황상 어쩔 수 없다는 조건을 단다. 쌀과 비료지원은 정부의 설명에 따르면 어떤 때는 조건없는 인도적 문제이고 어떤 때는 유엔 제재 차원이라는 조건이 붙은 문제다. 이런 식으로 상황에 따라 말을 바꿔왔다.

여야의 게임의 법칙

@BRI@지난달 28일 백종천 청와대 안보실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쌀과 비료지원 재개 시점에 대해 "6자 회담의 진전상황을 보겠다, 6자회담이 어느 정도 진전이 되면 국민들이 이해도 하고 여론도 바뀌고 정부가 쌀과 비료 지원을 재개하는데 부담이 없잖겠나?"라고 말했다.

한미FTA, 용산미군기지 이전, 사립학교법, 부동산 정책 등등 계층과 이념에 따라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안에서 현 정부는 좌고우면(左顧右眄)을 한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독불장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쌀과 비료지원 재개 문제에 있어서만은 유독 국민들의 이해와 여론을 앞세운다.

논란많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설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다는 설은 지난 3년간 주기적으로 국내 언론의 지면을 장식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형식 파괴를 좋아하고 이것을 자랑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에서만은 '우째' 그리 조건과 형식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한심하기는 보수진영도 마찬가지다. '친북좌파' 정권이 어째서 지난해 여름 이후 북한 정권과 대화가 끊기고 6자회담 재개도 중국을 통해 듣고 쌀과 비료지원에 국내 여론의 눈치를 살피고, 김정일을 그냥 만나면 되지 이리 저리 조건을 따지는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꾸 비슷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 여야가 그들만의 '게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실질은 없이 현 정권 인사들은 보수진영이 격렬하게 반응할 만한 말을 하고, 이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면 원론적 차원의 발언이었다고 발뺌을 하고, 보수진영은 그 진심을 알면서도 '친북좌파'라고 공격하고 언론은 '논란'이라고 보도하고….

이 과정에서 정부와 여당은 자주파로 각인되고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은 애국세력으로 각인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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