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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제주), 바닷가에 있는 사스레피나무의 꽃은 절대로 서서는 볼 수 없다. 얼굴을 땅에 붙이고 봐야 볼 수 있다.
11월 초(제주), 바닷가에 있는 사스레피나무의 꽃은 절대로 서서는 볼 수 없다. 얼굴을 땅에 붙이고 봐야 볼 수 있다. ⓒ 김민수
겨울이 한창 무르익어야 제철이라고 피어나는 꽃들이 있다. 그 중 바람 많은 제주의 해안가 혹은 갯바위에는 바람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이 있다.

바람이 오죽했으면 바람이 부는 방향을 피해 가지를 내었는데, 위에서 보면 사철 푸른 이파리만 보인다. 그런데 그 나뭇가지 아래에는 총총하게 작은 종을 닮은 꽃들을 수없이 달고 활짝 웃고 있는 모양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추워도 바람이 불어도 납작 엎드린데다 이파리로 막아주니 끄떡없이 피어나는 것이다.

11월에 만난 꽃, 그렇게 한 겨울을 나고 이른 봄까지 피어 있다가 어느 순간 까만 열매를 다닥다닥 맺는다. 꽃과 열매가 나뭇가지 아래에 피어 있다 보니 바닷가에서 사스레피나무를 많이 보았으면서도 꽃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러다 바다에서 좀 떨어진 민가에서 자라는 제법 큰 나무 아래에서 하늘을 바라보다 비로소 꽃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해안가나 갯바위에 바짝 엎드려 있는 나무에도 물론 꽃이 피어 있었다.

3월 중순, 따스한 햇살이 오히려 버거운 듯 타버린 꽃
3월 중순, 따스한 햇살이 오히려 버거운 듯 타버린 꽃 ⓒ 김민수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오면 싱그럽던 아이보리색의 꽃들이 타들어간다. 봄보다는 겨울에 더 싱그러운 꽃, 꽃마다 삶의 양태가 다르다고는 하지만 추운 겨울바람과 바다의 파도를 벗삼아 피어나는 이들은 삶이 힘들 때 많은 위안을 준다.

겨울이나 파도나 바람, 이것들이 상징하는 바는 '고난'이다. 그런 고난들을 벗삼아 피어나는 꽃이니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삶이 전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어느 조사기관에서 숲이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탁월하다는 보도를 냈다. 우울증 초기인 사람에게 숲을 거닐게 한 후에 검사를 해보니 정상인들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숲만 그럴까?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곳에 병이 생기게 마련이고, 비인간적인 삶이란 다른 말로 자연인인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간다는 이야기니, 자연의 품에 안겨 해독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치료법인 것이다.

겨울내 폭풍우에 찢겨진 이파리, 손님도 찾아왔다.
겨울내 폭풍우에 찢겨진 이파리, 손님도 찾아왔다. ⓒ 김민수
나는 궁금했다. 보이지 않는 꽃에도 곤충들이 날아들까 하는 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지켜본 바로는 간혹 바보꽃처럼 계절을 잃어버린 나비와 벌들이 그들을 찾았으며, 따스한 봄이면 무척이나 많은 곤충들이 그들을 찾았다.

겨울에 피어났지만 이른 봄까지 그들이 말라가면서도 꽃을 피우고 있었던 이유를 알겠다. 꽃받이를 하고 나면 얼른 꽃을 떨어뜨리고 까만 열매를 맺는다.

겨울날 찬바람에도 떨어지지 않던 꽃이 자신의 임무를 마치면 미련없이 떨어진다. 놓아버림, 그것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가야할 때가 와야 할 때를 놓치지 않아 때론 서운한 것이 자연이다. 인간이 간혹 추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가야할 때와 와야 할 때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꽃은 절대로 기다려 주지 않는다. 자기 때에 피어났다가 갈 때가 되면 미련없이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그래서 세상사에 시달려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아무리 무성하게 피어났던 꽃들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내년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해마다 같은 꽃을 만나도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말, 한창 피어있다. 이파리의 모양에 따라 '사스레피나무'와 '우묵사스레피나무'라고 구분을 하는데 이것은 우묵사스레피나무에 속한다.
11월말, 한창 피어있다. 이파리의 모양에 따라 '사스레피나무'와 '우묵사스레피나무'라고 구분을 하는데 이것은 우묵사스레피나무에 속한다. ⓒ 김민수
제주의 바다와 제주의 바람과 제주의 돌
그들을 벗삼아 살아간다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제주의 바다와 제주의 바람과 제주의 돌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들에게는 낭만일지도 모르지만
평생을 그 곳에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낭만이 아니다.
그러나 늘 힘에 겨운 것은 아니다.
바다 잔잔한 날도 있고, 바람 없는 날도 있다.
보슬비 내려 갯바위 틈 촉촉한 날도 있다.
모든 날 보듬고 그 모든 날 삶이라 여기고 살아가다보면
꽃피는 날도 있고, 열매 맺는 날도 있다.
어느새 바라보면 멀리만 보이던 바위틈에 기대어 쉬는 날도 있다.
그러니 너무 쉽게 힘들다고 하지 마라.
힘들어도 너무 쉽게 말하지 말아라.
마음 속에 담고 살아가는 것도 삶이다.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다.

<자작시 - 사스레피나무>


1월초, 제주 종달리 바다의 갯바위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나뭇가지 밑에는 꽃이 무성하다.
1월초, 제주 종달리 바다의 갯바위에서 겨울을 나고 있다. 나뭇가지 밑에는 꽃이 무성하다. ⓒ 김민수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다. 물론 다 그렇게 갯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갯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것들은 크게 자라지 못하고 갯바위에 바짝 붙어 바람을 피한다.

한 해 두 해 바라보아도 자라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잠시 그를 잊고 있다 찾아가 보면 언제 그렇게 많이 자랐는지, 한겨울 매서운 바람에도 어찌 그리 고운 꽃을 맺고 있는지 신기할 뿐이다.

결국 삶이란 주어진 환경과 상황에 불평불만을 하기보다는 주어진 환경을 어떻게 맞이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남이 변하는 것보다 자신이 변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렵다고 푸념을 하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남에게 변하라고 요구할 때이다. 나는 이미 다 변했는데 남이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은 것은 자신밖에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우리의 삶, 돌아보고 또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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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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